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궁궐 이야기....창덕궁 - 선정전 권역
8월 2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선정전 권역
선정전宣政殿 권역

4-h-1 선정전宣政殿

위치와 연혁 : 인정전의 동편에 있는 임금의 편전이다. 원래 이 곳의 이름은 아침마다 임금에게 정무를 아뢰던 청사(廳舍)라는 뜻의 조계청(朝啓廳)이었는데,1461(세조 7)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이라고 고쳐 불렀다.<원전 1> 편전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렀다. 이 곳은 임금의 집무실이지만 때때로 왕비가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따르면 1471(성종 2)년 가을에 왕비가 이 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고, 1477(성종 8)년과 1493(성종 24)년 봄에는 친잠례(親蠶禮) 1)를 지냈다.
조선 후기에는 편전을 내전의 희정당(熙政堂)으로 옮겨 사용하였다.
선정전은 남아 있는 창덕궁의 건축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조선 중기 건축 재료의 모습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재건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때 또 불에 타 1647(인조 25)년 11월에 인경궁(仁慶宮)을 헐어서 재건하였다. 1803(순조 3)년에 또 불에 타서 이듬해(1804년) 12월에 재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영조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 『소학(小學)』을 토론하여 영조 20년에 『선정전훈의소학(宣政殿訓義小學)』을 간행하기도 했다.


뜻풀이 :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이는 곧 어진 정치를 베푼다는 말이다. '선정'이라는 이름은 6세기 후반 중국남북조 시대에 북주(北周) 2)에서 황제의 연호로 쓰인 적이 있고, 당(唐)나라(618~907년) 때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안에 있던 건물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또 『고려사』에 "왕국모(王國?)가 먼저 고의화(高義和, 1049~1119년) 3)라는 장사로 하여금 이자의(李資義)를 선정문 안에서 베게 하였다."<원전 2>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개경에 선정전(宣政殿)이라는 이름의 궁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h-2 선정문宣政門
위치와 연혁 :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이다. 영조는 직접 선정문에 나아가 궁궐에 물건들을 납품하던 공인(貢人)이나 시전 상인 등을 만나 폐단을 물어 보고 체납된 세금을 감해 준 적이 있다.<원전 3> 정조 역시 선정문에서 공인과 시전 상인들을 불러 모아 민심을 물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폈다.<원전 4>

뜻풀이 :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4-h-1 선정전 참조.
──────────────────────────
1) 친잠례는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양잠의 경제적 중요성을 알리고 장려하고자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거두던 국가적 의례를 말한다.
2) 북주(北周, 556년~581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선비족인 우문씨(宇文氏)가 건국한 왕조이다. 연호로 선정을 쓴 시기는 무제(武帝) 때인 578년 한 해다.
3) 고의화는 고려시대의 무신이다. 헌종 초에 왕위 후계 다툼이 있었는데 이 때 상장군으로 있던 왕국모의 명을 받아 한산후(漢山侯) 균을 받드는 이자의를 죽이고 계림공(鷄林公) 즉 숙종의 즉위를 도왔다. 숙종과 예종 때에 높은 관직에 올랐고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원전 1> 『세조실록』 7年 12月 19日(乙酉), "傳于禮曹曰, 昌德宮朝啓廳稱宣政殿, 後東別室稱昭德堂, 後西別室稱寶慶堂, 正殿稱兩儀殿, 東寢室稱麗日殿, 西寢室稱淨月殿, 樓稱澄光樓,東別室稱凝福亭, 西別室稱玉華堂, 樓下稱光世殿\廣延殿, 別室稱求賢殿."
<원전 2> 『고려사』 권 127 열전, 「이자의(李資義)」, "國?, 先令壯士高義和, 斬資義於宣政門內."
<원전 3> 『영조실록』 33年 正月 5日(丁酉), "上御宣政門, 召見貢市人等, 問弊?, 減久逋."
<원전 4> 『정조실록』 8年 3月 20日(乙巳).
|
|
 |
|
 |
 |
|
 |
| 태그 : 궁궐 | 선정문 | 선정전 | 조선왕릉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_ 궐내각사 권역
7월 2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_ 궐내각사 권역


3-h-1 내각內閣

위치와 연혁 :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이문원(?文院)이라고도 불렀으며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각(內閣)'이라는 현판은 규장각 남문에 붙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규장각을 복원하고서 붙인 것이다.
뜻풀이 : '내각(內閣)'은 '궁궐 내의 중앙 관서'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오래 전부터 쓰여서 중국의 삼국 시대에는 비서각(秘書閣)을 가리켰으며 송나라 때는 태종(976~997년)이 세운 용도각(龍圖閣), 진종(眞宗, 968~1022년)이 세운 장서각인 천장각(天章閣), 인종(仁宗, 1010~1063년)이 세운 보문각(寶文閣) 등을 두루 내각이라고 불렀다. 1) 명나라·청나라 때에는 재상의 관서(官署)를 가리켰다.

제작 정보 : 2001년에 설치하면서 서예가 이동익(李東益)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 규장각奎章閣

위치와 연혁 : 내각이라고도 하며 왕실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정조(正祖,1752~1800년)가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王室世譜), 보감(寶鑑) 등을 보관·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북원(北苑), 곧 지금의 주합루(宙合樓)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규장각은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 2) 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매월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 출신들을 등용했다. 이런 조치들은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1781년에는 규장각 청사를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또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훗날 병인양요(1866년) 3) 때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었다. 1868(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주합루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고 소장 도서들도 이문원·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시강원(侍講院) 등에 분산되었다. 국권을 빼앗기면서 이 도서는 1911년 조선 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그 후 주무 관청이 몇 차례 바뀌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남았다. 그 도서를 소장·관리하고 연구하는 기관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뜻풀이 :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라는 뜻이다. '규(奎)'는 천체(天體)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 중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문장(文章)'을 상징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임금의 글이나 글씨를 미화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제작 정보 : 지금의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3 옥당玉堂

위치와 연혁 :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다.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 4)의 상징이었다. 일단 홍문관원이 되면 특별한 허물이없는 한 출세가 기약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지제교(知製敎) 5)가 될 만한 문장과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경연관(經筵官)이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그 기구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했다가 1463(세조 9)년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1506(중종 1)년에 복구했다. 1894(고종 31)년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건물은 일제에의해 헐렸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옥당(玉堂)'은 '옥같이 귀한 집'이라는 뜻이다.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집, 또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집이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한편 옥당은 일반 명사로서 궁전의 미칭으로도 쓰이는데 한나라 때 궁전 이름으로 쓰인 적이 있다. 『한서(漢書)』 「이심전(李尋傳)」의 주석에 "옥당전은 미앙궁에 있다."<원전 1>라고 하였다. '옥당'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로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였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한림원(翰林院)의 기능을 '홍문관'과 '예문관'의 둘로 나누어 홍문관을 옥당이라고 하고 예문관은 한림이라고 불렀다.<원전 2>

제작 정보 : 홍문관 건물에 현재 붙어 있는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은 근래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2001년에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긴 것이다. 옛날에 걸려 있던 현판 두 종류가 현재 문화재관리국에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임진년(?) 9월에 이원영(李元英)이 전서(篆書)로 쓴 것으로 유물번호 670번이고, 또 하나는 1699(숙종 25)년 정월 초하룻날에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8~1716년) 6)가 예서(?書)로 쓴 것으로 유물 번호 1000번이다.
3-h-4 예문관藝文館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숭범문과 향실 사이에 위치한 관청이다. 예문관의 출입문은 숭범문 바깥쪽에 이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고, 사초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보관하는 관청이다. 영조가 14년과 32년에 친히 행차하여 각각 '태공사필(太公史筆)', '창수고풍(?守古風)'이란 글씨를 써서 걸었다고 한다. 1811(순조 11)년 화재로 사료와 서적이 모두 불에 탔다.<원전 3> 현재의 건물은 2005년에 복원한 것이다. 영조 어필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뜻풀이 :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이다. 예문은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 7)에 관련된 도서를 총칭하기도 하고 사장(辭章), 문예(文藝)만을 한정하기도 한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5 약방藥房

