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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 성정각 권역
9월 2,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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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창덕궁-성정각 권역
성정각誠正閣 권역 궁궐


5-h-1 영현문迎賢門
위치와 연혁 : 지금은 내의원이라 부르는 성정각의 남문이다. 『궁궐지』의 「창덕궁·성정각」조에 “성정각은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다. 그 곳의 남문을 영현문이라 한다.”<원전 1>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정각이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었다는 것은 문의 편액을 해석할 때 도움이 되는 중요한 단서이다.
뜻풀이 : ‘영현(迎賢)’이란 ‘어진이를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세자가 공부하는 장소이므로, 어진이를 맞아들여 공부에 힘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제작 정보 : 지금 영현문 안쪽 본채에는 현판이 붙어 있지 않고,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란 편액과 함께 마당에 약을 찧는 절구가 있으므로 내의원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것은 순종 때의 일시적 조치였으므로 성정각으로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5-h-2 보춘정報春亭

위치와 연혁 :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남향하여 붙은 현판이다. 『궁궐지』에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원전 2>라고 하였다. 『동궐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뜻풀이 : ‘보춘(報春)’은 ‘봄이 옴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고 성정각이 춘궁(春宮: 왕세자)이 독서를 하는 곳이므로 ‘춘(春)’ 자가 중의적으로 쓰인 듯하다.
5-h-3 희우루喜雨樓

위치와 연혁 :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동쪽을 향해 붙은 현판이다. 『궁궐지』에서는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원전 3>라고 하였고, 『동궐도』에서도 비슷하게 기록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1) 54권에 「희우루지(喜雨樓志)」가 있다.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정유(1777, 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자 마침 비가 내렸고, 또 몇 개월 동안 가물다가 이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다시 비가내려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지어 기념했다는 내용이다.<원전 4>

뜻풀이 :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喜雨]는 뜻이다. 송나라 소식(蘇軾,1036~1101년)이 「희우정기(喜雨亭記)」2)를 지은 이래 ‘희우’는 정자의 이름으로서 각지에서 애용되었다. 창덕궁 주합루 뒤에도 희우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제작 정보 : ‘喜(희)’ 자는 속자로 써서 하반부 점획(點劃)이 하나 생략되었으며 ‘樓(루)’ 자도 속체로 써서 정자(正字)와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5-h-4 집희緝熙
위치와 연혁 : 예전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관물헌(觀物軒) 건물에 걸려 있는 어필 현판이다. 『동궐도』에는 지금의 이름이 아니라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년)가 세자로 책봉된 다음 이 곳에서 서연(書筵) 3)을 한 일이 있고, 1874(고종 11)년에는 순종이 이 곳에서 탄생하였다. 1884(고종 21)년 갑신정변 때에는, 사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 수비가 용이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개화파가 고종을 모시고 이 곳으로 피신하여 청나라 군사들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뜻풀이 : ‘집희(緝熙)’란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緝熙]는 의미이다. 『시경』 「대아(大雅)·문왕(文)」편 4)에 “심원하신 문왕이여, 아! 계속해서 밝히시고 공경하시도다.”<원전 5>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주자(朱子, 1130~1200년)는 “집(緝)은 이어지는 것이요, 희(熙)는 밝은 것으로 또한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원전 6>라고 하여 ‘임금[文王]의 밝은 덕이 계속하여 빛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한편 경희궁(慶熙宮)에도 집희당(緝熙堂)이 있었는데, 영조는 「집희당시(緝熙堂詩)」를 지어 “이 전각은 옛날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어 날로 더욱 친하도다.”<원전 7>라고 읊었다. 집희당은 본래 세자의 거처이고 그 뜻이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繼續光明)’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제작 정보 : 집희라는 현판에 ‘갑자년(甲子年)’, ‘어필(御筆)’이라 덧붙여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재위하는 동안 갑자년이 들었던 영조·순조·고종 가운데 어느 임금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종이 즉위 원년에 15세의 나이로 글씨를 썼으므로 다소 서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5-h-5 조화어약調和御藥·보호성궁保護聖躬

위치와 연혁 : 현재 성정각 앞 행각에 ‘조화어약’과 ‘보호성궁’이란 편액이 나란히 북쪽을 향하여 걸려 있다. 본래 창덕궁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의 약방 자리에 있었다. 고종 때 내의원을 전의사(典醫司)로 개편하였고, 순종 때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내의원이 헐리어 현판과 도구들을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뜻풀이 : ‘조화어약(調和御藥)’은 ‘임금이 드시는 약을 조제한다’는 의미이다.
‘보호성궁(保護聖躬)’은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성(聖)’은 임금을 뜻하며 ‘궁(躬)’은 몸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근래에 나온 일부 책에서 이 현판들을 정조의 어필이라고 본 경우도 있지만, 임금이 스스로 ‘보호성궁’이라고 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경지략』에서는 원해진(元海振)이 ‘화제어약(和劑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여덟 글자를 썼다고 했다.<원전 8> ‘화제어약’은 ‘조화어약’을 착오로 잘못 쓴 것으로 보이며 원해진은 인적 사항 미상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명필로 유명한 원진해(元振海, 1594~1651년)를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5-h-6 자시문資始門

위치와 연혁 : 중희당(重熙堂)의 서쪽에 위치했던 문이다. 지금은 중희당이 없으므로 마치 관물헌, 즉 집희의 출입문처럼 되어 있다. 『궁궐지』에는 “중희당이 관물헌 동쪽에 있는데, 1782(정조 6)년에 건립되었고, 동쪽이 중양문(重陽門), 서쪽이 자시문이며, 편액은 정조의 어필이다.”<원전 9>라고 되어 있다.
뜻풀이 : ‘자시(資始)’는 ‘만물이 힘입어 비롯한다’는 의미이다. 『주역(周易)』에서 나온 말로 건괘(乾卦; )의 자시(資始)가 곤괘(坤卦; )의 자생(資生)과짝을 이룬다. 「건」의 단사(彖辭) 5)에,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니[資始], 이에 하늘을 통합하였도다.”라고 했고, 「곤」의 단사에는,“지극하다 곤의 원(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생겨나니[資生], 이에 순히 하늘을 받든다.”라고 했다. 주자의 풀이를 종합하면, ‘건원은 천덕(天德)의 큰 시작[大始]이므로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 모두 이에 힘입는다. 자시의 시(始)는 기(氣)의 시작이고, 자생의 생(生)은 형(形)의 시작이다.’<원전 10>라고 하였다.

제작 정보 : 현재의 현판이 실제 정조가 직접 쓴 글씨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5-h-7 망춘문望春門

위치와 연혁 : 관물헌 뒤의 후원으로 이어진 길가에 남쪽 방향으로 난 문이다.『동궐도』에는 희정당의 동문으로서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있어서 후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되어 있다.
뜻풀이 : ‘망춘(望春)’이란 ‘봄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대로 동향이 되어야 춘(春)의 의미와 어울린다. 망춘은 중국의 수·당 시대 이래로 전각이나 정자의 이름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제작 정보 : 현판에 쓰인 ‘?(망)’은 ‘望(망)’의 속자이다. 동궐도에는 희정당의 동문으로서 동서 방향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남향으로 되어 있어 방향이 전혀 다르다. 지금 망춘문 바로 아래에 현판이 걸리지 않은 문이 동향으로 나있는데, 『동궐도』 상으로는 이 문이 망춘문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자리는 응경문(凝慶門)이 되어야 할 듯하다.
5-h-8 동인문同仁門

위치와 연혁 : 희정당의 동쪽 문으로 경사진 계단 위에 위치해 있다. 현재 집희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뜻풀이 : ‘동인(同仁)’이란 ‘차별 없이 인애(仁愛)를 베풀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인덕(仁德)을 함께 행한다’는 의미도 있다. 동쪽이 오행상 인(仁)에 해당하는 방위이므로 동인이란 의미와 잘 어울린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20에 “이치가 하나로부터 각기 나누어지므로 비록 차별 없이 인애로 대해주나, 스스로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원전 11>고 하였다.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 6)이 쓴 『소서(素書)』의 「안례(安禮)」에서는 “인을 같이하면 서로 근심하고, 악을 같이하면 서로 당파를 짓는다.”<원전 12>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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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재전서』는 정조의 문집이다. 시문·윤음·교지 및 기타 편저를 모았다.
2) 「희우정기」는 소식이 1062년에 부풍이라는 고을에 관리로 부임했을 때 지은 정자를 희우정이라고 부른 내력을 쓴 글이다.
3) 서연은 황태자나 왕세자를 가르치는 강의를 일컫는다. 강의는 조강, 주강,석강이 있었다.
4) 「문왕」은 대아편의 첫 시로, 문왕이 천명을 받아 주나라를 건설한 것을 기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5) 단사는 단전(彖傳)이라고도 하며,『주역』 64괘의 뜻, 덕, 괘문, 괘명 등을 통괄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6) 황석공은 중국진(秦) 나라 말의 은사(隱士)이자 병법가(兵法家)이다.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를 전해 주었는데, 장량은 이 병서를 읽고서 한나라 고조의 중국 통일을 도왔다고 한다.
<원전 1> 『궁궐지』, “春宮 胄筵之所也. 南曰迎賢門.”
<원전 2> 『궁궐지』, “喜雨樓報春亭, 卽誠正閣之東樓. 東曰喜雨, 南曰報春.”
<원전 3> 『궁궐지』, 보춘정 <원전 2> 참조.
<원전 4> 『홍재전서』 권54, 「희우루지」, “予名新建之樓曰喜雨. 喜雨而名其亭, 古也. 歲丁酉,重建斯樓, 時天旱久, 不雨垂月餘. 工役始而雨,左右曰瑞也, 名斯樓喜雨可乎. 予曰未也, 雨未滂?, 田將蕪矣, 曷云瑞. 又數月而不雨, 左右曰樓成矣. 予命夙駕, 共近臣, 言止于樓, 而天作雲, 沛然下雨. 左右復請以喜雨名斯樓, 予曰可. 顧近臣曰, 歲可大有, 而民樂業, 喜其大矣. 古人之以喜雨名其亭, 欲以志喜雨之喜也. 心而喜喜雨而志之, 則志乎心不忘可已. 惡乎名其亭, 心者已知之, 而人之知弗與焉. 志乎心則己獨喜其喜, 而不與人共喜也. 故喜之大者, 志乎心, 志乎心之不足, 志之於物, 志於物之不足, 遂有亭之名焉.於是乎其喜之志也大矣, 故名斯樓曰喜雨樓云.”
<원전 5> 『시경』 「대아·문왕」편,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원전 6> 주자, “緝續, 熙明, 亦不已之意.”
<원전 7> 영조, 「집희당시」, “此閣古春邸, 堂中寶墨新. 繼續光明也, 尊賢日益親.”
<원전 8> 『한경지략』 「내의원(內醫院)」, “正廳所揭板曰 和劑御藥保護聖躬八字 則元海振書也.”
<원전 9> 『궁궐지』, “重熙堂, 在觀物軒東. 正祖六年壬寅建, 東曰重陽門, 西曰資始門.堂額正祖御筆.”
<원전 10> 『주역』 「건」, “(彖曰)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이 구절에 대한 『본의』의 해석, “此一節者, 釋元義也. 大哉, 歎辭. 元,大也始也. 又爲四德之首而貫乎天德之始終, 故曰統天.”; 『주역』 「곤」, “(彖曰)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이 구절에 대한 『본의』의 해석, “此以地道明坤之義, 而首言元也. 至, 極也.比大義差緩. 始者, 氣之始, 生者, 形之始. 順承天, 施地之道也.”
<원전 11> 『주자어류』, 권20, “理一而分殊, 雖貴乎一視同仁, 然不自親始也不得.”
<원전 12> 황석공, 『소서』 「안례」, “同仁相憂,同惡相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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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 - 선정전 권역
8월 2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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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선정전 권역
선정전宣政殿 권역

4-h-1 선정전宣政殿

위치와 연혁 : 인정전의 동편에 있는 임금의 편전이다. 원래 이 곳의 이름은 아침마다 임금에게 정무를 아뢰던 청사(廳舍)라는 뜻의 조계청(朝啓廳)이었는데,1461(세조 7)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이라고 고쳐 불렀다.<원전 1> 편전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렀다. 이 곳은 임금의 집무실이지만 때때로 왕비가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따르면 1471(성종 2)년 가을에 왕비가 이 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고, 1477(성종 8)년과 1493(성종 24)년 봄에는 친잠례(親蠶禮) 1)를 지냈다.
조선 후기에는 편전을 내전의 희정당(熙政堂)으로 옮겨 사용하였다.
선정전은 남아 있는 창덕궁의 건축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조선 중기 건축 재료의 모습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재건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때 또 불에 타 1647(인조 25)년 11월에 인경궁(仁慶宮)을 헐어서 재건하였다. 1803(순조 3)년에 또 불에 타서 이듬해(1804년) 12월에 재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영조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 『소학(小學)』을 토론하여 영조 20년에 『선정전훈의소학(宣政殿訓義小學)』을 간행하기도 했다.