위치와 연혁 : 내의원(內醫院)으로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이다.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설치되었다가 1443(세종 25)년부터 내의원이라고 했다. 약방은 인정전 서쪽 행각에 가까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병을 가까이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의원을 내의사(內醫司), 궁 밖에 있는 의료 기관인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를 외의사(外醫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약방의 역할을 나타내는 '調和御藥(조화어약)', '保護聖躬(보호성궁)'의 현판이 현재는 옛 성정각(誠正閣)의 남쪽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고 약절구도 그 마당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純宗, 1874~1926년)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내의원이 헐리고, 현판들과 의약 도구들이 옮겨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도구들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 때 성정각이 내의원의 기능을 맡게 된 듯하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약방(藥房)'은 '약을 짓는 방'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6 양지당養志堂

위치와 연혁 : 선원전과 인정전 사이에 있으며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하던 집이다.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했다. 임금의 초상화나 임금이 쓴 글씨를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없어졌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

뜻풀이 : '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건물의 기능으로 보아 선원전에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이 곳에 머물며 '고상하고 엄숙한 뜻을 배양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 정보 :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7 억석루憶昔樓
위치와 연혁 : 선원전 남행각에 위치한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원전 4> 이로 보아 억석루는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자편(?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뜻풀이 :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이며, 『한경
지략』의 기록에 따르면 약을 최초로 발명한 신농씨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제작 정보 :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8 운한문雲漢門

위치와 연혁 : 내각 안에 있는 봉모당(奉謨堂)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뜻풀이 : '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역복(?樸)」8) 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하늘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도다."<원전 5> 「대아(大雅)·운한(雲漢)」 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빛이 하늘을 따라 돌도다." 라는 용례들이 보인다.<원전 6> '운한'에는 '하늘', '임금의 아
름다운 덕'이라는 뜻도 있으며, 특히 '제왕의 필묵'이라는 뜻도 있어 봉모당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3-h-9 봉모당奉謨堂

위치와 연혁 :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1776(정조 즉위)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 때 본래 이 곳에 있었던 역대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지었다.<원전 7>
봉모당은 다시 1857(철종 8)년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의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이는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 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했다. 1911년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지금의 봉모당은 소유재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1969년7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뜻풀이 : '봉모(奉謨)'는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모훈이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사를 논의하여 적은 글' 또는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등의 편명에서 용례를 볼 수 있다.
3-h-10 책고冊庫

위치와 연혁 : 봉모당 뒤쪽에 세 채가 있으며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뜻풀이 : '책고(冊庫)'는 '책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뜻으로 '서고(書庫)'라는 말과 같다.
제작 정보 : 현재의 현판은 최근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새롭게 붙인 것이다. <동궐도>에 '책고(冊庫)'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건물의 기능 또는 용도를 기록한 것이지 현판이 곧 '책고'라고 쓰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3-h-11 검서청檢書廳

위치와 연혁 : 규장각의 검서(檢書)들이 입직(당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이 검서들은 입직을 해야 했다. 이들은 번갈아서 임금의 갑작스런 하문에 대비하고자 밤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입직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이다. 현재의 검서청은 규장각의 서쪽에 있으며 순종 때 대유재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뜻풀이 : '검서(檢書)'는 '서적을 점검한다'는 뜻이다.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가리킨다.
──────────────────────────
1) 조선 규장각의 근무 규정 또한 송나라의 용도각, 천장각의 규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2) 근시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를 말한다.
3) 1866년 대원군이 천주교를 금한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보복하고자 프랑스 군이 공격한 사건이다.
4) 청요직은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아울러 가리킨다. 청환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만 시키던 벼슬로, 규장각·홍문관·예문관 등이다. 봉록은 낮으나 뒤에 고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다.
5) 지제교는 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이다. 조선 후기에는 홍문관 관원이 내지제교를,규장각 관원이 외지제교를 맡았다.
6) 김진규의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이다. 인경왕후의 오빠. 송시열의 문하로 숙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붕당정치 속에 등용과 파직되기를 여러 번 했다. 문장과 전서·예서, 그림에 뛰어났다.
7) 육예는 고대 중국에서 고급관료의 자제가배우던 6종의 교양는 예용(禮容), 악(樂)은 주악(奏樂), 사(射)는 궁사(弓射), 어(御)는 마술(馬術), 서(書)는 서사(書寫),수(數)는 산수(算數)를 의미한다.
8) 「역복」은 주나라 문왕의 치덕으로 훌륭한 신하들이 모여듦을 비유하여 노래했다.「운한」은 가뭄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임금이 하늘에 간곡히 기도를 올리는 내용이다.
<원전 1> 『한서』 「이심전」, "玉堂殿在未央宮."
<원전 2 > 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經世遺表)』 권1, 「춘관예조·홍문관(春官禮曹·弘文館)」"中國之制, 翰林謂之玉堂, 乃吾東分而二之, 弘文館稱玉堂, 藝文館稱翰林."
<원전 3> 『궁궐지』 "藝文館, 在仁政殿西月廊.英宗十四年戊午, 親臨藝文館, 特書太公史筆四字, 揭于楣. 三十二年丙子, 親書?守古風四字,揭于館中. 純宗十一年辛未, 災古來史籍, 盡入燒燼, 後重建, 一在昌慶宮明政殿, 掌制撰辭命."
<원전 4> 『한경지략』 「내의원(內醫院)」, "命內局所 祭神農氏位板 設欌于大廳 以致敬焉. 又御書入審憶昔四字 揭扁."
<원전 5> 『시경』 「대아·역복」, "倬被雲漢 爲章于天."
<원전 6> 『시경』 「대아·운한」, "倬彼雲漢 昭回于天."
<원전 7> 『정조실록(正祖實錄)』 즉위년 9월 25일(癸巳) 조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 1권 「경도(京都)」 편에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
|
 |
|
 |
 |
|
 |
| 태그 : 내각 | 검서청 | 봉모당 | 궁궐 | 궐내각사 | 규장각 | 약방 | 양지당 | 억석루 | 예문관 | 옥당 | 운한문 | 조선왕릉 | 창덕궁 | 책고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 창덕궁_ 인정전 권역
7월 2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창덕궁_ 인정전 권역


2-h-1 인정전仁政殿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곳이다.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 곳을 이용했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정했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정전은 1405(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1428(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9(광해군 원)년에 중건했다. 1803(순조 3)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이듬해인 1804(순조 4)년에 재건하였고, 1857(철종 8)년에는 낡아서 다시 고쳐 지었다.


뜻풀이 :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仁政)'은 특히 『맹자(孟子)』에서 강조하는 정치 사상이다. 『맹자』에서는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1)을 비롯하여 무려 10군데에 걸쳐 '인정'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인정은 바로 맹자가 강조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공자가 가장 중요시한 인(仁)에서 비롯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2-h-2 인정문仁政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출입문이다. 인정문은 1405(태종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1744(영조 20)년 10월에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났을 때 옮겨 붙어 좌·우 행각과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 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1803(순조 3)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된 일이 있는데, 인정문도 그 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가 인정문과 그 주위 행랑을 왜식(倭式)으로 일부 변형했으나 1988년 현재와 같이 원상을 회복하였다.
인정문은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로 그 의미가 큰 곳이다. 왕세자는 앞 임금이 별세한 궁궐의 빈전(殯殿: 왕의 빈소)에서 옥새를 받고 그 궁궐의 정전이나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앞 임금이 창덕궁에서 별세할 경우 다음 임금은 인정전이나 인정문에서 즉위한 것이다. 특히 즉위식은 인정전보다는 주로 인정문에서 치러졌다.
뜻풀이 : 2-h-1 인정전 참조.
2-h-3 진선문進善門

위치와 연혁 :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위치한다. 진선문 앞에는 금천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1409(태종 9)년부터 진선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창덕궁이 창건될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度支部) 2)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할 때 헐렸다가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른다. 태종대와 영조대에는 이 곳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뜻풀이 : '진선(進善)'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정전이 임금의 정전(正殿)이므로 진선문을 통하여 바른 말을 올리거나 인재를 천거하여 임금이 바르게 되고 바른 교화[正敎]가 펴지기를 기원하는 이름이다. 전자의 용례로 『후한서』 「채무전(蔡茂傳)」에서는 "교화를 일으킴은 반드시 착한 말을 올리는 데서 연유한다."라고 하였다.<원전 1> 후자의 용례로 한나라 때 반고(班固, 32~92년) 3)가 편찬한 『백호통의(白虎通義)』의 「고출(考黜)」 편에서 "현명한 사람이 많으면 훌륭한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면 악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원전 2>

제작 정보 : 본래의 현판은 정난종(鄭蘭宗, 1433~1489년) 4)의 글씨인데, 1999년 복원하면서 서예가 정도준이 새로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2-h-4 숙장문肅章門

위치와 연혁 : 인정문 밖 동쪽에 있다. 진선문에서 인정문을 지나 마당을 따라 마주 보이는 문이다. 1475(성종 6)년 문 이름을 지었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 등이 있어서 이 인정문 뜰과 조정 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 의식이 많이 치러졌다. 이 일대는 일제 때 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졌다가 최근 모두 복원되었다.
뜻풀이 : 숙장(肅章)'은 '엄숙하고 문채(文彩)난다'는 의미이다.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원래 현판은 정난종 글씨였는데 최근 복원하면서 정도준이 새로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동궐도』에는 현판이 바깥에 그려져 있어 지금과 다르다. 이를 두고 화공의 실수라고 하기도 하고 잘 보이도록 일부러 바깥에 그렸다는 논란이 있다.
2-h-5 광범문光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동문이다. 동쪽으로 임금의 경호 업무를 맡은 선전관청(宣傳官廳), 승정원, 내시들의 집무실인 내반원(內班院)과 통한다.
뜻풀이 : '광범(光範)'은 '규범을 빛낸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2-h-6 숭범문崇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문이다. 서쪽으로 예문관, 내의원과 통한다.
뜻풀이 : '숭범(崇範)'은 '규범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2-h-7 향실香室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북쪽에 위치한 향청은 의례에 쓰이는 축문과 향을 관리하던 직소이다. 교서관 소속으로 책임직은 충의(忠義)인데,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공신의 자손이 임명되었다. 향관은 참하문관(參下文官)이 맡았고, 이틀에 한 번 숙직하였다. 명종의 신임을 돈독히 받은 상진(尙震,1493~1564년) 5)과 영·정조 때의 문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 6)가 이 곳을 거쳐 정승에까지 오른 일이 유명하다.<원전 3>
뜻풀이 : '향실(香室)'은 '향을 보관하는 방'이란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1) 「양혜왕장구」는 맹자가 여러 제후국을 다니며 왕들과 정치에 대해 대화한 내용을 모은 장이다.
2) 탁지부는 1895년 이후 국가의 재정업무를 총괄하고 지방의 재무를 감독한 중앙부처다.
3) 반고는 『한서』를 편집한 후한 초의 역사 학자다.
4) 정난종의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다. 시호는 익혜(翼惠).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5) 상진의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이다. 1519(중종 14)년 사관(史官)이 되었으며, 이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으로 후대에 크게 칭송을 받았다.
6) 박세채는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소론의 영수로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탕평론을 강조하여 영·정조대 탕평책 시행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원전 1> 『후한서』 「채무전」, "興化致敎, 必由進善."
<원전 2> 반고, 『백호통의』 「고출」, "多賢乃能進善 進善乃能退惡."
<원전 3> 『한경지략』, "香室, 在仁政殿西, 掌書各祭享祝文及封香, 其官名忠義, 以功臣子孫爲之, 而香官則以參下文官爲之, 更日直宿. 案, 朴南溪世采, 曾經香室忠義, 尙政丞震, 以香官拜相, 故香室先生中, 今稱道." |
|
 |
|
 |
 |
|
 |
| 태그 : 광범문 | 궁궐 | 숙장문 | 숭범문 | 향실 | 인정전 | 조선왕릉 | 진선문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현판과 주련- 경복궁- 향원정 권역
6월 2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향원정 권역...
1
3-h-20 향원정香遠亭

위치와 연혁 : 건청궁 앞의 연못인 향원지(香遠池)의 가운데 섬에 있는 정자이다. 1867(고종 4)년에서 1873(고종 10)년 사이에 건청궁을 만들면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뜻풀이 :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이다. 북송대 학자 주돈이(周敦이, 1017~1073년) 1)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香遠益淸]'<원전 1>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향원지 연못에 원래 연(蓮)이 심겨 있었음을 알려 주는 이름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의 오른쪽 위에 '御筆(어필)'이라는 전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어 고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13-j-20 향원정香遠亭의 주련


뜻풀이 :
(1) 玉池龍躍舞(옥지용약무)
아름다운 연못에 용이 뛰쳐 오르며 춤추네.
향원지를 신선이 사는 선계로 비유하고 그 못에 용이 뛰노는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옥지(玉池)는 신선이 사는 곳의 연못을 뜻한다.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의 문인인 강엄(江淹, 444~505년) 2)의 「혜중산언지(혜中散言志)」 시에 "朝食琅?實, 夕飮玉池津"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주련의 출전은 미상이며, 대구가 되는 구절이 없어 한 짝이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2) 千山華月逈(천산화월형)
천산에는 빛나는 달이 멀리까지 비추고
(3) 萬里衆星明(만리중성명)
만리에는 뭇 별들이 밝게 빛나네.
온 산에는 하늘 높이 뜬 달이 밝게 비추어 주고, 먼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묘사하였다.
(4) 崑랑雲霞積(곤랑운하적)
곤륜산 꼭대기에는 구름 노을 쌓였고,
(5) 蓬壺日月長(봉호일월장)
신선 사는 봉래에는 세월이 길도다.
향원정이 있는 섬을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에 비유하여 선계처럼 세월이 가는 줄 모르는 곳이며 경치가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봉호(蓬壺)'는 봉래산(蓬萊山)의 별칭이다. 이 산은 전설 속에서 동해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사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생긴 모양이 병같이 생겼다 하여 이와 같이 불렸다. '곤랑'은 곤륜산 꼭대기에 있다는 봉우리인 낭풍전을 가리키며 역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졌다.

제작 정보 : 위의 두 쌍의 주련에는 각각 필사자를 나타내는 '불(?)'이란 글자가 있어 중국 북송의 이름난 문인 미불 3)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짝을 잃은 (1)번도 같은 필체임을 보아 이 향원정의 글씨는 모두 미불의 작품을 새긴 것이다.
13-h-21 열상진원洌上眞源


위치와 연혁 : 향원지로 흘러드는 샘물의 우물 뚜껑 측면에 새겨진 글이다. 고종때 경복궁 중건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뜻풀이 :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뜻이다. 한강을 다른 말로 '열수(洌水)'라고 하였기 때문에 '열상(洌上)'은 한강의 북쪽, 즉 서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열상을 열수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 듯하다.
한강의 근원은 지리학적으로는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검룡소이지만, 왕궁에서 흘러나온 물이 한강으로 유입되므로 상징적으로 이 곳을 진원(眞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제작 정보 : 글씨는 예서체로서 돌에 새겨진 금석문이다.
──────────────────────────
1) 주돈이는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가의 영향을 받아 유교를 새로이 해석해「태극도설」을 저술했다.
2) 강엄은 남조의 송·남제(南齊)·양 세 왕조를 섬겼다. 양나라 때 벼슬이 높이 올랐으나 문학 활동은 송·제 시대에 활발했다. 역대 이름난 시인들의 작풍을 본따 지은「잡체시 30수」가 대표작인데, 인용한 시도 그 하나로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중산 혜강의 시를 본떴다.
3) 미불에 대해서는 곤녕합의 주련 참조.
<원전 1> 주돈이, 「애련설」,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 濯淸漣而不夭.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 而不可褒翫焉."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궁궐 | 향원정 | 열상진원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경복궁- 건청궁 권역[1]
6월 1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경복궁- 건청궁 권역[1]
건청궁乾淸宮 권역