뜻풀이 :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이는 곧 어진 정치를 베푼다는 말이다. '선정'이라는 이름은 6세기 후반 중국남북조 시대에 북주(北周) 2)에서 황제의 연호로 쓰인 적이 있고, 당(唐)나라(618~907년) 때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안에 있던 건물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또 『고려사』에 "왕국모(王國?)가 먼저 고의화(高義和, 1049~1119년) 3)라는 장사로 하여금 이자의(李資義)를 선정문 안에서 베게 하였다."<원전 2>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개경에 선정전(宣政殿)이라는 이름의 궁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h-2 선정문宣政門
위치와 연혁 :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이다. 영조는 직접 선정문에 나아가 궁궐에 물건들을 납품하던 공인(貢人)이나 시전 상인 등을 만나 폐단을 물어 보고 체납된 세금을 감해 준 적이 있다.<원전 3> 정조 역시 선정문에서 공인과 시전 상인들을 불러 모아 민심을 물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폈다.<원전 4>

뜻풀이 :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4-h-1 선정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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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잠례는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양잠의 경제적 중요성을 알리고 장려하고자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거두던 국가적 의례를 말한다.
2) 북주(北周, 556년~581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선비족인 우문씨(宇文氏)가 건국한 왕조이다. 연호로 선정을 쓴 시기는 무제(武帝) 때인 578년 한 해다.
3) 고의화는 고려시대의 무신이다. 헌종 초에 왕위 후계 다툼이 있었는데 이 때 상장군으로 있던 왕국모의 명을 받아 한산후(漢山侯) 균을 받드는 이자의를 죽이고 계림공(鷄林公) 즉 숙종의 즉위를 도왔다. 숙종과 예종 때에 높은 관직에 올랐고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원전 1> 『세조실록』 7年 12月 19日(乙酉), "傳于禮曹曰, 昌德宮朝啓廳稱宣政殿, 後東別室稱昭德堂, 後西別室稱寶慶堂, 正殿稱兩儀殿, 東寢室稱麗日殿, 西寢室稱淨月殿, 樓稱澄光樓,東別室稱凝福亭, 西別室稱玉華堂, 樓下稱光世殿\廣延殿, 別室稱求賢殿."
<원전 2> 『고려사』 권 127 열전, 「이자의(李資義)」, "國?, 先令壯士高義和, 斬資義於宣政門內."
<원전 3> 『영조실록』 33年 正月 5日(丁酉), "上御宣政門, 召見貢市人等, 問弊?, 減久逋."
<원전 4> 『정조실록』 8年 3月 20日(乙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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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 궐내각사 권역
8월 1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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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 궐내각사 권역

3-h-12 연경문衍慶門

위치와 연혁 : 구선원전(舊璿源殿)의 남쪽 행각에 있는 문이다.
뜻풀이 : '연경(衍慶)'은 '길한 경사가 넘친다'는 뜻이다. '연(衍)'은 '넘치다', '넉넉하다'는 뜻이다. 송축(頌祝)하는 말로 흔히 쓰이던 표현이다. 북송 때의 수도인 변경(?京)에 연경전(衍慶殿)이 있었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13 보춘문報春門
위치와 연혁 : 구선원전 앞마당의 동쪽에 나 있는 문이다. 양지당으로 통하게되어 있다.
뜻풀이 : '보춘(報春)'은 '봄을 알린다'는 뜻이다. 구선원전을 기준으로 동쪽 문이므로 오행에서 동쪽에 해당하는 '춘(春)'과 결부시켰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14 정숙문正肅門

위치와 연혁 : 구선원전의 서쪽 담장에 나 있는 문이다.
뜻풀이 : '정숙(正肅)'은 '바르고 엄숙하다'는 뜻이다. 역대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에 딸린 문이므로 바르고 엄숙한 태도를 간직하라는 의미를 담고있는데, '숙(肅)'은 가을의 기운을 나타내고 가을은 방위로는 서쪽에 해당하므로 서문에다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15 영휘문永輝門

위치와 연혁 : 구선원전의 북쪽에 나 있는 문이다.
뜻풀이 : '영휘(永輝)'는 '길이 빛난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16 만수문萬壽門
위치와 연혁 : 양지당의 북문이다. 양지당 뒤편 화단 위에 있다.
뜻풀이 : '만수(萬壽)'는 '만년토록 장수한다'는 의미이다. 양지당이 구선원전의 재실이므로, 역대 임금들의 혼령이 영원히 장수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시경』의 「소아(小雅)·남산유대(南山有臺)」1)에서는 "화락한 군자여 나라의 빛이요, 화락한 군자여 만수무강하리로다."<원전 1>이라 하였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壽(수)' 자는 속자이다.
3-h-17 만안문萬安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편 담장에서 양지당으로 통하는 문이다.
뜻풀이 : '만안(萬安)'이란 '두루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양지당이 구선원전의 재실이므로, 역대 임금들의 혼령이 두루 편안히 안식하리라는 의미로 보인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18 만복문萬福門
위치와 연혁 : 양지당의 남문에 해당하며 남쪽 행각에 나 있다.
뜻풀이 : '만복(萬福)'은 '만 가지 복', 즉 온갖 복이라는 의미이다. 양지당이 구선원전의 재실이므로, 역대 임금들의 혼령이 만복을 누리라는 의미로 지은 듯하다. 『시경』의 「소아(小雅)·육소(蓼蕭)」2)에서"화(和) 방울과 난(鸞) 방울이 조화롭게 울리니, 만복이 함께 모이도다."<원전 2>라고 하였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19 의풍문儀豊門