13-h-1 건청궁乾淸宮

위치와 연혁 : 향원정 뒤쪽에 있다.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 등의 여러 건물을 관명문(觀明門), 필성문(弼成門), 청휘문(淸輝門) 등으로 둘러 독자적인 권역을 만든 것이다. 궁궐 안에 새롭게 궁이라고 이름한 공간을 만든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건물 배치에서도 국왕이 거처하는 건물과 왕비가 사용하는 건물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건청궁이란 현판은 이 권역의 제일 남쪽 행각에 낸 내문(內門) 위에 걸려 있다. <원전 1>
이 궁은 1873(고종 10)년에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새로 만든 공간이다. 이 해 5월에 건청궁 공사가 지나치게 화려하게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고, <원전 2> 또 이 해 12월 10일에 이 곳에서 고종이 정무를 살피는 것으로 보아 <원전 3> 이 해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건청궁은 일제에 의해 1909년경 완전히 헐려서 없어져 버렸다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중건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뜻풀이 : '건청(乾淸)'이란 '하늘은 맑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乾)'은 '하늘','청(淸)'은 '맑다'는 뜻이다. 청나라의 자금성 안에도 이 이름의 궁이 있었다.
13-h-2 장안당長安堂

위치와 연혁 : 건청궁에 있다. 임금이 소대(召對) 1)를 행하거나 외직으로 나가는 신하 등을 만나는 일이 이 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때 임금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원전 4> 편전은 국왕이 일상 정무를 보는 곳이다.
1873(고종 10)년 건청궁을 지을 당시에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건물은 2006년 복원할 때 새로 만든 것이다.
뜻풀이 : '장안(長安)'이란 '오랜 동안 평안하게 지내다'는 뜻이다. '장(長)'은'오랜 시간', '안(安)'은 '평안함'을 의미한다.

제작 정보 : 규장각이 소장한 『어필현판첩(御筆懸板帖)』(奎10293)에 고종 친필의 장안당 탁본이 수록되어 있어, 장안당 현판 글씨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어필현판첩』은 1885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현판은 이 현판첩에서 모사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御筆(어필)'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좌측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13-h-3 정화당正化堂

위치와 연혁 : 장안당의 서북쪽에 붙어 있는 침방(寢房)이다. 곤녕합의 침방인 정시합(正始閤)과 짝을 이룬다.

뜻풀이 : '정화(正化)'란 '올바른 교화' '계통이 바른 교화'를 뜻한다. 한나라 종리의(鍾離意) 2)의 『답부기(答府記)』에 나오는, "올바른 교화의 근본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며 먼 곳으로 미치는 것임을 밝혔다."<원전 5>라고 한 데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
13-h-4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위치와 연혁 : 장안당에 부속되어 있다. 곤녕합에 사시향루(四時香樓)가 있는것과 비교된다.
뜻풀이 : '추수부용(秋水芙蓉)'이란 '가을 물 속의 연꽃'을 뜻한다. "왕우승(王右丞) 3)의 시는 가을 물 속의 연꽃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미소 짓는 것과 같다."<원전 6>라고 한 것처럼 시를 평할 때 흔히 이 표현을 활용했다. '가을 물 속의 연꽃'은 또한 그 자태가 수려하여 예부터 화가들이 즐겨 그리기도 하였다.
13-h-5 초양문初陽門

위치와 연혁 : 장안당의 동쪽에 난 문이다. 장안당과 곤녕합 사이 담장에 있다.
뜻풀이 : '초양(初陽)'이란 '처음 나타나는 양의 기운'을 의미한다. 아침 해 혹은 아침 햇살을 초양이라 하기도 하고, 또 동지에서 입춘 이전까지의 시간을 초양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초양은 이른 봄을 뜻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성세(盛世)를 가리키기도 한다.
제작 정보 : 청나라 옹방강 4)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오른쪽 위에 '復初齋(복초재)', 왼쪽 아래에 '覃溪(담계)'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둘 다 옹방강의 호이다.
13-h-6 필성문弼成門

위치와 연혁 : 장안당의 앞편 담에 있다. 뒤쪽으로 관문각(觀門閣)과 통하던 관명문(觀明門)과 취규문(聚奎門)이 있다.
뜻풀이 : '필성(弼成)'은 '도와서 이룬다'는 뜻이다. '필(弼)'은 '도우다', '성'은'이루다'는 뜻이다. 『서경』의 「익직(益稷)」 편 5)에서 출처를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계(啓)가 앙앙하고 울어대도 저는 그를 자식으로서 사랑해 주지 못하고 토공(土功)을 크게 헤아려 오복(五服)의 제도를 도와 이루되[弼成] 5천 리에 이르게 하고 각 주(州)마다 열두 명의 제후를 두었으며 밖으로 사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수령을 세우니, 각각 나아가 공(功)이 있게 되었습니다."<원전 7>라고 하였다. 여기서 필성은 신하가 임금을 보필하여 공업을 이룬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제작 정보 : 벽돌로 만든 월문(月門)이며, 글씨는 돌에 새겼다.
13-h-7 관명문觀明門

위치와 연혁 : 장안당의 뒤편 서쪽 담에 난 문이다. 필성문과 취규문의 중간에 위치했다. 관문각과 통하던 문이다. 2006년 복원 당시 서양식의 건물인 관문각은 복원하지 않았다.
뜻풀이 : '관명(觀明)'은 '밝은 빛을 살핀다'는 뜻이다. 『주역』의 명이(明夷)괘를 풀이한 「상전」 구절에 대한 북송의 성리학자 정이의 해석에서 출처를 찾을 수 있다. 「상전」에서는 "밝음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명이(明夷)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여러 사람들을 대할 때에 어둠을 써서 밝게 한다."<원전 8>라고 풀이하였다. 정이는 이에 "그러므로 군자가 밝음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상(象)을 보아 여러 사람을 대할 적에 극도로 밝게 살피지 않고 어둠을 쓰는 것이니, 그런 다음에야 남을 용납하고 여러 사람을 화합하여 여러 사람이 친애(親愛)하고 편안하니, 이는 어둠을 쓰는 것이 바로 밝음이 되는 것이다."<원전 9>라고 풀이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관명'은 '밝은 빛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는 뜻이다. 서쪽 문이므로 땅 속으로 해가 지는 모습에서 명이 괘의 교훈을 살린 것으로 보인다.

제작 정보 : 현판은 건청궁 복원과 함께 집자하여 만들었다.
13-h-8 취규문聚奎門

위치와 연혁 : 장안당의 뒤편 서쪽 담에 난 문이다. 필성문과 관명문의 뒤쪽에 위치했다.
뜻풀이 : '취규(聚奎)'는 '별들이 규성(奎星)으로 모여든다'는 의미이다. 규성은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별이다. 따라서 규성 주위로 다른 별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인재가 모여듦을 의미한다.
창덕궁의 후원에는 취규정(聚奎亭)이 있다.
──────────────────────────
1) 소대는 임금이 신하를 불러 만나는 것, 특히 낮시간에 경연관을 불러 정례의 경연 외에 따로 강론을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2) 종리의는 후한 현종 때 관직에 있었던 이로, 청렴함과 충언으로 이름을 남겼다.
3) 왕우승은 당나라 문인 왕유를 일컫는다. 그가 벼슬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부른다.
4) 옹방강은 청나라 대흥(大興: 북경)출신으로 호는 담계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고증·금석·서법(書法)에 정통하였다.
5) 『익직』 편은 순임금을 모신 현인 익(益)과 직(稷)에 대한 이야기다. 순 임금과 우(禹)의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인용된 부분은 우가 대답하는 부분으로, 계는 우의 아들이다. 자식도 제쳐놓고 나라를 돌보았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원전 1> 『궁궐지』, "南行閣九間, 內門, 則乾淸宮."
<원전 2> 『일성록』 고종 10년 5월 10일(丁亥),"副護軍 姜晉奎上疏, 請宮後勿事侈大. 賜批. 疏略曰...(중략)...伏聞, 又有乾淸宮經始之役, 頗尙宏麗云. 此不過時備臨幸之所, 而將焉用彼壯麗而過爲靡費也....(중략)...伏乞務從省約, 勿事侈大, 加意於緝熙懋敏之學焉."
<원전 3> 『일성록』 고종 10년 12월 10일(甲申),"召見領議政李裕元于乾淸宮."
<원전 4> 『일성록』 고종 28년 1월 29일(甲午),"召見慶尙監司 李永于長安堂."; 『일성록』 고종 28년 10월 17일(戊申), "行召對于長安堂, 承旨鄭恒朝, 閣臣金晩秀, 玉堂閔泳錫, 假注書崔泳龍, 史官尹斗炳\金德洙."
<원전 5> 종리의, 『답부기』, "明正化之本, 由近及遠."
<원전 6> 『은거통의(隱居通議)』 권6, 敖器之詩評, "評曰, 魏武帝如幽燕老將, 氣槪?雄. 曹子建如三河少年, 風流自賞. 鮑明遠如饑鷹獨出, 奇矯無前...(중략)...彭澤如絳雲在?, 舒卷自如. 王右丞如秋水芙蓉, 倚風自笑."
<원전 7> 『서경』 「익직」, "啓呱呱而泣, 予弗子. 惟荒度土功, 弼成五服, 至于五千, 州十有二師. 外薄四海, 咸建五長, 各迪有功."
<원전 8> 『주역』 「명이」, "象曰, 明入地中, 明夷.君子以, 衆, 用晦而明."
<원전 9> 위에 대한 『정전』의 주, "故君子觀明入地中之象, 於衆也, 不極其明察而用晦, 然後能容物和衆, 衆親而安, 是用晦乃所以爲明也."
|
|
 |
|
 |
 |
|
 |
| 태그 : 건청궁 | 경복궁 | 관명문 | 궁궐이야기 | 필성문 | 장안당 | 정화당 | 조선왕릉 | 초양문 | 추수부용루 | 취규문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경복궁- 흥복전 권역
6월 1,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경복궁-흥복전 권역
11. 흥복전 권역


11-h-1 흥복전興福殿

위치와 연혁 : 흥복전은 왕의 후궁들이 살던 공간인 빈궁(嬪宮)이다. 궁궐 내 여성 내명부에 적절한 소임을 주고 독립된 건물 채인 각 전(殿)에 배속시키는 본부 역할을 했으며, 외국 사신을 만나는 편전으로도 활용됐다. 신정왕후 조대비(趙大妃, 1808~1890년) 1)가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였다.
뜻풀이 : '흥복(興福)'은 '복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경전 등에 용례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한서(漢書)』 「공광전(孔光傳)」에 "하늘에 순응하고 이단을 막으며,화를 없애고 복을 일으킨다[興福]."라는 표현이 보인다. 라."<원전 1>

제작 정보 : 『북궐도형』에는 나타나나 『궁궐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현재 흥복전 일대가 대대적인
복원 사업 중이며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덕수궁에도 흥복전이 있었다.
11-h-2 집경당緝敬堂
위치와 연혁 : 1867(고종 4)년~1~ 873(고종 1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함화당과 가운데 3칸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함화당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여러 채의 부속 건물과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으며 현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주로 침전(寢殿)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종이 향원정 뒤에 건청궁을 짓고 머물 당시에는 이 곳 집경당과 함화당에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지을 때 집경당과 함화당이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뜻풀이 : '집경(緝敬)'은 '계속하여 공경한다'는 뜻이다. '집(緝)'은 '계속한다'는 뜻이다. 원 출전은 『시경』 「대아(大雅)^문왕(文王)」 편이다. 여기에는 "심원하신 문왕이여! 아, 공경을 계속하여 밝히셨도다[緝熙敬止]. 위대한 천명은 상나라 자손들에게 있었도다."<원전 2>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중 '집희경지(緝熙敬止)'에서 두 글자를 따 온 것이다. 『대학』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止於至善(지어지선; 지극한 선에 머묾)'의 뜻을 풀이하는 데 응용하였는데, 이 때 '집희경지'를 '계속하여 밝혀서 공경하여 그쳤다.'라고 풀이하였다. 『시경』에서는 '지(止)'를 어조사로 보았으나 『대학』에서는 '경지(敬止)'를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치는 바에 편안함을 말한다'고 하여 '지(止)'를 '머물다', '그친다'는 의미를 지닌 실사(實辭)로 본 것이다.
제작 정보 : 현재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북궐도형』에는 실려 있으나 『궁궐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11-h-3 함화당咸和堂

위치와 연혁 : 집경당의 서쪽에 있다. 집경당과 내부에서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복도 삼간으로 이어져 있다. 예전에는 복도 남쪽에 샛담이 있고 계명문이라는 일문(日門)과 영춘문이라는 월문(月門)이 있었다. 또한 영지문^창무문 등 여러 일각 대문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현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뜻풀이 : '함화(咸和)'는 '모두가 화합하다'는 뜻이다. 『서경』 「무일(無逸)」 편 2)에 "아름답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공손하시어 백성들을 품어 보호하시며,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생기가 나게 하며, 아침부터 한낮과 저녁에 이르기까지 한가히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보살펴, 만백성들을 모두 화합하게[咸和]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작 정보 : 현재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북궐도형』에는 나타나나 『궁궐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11-j-3 함화당咸和堂의 주련


위치와 연혁 : 함화당의 기둥에 붙어 있다.
뜻풀이 :
(1) 可釣可?盤谷序(가조가경반곡서)
낚시질할 만하고 밭갈이할 만하니 반곡서(盤谷序)이고,<원전 3>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은자의 자족적인 생활을 그린 구절이다. 탈세속의 공간에서 자족하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반곡서'는 당나라 한유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는 글)」을 가리킨다. 벗인 이원(李愿)이 반곡에 은거해 살면서 세상의 명리에 초월하여 홀로 유유자적하겠다고 말하자 한유가 이에 찬동하여 쓴 글이다.<원전 4> 이 구절은 이 곳이 한유가 이원을 전송하며 쓴 글에 나오는 그 반곡과 같다는 말이다. 원나라의 양공원(楊公遠)이 지은 「초하여중(初夏旅中)」 오수(五首)<원전 5> 중 제 5수에 나오는 구절을 따온 것인데, 짝이 되는 뒷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뒷 구절은 다음과 같다.
堪詩堪?輞川圖(감시감화망천도)
시 지을 만하고 그림 그릴 만하니 망천도(輞川圖) 3)라네.
제작 정보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 같은 문구의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2) 雲裏帝城雙鳳闕(운리제성쌍봉궐)
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봉궐(鳳闕) 4)이요,<원전 6>
도성 안의 구름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궁궐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701~761 또는 699~759년) 5)의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 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奉和聖製 從蓬萊向興慶閣道中 留春雨中 春望之作 應制;임금께서 지으신 「봉래궁에서 흥경궁을 가는 행각에서 봄비에 취해」 작품에 화답하여 짓다)」에서 따온 구절인데 짝이 되는 뒤의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雨中春樹萬人家(우중춘수만인가)
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
제작 정보 :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과 한정당(閒靜堂)에도 같은 문구의 주련이 짝이 갖추어져 걸려 있다.
뜻풀이 :
(3) 能招過客飮文字(능초과객음문자)
과객을 불러 시문을 음미할 만하고,<원전 7>
혼자 조용히 은거하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문장을 논하기도 하면서 산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송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왕안석(王安石, 1021~1086년) 6)이 지은 장편고시 「화왕미지등고재(和王微之登高齋)」 가운데 제 1수의 한 구절인데 짝이 되는 뒤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山水又足供歡?(산수우족공환해)
산수는 또 기쁜 웃음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네.