위치와 연혁 : 『동궐도』나 다른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 창건 연대나 용도를 알기 어렵다. 『동궐도』 상으로는 생물방(生物房), 즉 생과방(生果房) 근처에 해당한다. 궁중에 필요한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로 지어진 듯하다.
뜻풀이 : '의풍(儀?)'은 '의례가 풍성하다'는 의미이다. '의(儀)'는 통상 임금의 의장이나 거동에 관련된 글자이고, '풍(豊)'은 넉넉하다는 의미이다. 궁궐의 의식에 필요한 물자 보관용 창고의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제작 정보 : 다른 현판들과는 달리 돋을새김(양각)을 한 것이 특이하며, 단청도 되어 있지 않다.
3-h-20 정청政廳
위치와 연혁 : 정청은 이조와 병조에 속한 사무용 건물로, 인사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동전(東銓: 이조)의 정청은 지금은 사라진 연영문(延英門) 3) 안에 있었고, 서전(西銓: 병조)의 정청은 빈청(賓廳) 4) 서쪽을 빌려 썼다고 되어 있다. 『동궐도』에는 연영문 동쪽 행각과 인정문 서쪽행각에 각각 정청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의 현판은 인정문 서쪽 행각에 위치한 것이다.
뜻풀이 : '정청(政廳)'은 '정무를 보는 관청'이란 의미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1 내병조內兵曹
위치와 연혁 : 인정문 남쪽 마주보이는 행각의 서쪽편에 있는 건물이다. 궁궐 안에 있는 병조로 궁중의 각 문의 자물쇠를 관리하고, 왕이 행차할 때 왕이 타는 가마인 어가(御駕) 앞을 선도하며, 시위(侍衛)나 의장 때 소란한 사람을 잡아 곤장치는 일을 맡았다. 『궁궐지』에 "인정문 남쪽에 있고, 또 한 군데는 창경궁 태복시(太僕寺) 5) 서북쪽에 있으며, 무관 선발, 군사 업무, 호위, 역마, 무기, 의장, 문호, 자물쇠 등을 담당한다."<원전 2>고 되어 있다.
뜻풀이 : '내병조(內兵曹)'는 '대궐 안에 위치한 병조'라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2 원역처소員役處所

위치와 연혁 : 내병조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건물이다.
뜻풀이 : '원역처소(員役處所)'는 '원역들의 처소'란 의미이다. 원역이란 제반관서에 달린 구실아치를 의미한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3 호위청扈衛廳

위치와 연혁 : 인정문 남쪽 마주보이는 행각에 있는 건물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궁중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인조(仁祖, 1595~1649년)는 반정에 성공한 후, 숙위(宿衛) 6)가 허술하여 중외(中外), 즉 궁 안과 민간에서 뽑은 각 군문의 무사와 함경도의 무사까지 동원하고 국구(國舅) 7)와 재상에게 대장을 겸임케 하였다.<원전 3> 정조 때는 친위 부대의 역할을 하기도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하였다.

뜻풀이 : '호위청(扈衛廳)'은 '임금의 호종과 호위를 맡은 관청'이란 의미이다.'호(扈)'는 '시중들기 위해 뒤따른다'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4 상서원尙瑞院
위치와 연혁 : 인정문 남쪽 마주보이는 행각에 있는 건물이다. 옥새(玉璽), 부패(符牌), 절월(節鉞) 8) 등을 내고 들였다. 옥새는 대체로 국교 문서, 교유, 선사 문서, 과거 사령장 등에 사용되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면 옥새나 절월등을 태복시의 말에 싣고 뒤따랐다고 한다.
뜻풀이 : '상서원(尙瑞院)'은 '상서로운 기물을 맡은 관서'란 의미이다. 상(尙)은 맡는다는 의미이고, 서(瑞)는 국가의 기틀을 유지하는 모든 중요한 물건[瑞物]을 뜻한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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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산유대」는 태평성대에 군자의 장생을 축수하는 노래다.
2) 「육소」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잔치하며 화락하게 노는 모습을 노래했다.
3) 연영문은 선정문 남쪽에 있던 문이다. 이 문에서부터 선정문까지는 서쪽에 사초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당후(堂后), 문서고, 승정원, 악기고가있고 동쪽에 채소와 생선을 공급하는 공상청, 활을 관장하는 궁방(弓房) 등 궐내각사들이 들어서 있었다.
4) 빈청은 비변사(備邊司)에 속한 기관으로 정승과 정2품 이상의 고위 대신들이 대기하고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던곳이다.
5) 태복시는 왕의 거마(車馬)와 말을 키우고 훈련하는 일 등을 맡아보던 관청. 사복시(司僕寺)라고도 한다. 1895(고종 32)년에는 태복사(太僕司)로, 1907년 주마과(主馬課)로 개칭하였다.
6) 숙위는 왕을 호위하는 일과 그 일을 맡은 사람을 일컫는다.
7) 국구는 왕의 장인, 즉 왕비의 친아버지.
8) 절월은 절과 부월을 합해 부르는 것이다. 절은 깃발, 부월은 도끼처럼 만든것으로, 군령을 어긴 자에 대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한다. 행차가 있을 때에는 절월을 앞장세워 위의를 과시했다.
<원전 1> 『시경』 「소아·남산유대」, "樂只君子,邦家之光. 樂只君子, 萬壽無疆."
<원전 2> 『궁궐지』, "內兵曹, 在仁政門南, 一在昌慶宮太僕寺西北, 掌武選軍務儀衛郵驛兵甲器仗門戶管?之政."
<원전 3> 『한경지략』, "扈衛廳, 在尙瑞院西. 仁祖元年?置, 以宿衛單弱, 命抄中外出身各軍門武士, 令咸鏡道抄上其尤者, 有大將一, 使國舅與相臣兼帶, 又有別將各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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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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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_ 궐내각사 권역
7월 2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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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_ 궐내각사 권역


3-h-1 내각內閣

위치와 연혁 :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이문원(?文院)이라고도 불렀으며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각(內閣)'이라는 현판은 규장각 남문에 붙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규장각을 복원하고서 붙인 것이다.
뜻풀이 : '내각(內閣)'은 '궁궐 내의 중앙 관서'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오래 전부터 쓰여서 중국의 삼국 시대에는 비서각(秘書閣)을 가리켰으며 송나라 때는 태종(976~997년)이 세운 용도각(龍圖閣), 진종(眞宗, 968~1022년)이 세운 장서각인 천장각(天章閣), 인종(仁宗, 1010~1063년)이 세운 보문각(寶文閣) 등을 두루 내각이라고 불렀다. 1) 명나라·청나라 때에는 재상의 관서(官署)를 가리켰다.