뜻풀이 :
(4) 閒眠東閣修花史(한면동각수화사)
한가로이 동각에서 잠자며 『화사(花史)』를 수정하고,
(5) 偶坐南池注水經(우좌남지주수경)
우연히 남지에 앉아 『수경(水經)』7)에 주석을 하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은자를 그렸다. 동쪽 누각에서 한가로이 화사, 곧 화초에 대한 책을 다듬어 보고, 남쪽 연못에서 『수경』에 주석을 다는 은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동각(東閣)은 양(梁) 나라 때 사람인 하손(何遜, ?~518년)이 자신의 동각을 개방하고 문인(文人)을 초빙하여 매화를 감상했던 고사에서 따온 말로 여러 시에서관용적으로 쓰이곤 했다. 이를테면 두보(杜甫, 712~770년)의 시에 "동각 관아의매화가 시흥을 일으키니,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와 흡사하네."라는 구절이 있다.<원전 8> 『추구(推句)』8)에도 "서쪽 정자에는 강 위에 달 뜨고, 동각의 눈 속에 매화가 피었네(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라는, 작자 미상의 구절이 실려 있다. '남지(南池)'는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에 있는 지명으로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년)이 여기서 잔치를 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종원이 지은 「배최사군유연남지서(陪崔使君遊宴南池序)」라는 글이 있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를 나타내는 '鐵保(철보)'라는 글이 적혀 있고, 아래에는 '又字鐵卿(우자철향)'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철보(1752~1824년)는 호가 매암(梅庵) 9), 자가 야정(冶亭)으로 만주 출신의 청나라 서예가이며 당대의 명가인 유용(劉墉, 1719~1804?년), 옹방강(翁方綱, 1733~1818년) 10) 등과 명성이 나란하였다. 조선의 북학파 학자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와 교유하여 자주 서신을 왕래하였으며, 박제가는 연작 「회인시(懷人詩)」에서 세 차례나 그에 대해 읊었다.
창덕궁 낙선재에도 같은 구절의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6) 平生所學爲何事(평생소학위하사)
평생에 배운 바는 무슨 일을 위함인가?
(7) 後世有人知此心(후세유인지차심)
후세에 뉘 있어서 이 마음을 알아 주리.
평생 동안 공부한 경륜이 지금 쓰이지 못한 한탄과 함께 후세에는 알아 줄 사람이 있으리라는 위안을 가져 보는 내용이다.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년)의 시 「서창독작(西?獨酌)」의 한 구절<원전 9>이다.
뜻풀이 :
(8) 妙書鴻戱秋江水(묘서홍희추강수)
절묘한 글씨는 가을 강물에서 기러기가 희롱하는 듯하고,
(9) 好句風行曉苑花(호구풍행효원화)
아름다운 시 구절은 새벽 화원에 바람이 지나가는 듯하네.
절묘한 글씨의 품격을 가을 강물에서 기러기가 유유히 헤엄치며 노니는 것에 비유하고, 아름다운 시 구절을 새벽 화원의 꽃을 스치며 부는 바람에 비유하였다. 원(元) 나라 시인 유선(劉詵)의 시 「화장한영견수(和張漢英見壽)」 중에 나오는 구절<원전 10>이다.
(10)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
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 11)라고 씌어 있고,
(11)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
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 12)이라고 새겨졌네.
기와에는 장수하라는 뜻의 글을 써 놓았고, 구리 쟁반에는 부귀와 복을 누리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를 나타내는 '趙光(조광)' 13)이라는 글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蓉舫(용방)'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용방은 청나라 문인 조광(1797~1865년)의 자이다. 창덕궁 낙선재와 한정당에도 같은 주련이 있다.

뜻풀이 :
(12) 誰憐?筆才名重(수련화필재명중)
그림과 글씨로 재주와 명성 높음을 누가 어여삐 여기리요.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알아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출전 미상이며 대구(對句)가 되는 글이 없어 한 짝은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13) 巖前倚杖看雲起(암전의장간운기)
바위 앞에 지팡이 짚고 구름 이는 모습 바라보며,
산속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다. 원나라 시인 조문회(曹文晦)의 시 「성수산휴서(聖壽山休暑)」의 한 구절<원전 11>이다. 짝이 되는 뒤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松下橫?待鶴歸(송하횡금대학귀)
솔 아래서 거문고 끼고 학이 돌아오길 기다리네.
(14) 轉覺林泉興味長(전각임천흥미장)
산림 속 흥미가 길어짐을 더욱 느끼리.
아래에 소개한 분실된 앞 구절과 연관지어 해석해 보면, 스님이 선물해 준 부채를 들고 아름다운 숲 속으로 들어가면 산림 속의 흥취가 점점 길어짐을 더욱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송(宋) 나라 시인 채양(蔡襄, 1012~1067년) 14)의 시 「장주백련승종요견유지선 매선각서일수(?州白蓮僧宗要見遺紙扇 每扇各書一首)」의 제 9수 중 한 구절 <원전 12>이다. 짝이 되는 앞 구절은 분실되었다. 분실된 앞 구절은 다음과 같다.
直應携去林泉好(직응휴거임천호)
(부채를) 받아들고 아름다운 산천으로 가게 되면,
(15) 渭北先殷尊酒懷(위북선은준주회)
위수 북쪽의 옛 은나라, 술잔을 그리워하네.
자세한 의미와 출전 등을 알 수 없다. 대구가 되는 글이 없어 한 짝이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선은(先殷)'의 뜻은 미상이며 '尊(준)'은 '樽(준)'과 통용된 글자이다. 두보의 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며)」시의 "이곳 위수 북쪽에는 봄 나무에 싹이 트나 / 그 곳 강남에는 해가 구름에 지겠지 / 어느 때나 함께 술잔을 나누며 다시 한 번 글을 논하리오(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尊酒, 重與細論文)."라는 구절을 응용한 표현인 듯하다.

(16) 養竹不除當路筍(양죽불제당로순)
대 기르기 좋아하여 길에 자란 죽순도 베지 않고,
(17) 愛松留得?門枝(애송유득애문지)
솔을 사랑해 문 가린 가지도 남겨 두었네.
자연을 사랑하여 인위적인 손상을 가하지 않는 천연스런 삶을 읊은 구절이다.
당나라 스님 관휴(貫休, 832~912년) 15)의 시 「산거시(山居詩二十四首)」 이십사수 중 제 8수의 함련(?聯)<원전 13>에서 따온 구절이다. '문(門)'은 대부분의 문헌에 '인(人)'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 선향재(善香齋)에도 같은 주련이 있다.
(18) 樂意相關禽對語(낙의상관금대어)
즐거운 뜻 서로 관계하여 새들은 마주하여 지저귀고,
즐거운 마음을 나누는 듯이 서로 마주 대해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송나라 시인 석연년(石延年, 994~1041년) 17)의 시 「금향장씨원정(金鄕張氏園亭)」에서 따온 구절<원전 14>이다. 짝이 되는 뒤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生香不斷樹交花(생향불단수교화)
향기 풍겨 끊이지 않으니 나무에는 꽃이 흐드러지네.
창덕궁 연경당에도 같은 내용의 주련이 짝이 갖추어져 걸려 있다.
11-h-4 하지荷池
위치와 연혁 : 함화당(咸和堂)의 뒤뜰에 있는 장방형의 조그마한 돌 연못이다.
인공으로 조성한 석연지(石蓮池)인데 함화당의 뒤편에 커다란 연못인 향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 연못을 만든 것은, 예전에는 함화당이 담으로 둘러져 있어서 향원정과는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뜻풀이 : '하지(荷池)'는 '연꽃이 있는 못'이라는 뜻이다.
──────────────────────────
1) 익종(효명세자)의 비다. 1819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30년 효명세자가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1834년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이하응의 둘째아들을 고종으로 즉위 시키고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2) 「무일」 편은 주공이 성왕에게 왕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역대 뛰어난 임금들의 치세를 들어 훈계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3) <망천도>는 왕유가 자신의 별서가 있는 망천의 풍경을 그린 그림. 왕유는 이곳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유유자적하였다. 송나라 소식(蘇軾) 이 이 그림을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 ?中有詩)."라고 평하였다.
4) 봉궐(鳳闕): 궁궐의 문 또는 궁궐을 이르는말. 중국 한나라때에 궁궐의 문 위에 구리로 만든 봉황을 장식한데서 유래한다.
5) 왕유는 자(字)는 마힐(摩詰).당 격변기에 관직을 맡았다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고 자연에 은거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는데,그림은 현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동기창에 의해 남종 문인화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6) 왕안석은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정치적으로는 신법 개혁으로 유명하다.
7) 수경은 3세기경에 이루어진 책으로 하천의 발원지, 합류지, 입해지(入海地) 등을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한나라의 상흠(桑欽), 또는 진(晉)나라의 곽박(郭璞)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북위때의 역도원(?道元, 469~527년)이 주석을 더한『수경주(水經注)』가 유명하다.
8) 『추구』란 오언시(五言詩)를 대구위주로 추려 모아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책이다.
9)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는 자(字)가 매암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인 듯하다.
10) 13-h-5 초양문 참조.
11) 연년익수: 수명을 늘려 더욱 오래살라는 뜻이다.
12) 부귀길상: 부귀와 좋은 복을 누리라는 뜻이다.
13) 조광은 청나라 운남(雲南) 곤명(昆明) 출신으로 자는 용방, 호는 퇴암(退庵), 시호는 문각(文恪)이다. 1820(가경25)년 진사가 되어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시문을 잘 했고, 동기창의 서법에 뛰어났다.
14) 채양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이자 서예가, 문신이었으나 풍류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자 군모(君謨).시호 충혜(忠惠). 안진경체로 독자적 서풍을 이루어 소식, 미불 등과 함께 송나라의 4대가로 일컬어졌다.
15) 관휴는 당말 오대의 승려로 절강성 출신이다. 오나라, 월나라 등을 유랑하며 『법화경』,『기신론』을 전했다. 수묵화에 조예가 깊었다.
16) 석연년은 자는 만경(曼卿). 송 진종 때 대리시승(大理寺丞)을 지냈다. 문장이 매우 기운이 있고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원전 1> 『한서』 「공광전」, "應天塞異, 銷禍興福."
<원전 2> 『시경』 「대아^문왕」,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假哉天命, 有商孫子."
<원전 3> 『서경』 「무일」, "徽柔懿恭, 懷保小民, 惠鮮鰥寡, 自朝至于日中?, 不遑暇食, 用咸和萬民."
<원전 4> 한유, 「송이원귀반곡서」. "釣於水鮮可食", "盤之中, 維子之宮. 盤之土, 可以稼. 盤之泉, 可濯可沿. 盤之阻, 誰爭子所?"
<원전 5> 양공원, 「초하여중」 오수, 제 5수 "每憶吾廬隱者居 天然景物足淸娛 樹林陰?鶯求友簾幕深沈燕引雛 可釣可耕盤谷序 堪詩堪?輞川圖 何當歸去北?臥 能勝羲皇以上無."
<원전 6> 왕유,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 "渭水自?秦甸曲 黃山舊繞漢宮斜 ?輿?出仙門柳 閣道遙看上苑花雲裏帝城雙鳳闕 雨中春樹萬人家 爲乘陽氣行時令 不是宸遊重物華."
<원전 7> 왕안석, 『임천문집』 권6, 「화왕미지등고재」 중 제 1수. "寒雲沈屯白日埋 河漢蕩坼天如? 衡門兼旬限泥? ?聽?木鳴相? 蕭辰忽掃纖?盡 北嶺初出?嵬嵬 微之新詩動我目 爛若火齊金盤堆 想?諸彦眺平野 高論歷?秦以來?船淋浪始快意 忽憶歸雲胡爲哉 念君少壯輟游衍 發揮春秋名玉杯 書成不得斷國論 但此空語傳八垓 登臨興罷因感觸 更欲遠引追宗雷 君知富貴亦何有 諂譽未足償譏排 風豪雨橫費調燮坐使髮背爲黃台 留賓往往夜參半 雖有樽俎無由開 江南佳麗非一日 況乃故園名池台 能招過客飮文字 山水又足供歡? 剩留官屋貯酒母 取醉不竭當如淮."
<원전 8> 두보, 「화백적등촉주동정정 송객봉조매 상억견기(和裵迪登蜀州東亭 送客逢早梅 相憶見寄)」,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
<원전 9> 육유, 「서창독작」, "却掃衡門歲月深殘骸況復病交侵 平生所學爲何事 後世有人知此心 水落枯萍?破塊 霜高丹葉照橫林 一樽濁酒西?下 安得無功與共斟."
<원전 10> 유선, 「화장한영견수」, "吾里文章小晏家 才情欲學賈長沙 妙書鴻戱秋江水 佳句風行曉苑花 富貴未來歌?角 畸窮相對賦煎茶 芳年京國蜚騰近 預想春車墮馬?."
<원전 11> 조문회, 「성수산휴서」, "桐柏山西暑氣微 碧蘿凉吹透?衣 巖前倚杖看雲起 松下橫?待鶴歸 白眼看人多變態 靑雲得路有危機 下方風浪休回首 深閉柴門到夕暉."
<원전 12> 채양, 「장주백련승종요견유지선 매선각서일수」, 제 9수 "不掩歌脣向?堂 不須名筆作花房 直應携去林泉好 轉覺林泉興味長."
<원전 13> 관휴, 「산거시」 이십사 수, "心心心不住希夷 石屋???髮垂 養竹不除當路筍 愛松留得?人枝 焚香開卷霞生? 捲箔冥心月在池多少故人頭盡白 不知今日又何之."
<원전 14> 석연년, 「금향장씨원정」, "亭館連城敵謝家 四時園色?明霞 窓迎西渭封侯竹 地接東陵隱士家 樂意相關禽對語 生香不斷樹交花縱遊會約無留事 醉待參橫月落斜."
|
|
 |
|
 |
 |
|
 |
| 태그 : Andrew Keen | App Store | 경복궁 | 광화문 | 함화당 | 현판 | 흥복전 | 조선왕릉 | 조선왕조 | 주련 | 집경당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조선왕릉의 비밀...광해군,연산군묘
2월 5,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조선 왕릉 이야기 ... 광해군묘, 연산군묘

"연산군묘 |燕山君墓"

사적 제 362 호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
조선 10 대 연산군 (燕山君, 1476 ~ 1506) 1494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년은. 연산군은 초기 4 년 정도는 성종 조의 유풍이 남아있어 문치 (文治)를 비교적 잘 이루었으나 그 뒤로 무오사화, 갑자 사화와 같은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성종의 두 후궁과 그 아들들을 죽였으며, 병상에 누워 손자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는 할머니 인수 대비를 머리로들이 받아 돌아가 시게했다. 또한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여 회묘를 회릉 (怀陵)이라 고친 뒤 성종 묘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 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흥천 사를 마구간으로 바꿔 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저질렀다. 1506 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있는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했다. 거창군 부인 (居昌郡夫人) 신씨 사이에서 5 남 1 녀, 후궁 소생으로 2 남 1 녀가 있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 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 지에서 죽었다. 연산군은 유배 지인 교동도에 묻혔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 해줄 것을 상언하여 1513 년 오늘날의 위치에 이장되었다.

이때 중종은 이장을 윤허하면서 왕자 군의 예에 따라 개장할 것을 명했다. 따라서 연산군 묘에는 곡장 3 면과 상석 2 개, 장명 등석 2 개, 망주석 1 쌍, 문석인 2 쌍과 향로석 등의 상설을 갖추고있다.
"광해군묘 |光海君墓"

"광해군 묘는 쌍분인데, 오른쪽은 문성 군 부인 유씨의 묘이다. 연산군 묘와 동일하게 군묘의 형식으로 간소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두 봉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그리고 망주석과 문인석 1 쌍이 설치 되어있다 "
사적 제 363 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승리 산 59
조선 15 대 임금이자 두 번째 폐위 임금인 광해군 (光海君, 1575 ~ 1641)과 문성 군 부인 (文城郡夫人, 1598 ~ 1623) 유씨의 묘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말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 대군을 낳음으로써 권력의 암투가 벌어졌다. 선조는 적자인 영창 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으나 승하하기 직전 영창 대군은 겨우 두 살밖에 안되어 할 수없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1608 년 왕에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문화재 복구 사업에 전념했다. 창덕궁 등 궁궐을 중수하고,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특히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북방 외교 정책은 광해군 최고의 치적이다. 한편으로 광해군은 형이었던 임해 군과 이복 동생 영창 대군을 유배 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 ()의 싹을 키웠다反正. 특히 영창 대군을 방안에 가둔 채 불을 때어 질식사시킨 일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0.1623 년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 (洗剑)의 유래를 낳았던 능양군 ()을 인조 포함한 반정 군은 광해군을 폐위하여 강화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왕위에 올라 반정을 성공시켰다.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광해군은 그곳에서 67 세의 천수를 다했다. 광해군은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때문에 1643에서 지금의 묘소로 옮겨졌으며 건너다 보이는 곳에 어머니의 묘소인 성묘가 자리한다 년 제주도.
|
|
 |
|
 |
 |
|
 |
| 태그 : 광해군 | 연산군 | 왕자 | 조선왕릉 | 중종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파주 장릉
1월 2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조선왕릉 이야기 ..... 파주 장릉 편