제작 정보 : 2001년에 설치하면서 서예가 이동익(李東益)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 규장각奎章閣

위치와 연혁 : 내각이라고도 하며 왕실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정조(正祖,1752~1800년)가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王室世譜), 보감(寶鑑) 등을 보관·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북원(北苑), 곧 지금의 주합루(宙合樓)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규장각은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 2) 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매월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 출신들을 등용했다. 이런 조치들은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1781년에는 규장각 청사를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또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훗날 병인양요(1866년) 3) 때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었다. 1868(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주합루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고 소장 도서들도 이문원·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시강원(侍講院) 등에 분산되었다. 국권을 빼앗기면서 이 도서는 1911년 조선 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그 후 주무 관청이 몇 차례 바뀌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남았다. 그 도서를 소장·관리하고 연구하는 기관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뜻풀이 :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라는 뜻이다. '규(奎)'는 천체(天體)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 중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문장(文章)'을 상징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임금의 글이나 글씨를 미화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제작 정보 : 지금의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3 옥당玉堂

위치와 연혁 :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다.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 4)의 상징이었다. 일단 홍문관원이 되면 특별한 허물이없는 한 출세가 기약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지제교(知製敎) 5)가 될 만한 문장과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경연관(經筵官)이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그 기구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했다가 1463(세조 9)년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1506(중종 1)년에 복구했다. 1894(고종 31)년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건물은 일제에의해 헐렸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옥당(玉堂)'은 '옥같이 귀한 집'이라는 뜻이다.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집, 또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집이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한편 옥당은 일반 명사로서 궁전의 미칭으로도 쓰이는데 한나라 때 궁전 이름으로 쓰인 적이 있다. 『한서(漢書)』 「이심전(李尋傳)」의 주석에 "옥당전은 미앙궁에 있다."<원전 1>라고 하였다. '옥당'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로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였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한림원(翰林院)의 기능을 '홍문관'과 '예문관'의 둘로 나누어 홍문관을 옥당이라고 하고 예문관은 한림이라고 불렀다.<원전 2>

제작 정보 : 홍문관 건물에 현재 붙어 있는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은 근래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2001년에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긴 것이다. 옛날에 걸려 있던 현판 두 종류가 현재 문화재관리국에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임진년(?) 9월에 이원영(李元英)이 전서(篆書)로 쓴 것으로 유물번호 670번이고, 또 하나는 1699(숙종 25)년 정월 초하룻날에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8~1716년) 6)가 예서(?書)로 쓴 것으로 유물 번호 1000번이다.
3-h-4 예문관藝文館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숭범문과 향실 사이에 위치한 관청이다. 예문관의 출입문은 숭범문 바깥쪽에 이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고, 사초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보관하는 관청이다. 영조가 14년과 32년에 친히 행차하여 각각 '태공사필(太公史筆)', '창수고풍(?守古風)'이란 글씨를 써서 걸었다고 한다. 1811(순조 11)년 화재로 사료와 서적이 모두 불에 탔다.<원전 3> 현재의 건물은 2005년에 복원한 것이다. 영조 어필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뜻풀이 :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이다. 예문은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 7)에 관련된 도서를 총칭하기도 하고 사장(辭章), 문예(文藝)만을 한정하기도 한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5 약방藥房

위치와 연혁 : 내의원(內醫院)으로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이다.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설치되었다가 1443(세종 25)년부터 내의원이라고 했다. 약방은 인정전 서쪽 행각에 가까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병을 가까이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의원을 내의사(內醫司), 궁 밖에 있는 의료 기관인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를 외의사(外醫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약방의 역할을 나타내는 '調和御藥(조화어약)', '保護聖躬(보호성궁)'의 현판이 현재는 옛 성정각(誠正閣)의 남쪽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고 약절구도 그 마당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純宗, 1874~1926년)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내의원이 헐리고, 현판들과 의약 도구들이 옮겨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도구들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 때 성정각이 내의원의 기능을 맡게 된 듯하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약방(藥房)'은 '약을 짓는 방'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6 양지당養志堂

위치와 연혁 : 선원전과 인정전 사이에 있으며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하던 집이다.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했다. 임금의 초상화나 임금이 쓴 글씨를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없어졌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

뜻풀이 : '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건물의 기능으로 보아 선원전에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이 곳에 머물며 '고상하고 엄숙한 뜻을 배양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 정보 :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7 억석루憶昔樓
위치와 연혁 : 선원전 남행각에 위치한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원전 4> 이로 보아 억석루는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자편(?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뜻풀이 :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이며, 『한경
지략』의 기록에 따르면 약을 최초로 발명한 신농씨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제작 정보 :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8 운한문雲漢門

위치와 연혁 : 내각 안에 있는 봉모당(奉謨堂)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뜻풀이 : '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역복(?樸)」8) 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하늘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도다."<원전 5> 「대아(大雅)·운한(雲漢)」 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빛이 하늘을 따라 돌도다." 라는 용례들이 보인다.<원전 6> '운한'에는 '하늘', '임금의 아
름다운 덕'이라는 뜻도 있으며, 특히 '제왕의 필묵'이라는 뜻도 있어 봉모당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3-h-9 봉모당奉謨堂

위치와 연혁 :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1776(정조 즉위)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 때 본래 이 곳에 있었던 역대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지었다.<원전 7>
봉모당은 다시 1857(철종 8)년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의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이는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 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했다. 1911년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지금의 봉모당은 소유재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1969년7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뜻풀이 : '봉모(奉謨)'는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모훈이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사를 논의하여 적은 글' 또는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등의 편명에서 용례를 볼 수 있다.
3-h-10 책고冊庫

위치와 연혁 : 봉모당 뒤쪽에 세 채가 있으며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뜻풀이 : '책고(冊庫)'는 '책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뜻으로 '서고(書庫)'라는 말과 같다.
제작 정보 : 현재의 현판은 최근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새롭게 붙인 것이다. <동궐도>에 '책고(冊庫)'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건물의 기능 또는 용도를 기록한 것이지 현판이 곧 '책고'라고 쓰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3-h-11 검서청檢書廳

위치와 연혁 : 규장각의 검서(檢書)들이 입직(당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이 검서들은 입직을 해야 했다. 이들은 번갈아서 임금의 갑작스런 하문에 대비하고자 밤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입직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이다. 현재의 검서청은 규장각의 서쪽에 있으며 순종 때 대유재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뜻풀이 : '검서(檢書)'는 '서적을 점검한다'는 뜻이다.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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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규장각의 근무 규정 또한 송나라의 용도각, 천장각의 규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2) 근시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를 말한다.
3) 1866년 대원군이 천주교를 금한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보복하고자 프랑스 군이 공격한 사건이다.
4) 청요직은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아울러 가리킨다. 청환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만 시키던 벼슬로, 규장각·홍문관·예문관 등이다. 봉록은 낮으나 뒤에 고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다.
5) 지제교는 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이다. 조선 후기에는 홍문관 관원이 내지제교를,규장각 관원이 외지제교를 맡았다.
6) 김진규의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이다. 인경왕후의 오빠. 송시열의 문하로 숙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붕당정치 속에 등용과 파직되기를 여러 번 했다. 문장과 전서·예서, 그림에 뛰어났다.
7) 육예는 고대 중국에서 고급관료의 자제가배우던 6종의 교양는 예용(禮容), 악(樂)은 주악(奏樂), 사(射)는 궁사(弓射), 어(御)는 마술(馬術), 서(書)는 서사(書寫),수(數)는 산수(算數)를 의미한다.
8) 「역복」은 주나라 문왕의 치덕으로 훌륭한 신하들이 모여듦을 비유하여 노래했다.「운한」은 가뭄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임금이 하늘에 간곡히 기도를 올리는 내용이다.
<원전 1> 『한서』 「이심전」, "玉堂殿在未央宮."
<원전 2 > 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經世遺表)』 권1, 「춘관예조·홍문관(春官禮曹·弘文館)」"中國之制, 翰林謂之玉堂, 乃吾東分而二之, 弘文館稱玉堂, 藝文館稱翰林."
<원전 3> 『궁궐지』 "藝文館, 在仁政殿西月廊.英宗十四年戊午, 親臨藝文館, 特書太公史筆四字, 揭于楣. 三十二年丙子, 親書?守古風四字,揭于館中. 純宗十一年辛未, 災古來史籍, 盡入燒燼, 後重建, 一在昌慶宮明政殿, 掌制撰辭命."
<원전 4> 『한경지략』 「내의원(內醫院)」, "命內局所 祭神農氏位板 設欌于大廳 以致敬焉. 又御書入審憶昔四字 揭扁."
<원전 5> 『시경』 「대아·역복」, "倬被雲漢 爲章于天."
<원전 6> 『시경』 「대아·운한」, "倬彼雲漢 昭回于天."
<원전 7> 『정조실록(正祖實錄)』 즉위년 9월 25일(癸巳) 조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 1권 「경도(京都)」 편에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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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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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창덕궁_ 인정전 권역
7월 2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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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창덕궁_ 인정전 권역


2-h-1 인정전仁政殿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곳이다.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 곳을 이용했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정했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정전은 1405(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1428(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9(광해군 원)년에 중건했다. 1803(순조 3)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이듬해인 1804(순조 4)년에 재건하였고, 1857(철종 8)년에는 낡아서 다시 고쳐 지었다.


뜻풀이 :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仁政)'은 특히 『맹자(孟子)』에서 강조하는 정치 사상이다. 『맹자』에서는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1)을 비롯하여 무려 10군데에 걸쳐 '인정'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인정은 바로 맹자가 강조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공자가 가장 중요시한 인(仁)에서 비롯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2-h-2 인정문仁政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출입문이다. 인정문은 1405(태종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1744(영조 20)년 10월에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났을 때 옮겨 붙어 좌·우 행각과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 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1803(순조 3)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된 일이 있는데, 인정문도 그 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가 인정문과 그 주위 행랑을 왜식(倭式)으로 일부 변형했으나 1988년 현재와 같이 원상을 회복하였다.
인정문은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로 그 의미가 큰 곳이다. 왕세자는 앞 임금이 별세한 궁궐의 빈전(殯殿: 왕의 빈소)에서 옥새를 받고 그 궁궐의 정전이나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앞 임금이 창덕궁에서 별세할 경우 다음 임금은 인정전이나 인정문에서 즉위한 것이다. 특히 즉위식은 인정전보다는 주로 인정문에서 치러졌다.
뜻풀이 : 2-h-1 인정전 참조.
2-h-3 진선문進善門

위치와 연혁 :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위치한다. 진선문 앞에는 금천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1409(태종 9)년부터 진선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창덕궁이 창건될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度支部) 2)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할 때 헐렸다가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른다. 태종대와 영조대에는 이 곳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뜻풀이 : '진선(進善)'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정전이 임금의 정전(正殿)이므로 진선문을 통하여 바른 말을 올리거나 인재를 천거하여 임금이 바르게 되고 바른 교화[正敎]가 펴지기를 기원하는 이름이다. 전자의 용례로 『후한서』 「채무전(蔡茂傳)」에서는 "교화를 일으킴은 반드시 착한 말을 올리는 데서 연유한다."라고 하였다.<원전 1> 후자의 용례로 한나라 때 반고(班固, 32~92년) 3)가 편찬한 『백호통의(白虎通義)』의 「고출(考黜)」 편에서 "현명한 사람이 많으면 훌륭한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면 악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원전 2>

제작 정보 : 본래의 현판은 정난종(鄭蘭宗, 1433~1489년) 4)의 글씨인데, 1999년 복원하면서 서예가 정도준이 새로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2-h-4 숙장문肅章門

위치와 연혁 : 인정문 밖 동쪽에 있다. 진선문에서 인정문을 지나 마당을 따라 마주 보이는 문이다. 1475(성종 6)년 문 이름을 지었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 등이 있어서 이 인정문 뜰과 조정 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 의식이 많이 치러졌다. 이 일대는 일제 때 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졌다가 최근 모두 복원되었다.
뜻풀이 : 숙장(肅章)'은 '엄숙하고 문채(文彩)난다'는 의미이다.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원래 현판은 정난종 글씨였는데 최근 복원하면서 정도준이 새로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동궐도』에는 현판이 바깥에 그려져 있어 지금과 다르다. 이를 두고 화공의 실수라고 하기도 하고 잘 보이도록 일부러 바깥에 그렸다는 논란이 있다.
2-h-5 광범문光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동문이다. 동쪽으로 임금의 경호 업무를 맡은 선전관청(宣傳官廳), 승정원, 내시들의 집무실인 내반원(內班院)과 통한다.
뜻풀이 : '광범(光範)'은 '규범을 빛낸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2-h-6 숭범문崇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문이다. 서쪽으로 예문관, 내의원과 통한다.
뜻풀이 : '숭범(崇範)'은 '규범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2-h-7 향실香室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북쪽에 위치한 향청은 의례에 쓰이는 축문과 향을 관리하던 직소이다. 교서관 소속으로 책임직은 충의(忠義)인데,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공신의 자손이 임명되었다. 향관은 참하문관(參下文官)이 맡았고, 이틀에 한 번 숙직하였다. 명종의 신임을 돈독히 받은 상진(尙震,1493~1564년) 5)과 영·정조 때의 문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 6)가 이 곳을 거쳐 정승에까지 오른 일이 유명하다.<원전 3>
뜻풀이 : '향실(香室)'은 '향을 보관하는 방'이란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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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혜왕장구」는 맹자가 여러 제후국을 다니며 왕들과 정치에 대해 대화한 내용을 모은 장이다.
2) 탁지부는 1895년 이후 국가의 재정업무를 총괄하고 지방의 재무를 감독한 중앙부처다.
3) 반고는 『한서』를 편집한 후한 초의 역사 학자다.
4) 정난종의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다. 시호는 익혜(翼惠).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5) 상진의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이다. 1519(중종 14)년 사관(史官)이 되었으며, 이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으로 후대에 크게 칭송을 받았다.
6) 박세채는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소론의 영수로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탕평론을 강조하여 영·정조대 탕평책 시행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원전 1> 『후한서』 「채무전」, "興化致敎, 必由進善."
<원전 2> 반고, 『백호통의』 「고출」, "多賢乃能進善 進善乃能退惡."
<원전 3> 『한경지략』, "香室, 在仁政殿西, 掌書各祭享祝文及封香, 其官名忠義, 以功臣子孫爲之, 而香官則以參下文官爲之, 更日直宿. 案, 朴南溪世采, 曾經香室忠義, 尙政丞震, 以香官拜相, 故香室先生中, 今稱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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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_ 궁문
7월 1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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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궁문

1. 궁문宮門


1-h-1 돈화문敦化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남쪽 정문이다. 남아 있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1405(태종 5)년 창덕궁을 짓고 나서 몇 년 후인 1412(태종 12)년 5월에 세웠다.<원전 1> 1451(문종 즉위)년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중창(重創)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8(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세웠다.
뜻풀이 : '돈화(敦化)'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용(中庸)』에서 처음 나왔다. 『중용』 30장에서 "만물이 함께 길러져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함께 이루어져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요 큰 덕은 교화를 돈독하게 하니[敦化], 이는 천지가 위대해지는 것이다."라고했다. <원전 2>
중국 후한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정현(鄭玄, 127~200년) 1)은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어서 새싹들을 적셔 주니 제후에게 비유한 것이다. 큰 덕은 교화를 돈독하게[敦化] 하여 만물을 두텁게 자라게 하니 천자에게 비유한 것이다."<원전 3>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학자 공영달(孔穎達, 574~648년) 2)은 소(疏)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지으신 것은 제후의 작은 덕으로써 말하자면 냇물의 흐름이 새싹들을 적셔 주는 것과 같고, 천자의 큰 덕으로써 말하자면 인애(仁愛)가 두터워서 만물을 변화·생성시키는 것이다."<원전 4>라고 했다.
즉 '돈화'는 원래 『중용』에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쓰였고,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제작 정보 : 1412(태종 12)년 9월에 돈화문의 문루(門樓)에 동종(銅鍾)을 걸었는데 이 때 당대의 이름난 문인인 변계량(卞季良, 1369~1430년) 3)이 종의 명문[鍾銘]을 지었다. 그러나 변계량의 문집인 『춘정집(春亭集)』에는 이 글의 제목을「광화문종명(光化門鍾銘)」이라고 잘못 써 놓았다.
1-h-2 금호문金虎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서쪽 궁장에 있는 문이다. 승정원(承政院)의 승지나 홍문관(弘文館)의 교서관(校書館) 등 궁중 관서 벼슬아치들이 다니던 문이다. 한성의 역사가 담긴 책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창덕궁(昌德宮)」 조에 따르면"서쪽이 금호문인데, 편액은 성임(成任, 1421~1484년) 4)이 썼다. 조정의 신료[朝臣]들은 모두 이 문으로 출입하는데, 사헌부의 대관(臺官) 5)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한다. 해가 저물어 문을 잠그면 당직 관리가 반드시 가서 확인한다."<원전 5>고 하였다.

뜻풀이 : '금호(金虎)'는 '금 호랑이'라는 의미이다. '금(金)'은 오행 사상에서 서쪽을 가리키고, '호(虎)' 또한 서방(西方) 백호(白虎)를 가리키므로 서문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회남자(淮南子)』6) 가운데 하늘과 땅을 포함한 만물의 형성 과정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천문훈(天文訓)」 편에 "서방은 금(金)이다. 임금으로는 소호(少昊)이고 ... 신으로는 태백(太白)이며, 짐승으로는 백호요, 음으로는 상(商), 날로는 경신(庚辛)일에 해당한다."<원전 6>라고 하였다. 즉 백호는 서방을 상징하는 동물인 것이다.
1-h-3 단봉문丹鳳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돈화문의 동편 궁장에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조에, "남쪽의 오른편이 단봉문이다. 동쪽으로 건양문이 있고, 이 문 동쪽으로는 창경궁이다."<원전 7>라고 했다. 단봉문은 본래 종친부의 왕족및 친·외척과 상궁이 출입하던 문으로 무관인 선전관(宣傳官)이 개폐를 관리했다. 이 문은 함부로 여닫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1476(성종 7)년 6월에 병조(兵曹)의 사령(使令) 정연부(鄭延夫)가 문이 잠긴 후에 제멋대로 열자, 이를 교대시(絞待時: 교수형)의 율로 다스린 일이 있다. 또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 1748~1781년) 7)이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숙위대장이 된 다음 한밤중에 이 문을 드나들어 문제가 된 일이 있다.
뜻풀이 : '단봉(丹鳳)'은 '붉은 봉황새'란 의미이다. 단봉에는 여러 가지 뜻이있다. 글자 그대로는 머리와 날개 끝이 붉은 봉황새를 말하지만, 조서를 전달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키기도 하며, 도성과 조정을 일컫기도 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은 이름인 듯하다. 중국에도 '단봉'으로 이름 지은 건물이 많이 있다.
1-h-4 요금문曜金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서북쪽 담장에 난 문이다. 요금문은 궁중의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이다. 무관인 선전관이 개폐를 관리한다. 희빈(禧嬪) 장씨(張氏, ?~1701년)의 무고로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년) 8)가 쫓겨날 때 이 문을 지난 일이 있다.
뜻풀이 : '요금(曜金)'은 '금빛이 빛난다'는 의미이다. '요(曜)'는 빛난다는 뜻이고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과 가을을 상징하므로 서문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제작 정보 : 원래 현판의 글씨는 성종 때 판결사(判決事) 신자건(愼自健,1443~1527년) 9)이 썼다. <원전 8> 그의 글씨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서예에 뛰어났고, 성종도 그의 글씨에 감탄해 요금문 편액을 쓰게 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현판은 중건 이후에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1-h-5 건무문建武門

위치와 연혁 : 농산정의 북쪽 담장에 딸린 문이다. 이 문의 바깥으로 성균관대학교 운동장과 금잔디광장이 보인다.
뜻풀이 : '건무(建武)'는 무(武)를 세운다는 의미이다. '무(武)'는 오행에서 북방의 현무(玄武)를 뜻하므로 북문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제작 정보 : 편액이 문의 안쪽에 달려 있다. 필사자를 알 수 없고, 칠이 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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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현. 자는 강성(康成). 유가 경전연구에 힘써, 옛 문장들을 새롭고 쉽게 풀었다. 훈고학의 시조로 존경을 받았다.
2) 공영달은 당초기의 학자이다. 문장·천문·수학에 능통했다.
3) 변계량. 자는 거경(巨卿),호는 춘정(春亭). 고려 말·조선초의 문신이다. 문장이 뛰어나『태조실록』 편찬,『고려사』 개수작업에 참여했다.
4) 성임은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 안재(安齋), 시호는 문안(文安).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5) 사헌부 대관은 고려·조선 시대에 탄핵, 감찰 등을 담당한 관료다.
6) 『회남자』는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책으로 도가와 음양오행,유가, 법가 사상 등이 반영되어 있다.
7) 홍국영은 영조때 등용되어 벽파가 세손(정조)을 해하려는 음모를 막아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 실권을 잡자 반대파 못지 않은 세도를 휘둘렀다.
8)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계비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문제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났다가 1694년 복위하였다.
9) 신자건의 자는 표직(杓直),호는 송재(松齋),본관은 거창(居昌)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서예에 전념했다.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깊이 터득하였다.
<원전 1> 『태종실록(太宗實錄)』 12년 5월 22일(乙巳), "都城左右行廊成. 自闕門至貞善坊洞口,行廊四百七十二間, 進善門之南, 建樓門五間, 名曰敦化."
<원전 2> 『중용』,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원전 3> 위 구절에 대한 정현의 주, "小德川流,浸潤萌芽, 喩諸侯也. 大德敦化, 厚生萬物, 喩天子也."
<원전 4> 위 구절에 대한 공영달의 소, "孔子所作春秋, 若以諸侯小德言之, 如川水之流, 浸潤萌芽, 若以天子大德言之, 則仁愛敦厚, 化生萬物也."
<원전 5> 『한경지략』 「창덕궁」, "西曰金虎門, 額成任書, 朝臣多由此門出入, 而臺官則必由敦化正門出入. 金虎門下?後, 入直注書, 必往考門?."
<원전 6> 『회남자』 「천문훈」, "西方金也, 其帝少昊, 其佐?收, 執矩而治秋, 其神爲太白, 其獸白虎, 其音商, 其日庚辛."
<원전 7> 『한경지략』 「창덕궁」, "南右曰丹鳳,東曰建陽, 此門以東, 昌慶宮也."
<원전 8> 『한경지략』 「창덕궁」, "又西曰曜金,成宗朝, 命判決事愼自健書門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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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
7월 7,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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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창덕궁
창덕궁昌德宮, 지금에 이르기까지

태종(太宗, 1367~1422년)이 경복궁이 아닌 별도의 이궁(離宮)을 세우도록 명하여 1405(태종 5)년에 완성한 것이 창덕궁이다.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종은 바로 한양의 경복궁으로 돌아왔으나, 경복궁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경복궁은 왕자의 난을 겪은 피의 현장이기 때문에 기피했다고도 알려진다. 그러나 부왕인 태조(太祖, 1335~1408년)가 건설한 법궁(法宮) 1)인 경복궁을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창덕궁에 주로 머물면서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거나 상왕인 정종(定宗, 1357~1419년)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푸는 등의 주요 행사는 경복궁에서 했다. 어쨌거나 실록에서는 태종이 경복궁으로 행차한 것을 '이어(移御)'라고하고 창덕궁으로 간 것을 '환어(還御)'라고 한 것으로 보아 창덕궁이 태종의 주된 거주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궁이 완성되고 궁의 이름은 창덕궁으로 정했으나 이 때까지는 아직 궁궐로서의 여러 시설들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태종 연간에는 건물이 계속 세워졌다. 즉, 궁 안 여기저기에 누각과 연못 등을 조성하고 석교(石橋)를 만들었으며, 1412년에는 비로소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세조(世祖, 1417~1468년) 가 즉위하고서는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내 각 건물의 명칭을 고쳤는데, 이 때 고쳐진 전각들의 이름이 대체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조선 전기에는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므로 창덕궁은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성종(成宗, 1457~1494년)이 즉위하고부터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년)은 재위 중 주로 이 궁에서 정사를 보면서 실정(失政)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왕들이 이 궁의 정전에서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일도 점점 잦아졌다.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과 경복궁·창경궁 등 조선 왕조의 3대 궁궐은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세 궁궐 가운데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에 들어가 1609(광해군 1)년에 중건되었다. 곧이어 창경궁도 복구되었지만 경복궁만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7(고종 4)년에 가서야 중건되었다. 따라서 창덕궁은 임진왜란 뒤 중건되면서부터는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을 대신하여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 무대가 되었다.

창덕昌德의 뜻풀이
'창덕(昌德)'은 '성(盛)한 덕'이라는 뜻이다. '창(昌)'은 '밝다', '선하다', '창성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 1) 법궁(法宮)은 정궁(正宮)이라고도 하며, 왕이 공식적으로 정사를 보는 궁을 일컫는다. 법궁 이외에 따로 세운 궁을 이궁(離宮)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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