사적 제23호(비공개) 경기도 파주시 갈현리 산 25-1

<인조와 인렬왕후의 합장릉이다. 영조 때인 1731년 현재의 장릉 자리로 이장하면서 왕과 왕비를 합장하였다>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의 조카인 인조(1595~1649)는 서인 세력을 등에 업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서인 세력이 친명주의자였던 만큼 인조는 청나라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굴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고, 맏아들과 둘째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볼모로 잡히기에 이른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청나라에 대한 적대 감정을 풀지 못하여, 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소현세자와 극도의 불화를 일으킨다. 소현세자, 봉림대군은 인렬왕후(1594~1635) 소생이다. 인렬왕후는 인조가 사가에 있던 시절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릉의 정자각 배위청의 전돌과 초석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국제 정세를 잘못 읽은 탓에, 지금의 송파인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겪고, 두 아들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다>
인조는 인렬왕후가 죽자 지금의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장사 지냈으며, 자신은 그 오른쪽에 묻혔는데, 뱀과 전갈이 석물 틈으로 집을 짓자 영조 때인 1731년 현재의 장릉 자리인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기면서 합장하였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쭉 뻗은 참도의 박석들>
24년의 재위 기간 내내 고통과 굴욕의 세월을 보내다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인조를 만나러 금천교를 건넌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 옛 능에서 옮겨올 때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등의 크기가 새 능에 맞지 않아 새로 만들었다. 따라서 장릉에서는 처음 조성한 17세기의 석물과 새로 조성한 18세기의 석물이 함께 어우러진다. 병풍석은 구름 무늬와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과 연꽃 무늬를 새기고 있다. 석호는 통통한 몸체에 짧막한 다리, 삐죽이 튀어나온 송곳니가 독특한 인상이다.
|
|
 |
|
 |
 |
|
 |
| 태그 : 봉림대군 | 광해군 | 소현제자 | 합장 | 인렬왕후 | 인조 | 장릉 | 조선왕릉 | 청나라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온릉)
1월 27,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조선왕릉 이야기....온릉 [편]

사적 제 210 호 (비공개)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19
< 장릉 | 長陵 >

<중종왕비 단경왕후가 홀로 잠든 온릉. 중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반정 세력에 의해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왕비 책봉 7일 만에 사가로 쫓겨났다. 1739년 영조 때 복위되면서 왕비 능으로 추봉되었기에 상설이 간소하다>
조선 11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신씨의 능이다.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의 부친 신수근이 반정으로 참살되어 죄인의 딸이 왕비로 부적하다는 반정공신들의 주청으로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되어 사제로 나갔다. 폐비 신씨는 소생 없이 71세로 승하했으며, 친정 묘역 언덕에 장사지냈다.

<온릉의 정자각. 중종은 반정 이후 공신들의 의견을 뿌리치지 못하고 단경왕후를 폐비 조치하였으나, 단경왕후를 늘 잊지 않았다고 한다>
1698년 숙종은 연경궁 내에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한식에는 묘제를 지내게 했다. 1739년 영조는 익호를 단경(端敬),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추봉하고 새로이 상설을 설치하면서 추봉된 왕비릉인 정릉, 사릉의 상설을 따랐다.

<온릉의 석물들. 온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 등이 생략되었고, 석양과 석호, 석마 등의 수도 줄어들었다. 추봉된 왕비의 예우에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문석인과 조각선이 얕고 가는 사각 장명등 문석인이 대동한 석마>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능침 주위로 양석과 호석 각 1쌍을 배치하고, 혼유석 1좌와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으며, 3면의 곡장을 설치하였다. 한 단 아래에 문석인과 마석 1쌍씩, 중앙에 장명등석이 있고, 능 아래에 재실이 있다.
|
|
 |
|
 |
 |
|
 |
| 태그 : 릉 | 온릉 | 왕 | 조선시대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 왕릉의 비밀(영월 장릉)
1월 26,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이 글은 문화 재청이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자료이며, 문화 재청의 허락을 득하여 게제합니다.
조선 왕릉의 비밀 .... 영월 장릉편

사적 제 196 호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86

장릉 가는길 : 경부, 중부 고속국도 - "신갈, 호법 분기점 (영동 고속도로) -"만종 분기점 (중앙 고속도로) - "제천 IC에서 (38 번국도) -"서영월 나들목 - "장릉 방향 우회전 (58 번국도) -"장릉
"장릉 |庄陵"

"추봉된 왕릉의 예에 따라 병풍석, 난간 석과 무석 인이 생략되었다 "
조선 6 대 단종 (端宗, 1441 ~ 57)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 왕후 권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8 세 때 왕세손으로, 1450 년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재위 2 년 4 개월 만에 문종 마저 승하하자 12 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능침 공간에서 바라본 경내. 정자각 앞으로 보이는 네모난 것이 영천, 왼쪽 옆으로 보이는 것이 차례로 단종 비각, 수복방, 배식 단과 배식 단사이다 "
세종의 18 왕자 가운데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수양 대군은 무력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명. 단종은 1454 년 송현 수의 딸을 왕비 (정순 왕후)로 맞아 들였다. 그리고 작은아버지 수양 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세조의 처사에 반대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은 노산 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을 갔다.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은 노산 군에서 다시 폐서인되었고, 17 세되던 1457 년 죽임을 당했다.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엄흥도가 거두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였다.

"한식 날을 전후하여 영릉에 제사 지내는 단종 제는 영월의 가장 큰 문화 행사로, 해마다 치러진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낸 엄흥도의 충절을 위해 세운 정려각"
그후 숙종 때인 1698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년 능호를 장릉 (庄陵)이라했다. 또한 암매장된 곳을 찾아내 이곳을 왕릉으로 정비 하였다
|
|
 |
|
 |
 |
|
 |
| 태그 : Bladder | Business | Components | Diseases & Conditions | Electronics and Electrical | Genitourinary Disorders | Health | Interstitial Cystitis | Interstitial cystitis/painful bladder syndrome | 영월장릉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융건릉)
1월 25,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이 글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청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자료로서 문화재청의 허락을 득하여 게제합니다.
조선 왕릉의 비밀....융건릉


사적 제 206호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융건릉 가는길 : 수원역 -> 오산방향(병점역) -> 안녕동(343번도로) -> 이정표
< 융릉 | 隆陵 >

정조의 친부모인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혜빈 홍씨(추존 장조왕비 헌경왕후)의 합장릉인데, 혼유석은 하나만 놓았다. 모란과 연꽃 무늬가 화려한 병풍석과 꽃봉우리 모양의 인석이 눈길을 끈다. 인석에 새겨진 '손巽' 자는 동남쪽을 가리킨다>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 1735~ 62) 장조와 비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1735~1815)의 합장릉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장헌세자는 2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장헌세자가 부왕을 대신하여 정무에 임하게 되면서 노론에서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 등을 내세워 모함하여 세자는 결국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무석인과 문석인의 뒷모습. 머리 장식의 세부적인 표현이 사실적이며 매우 세련되었다. 조선 후기에 문예 부흥의 꽃을 피운 정조 시대 분위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장헌세자에 대해 후회하면서 시호를 사도(思悼),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고 했다. 사도라는 것은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뜻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소설체로 쓴 『한중록(恨中錄)』을 남겼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인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추봉된 능이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고, 무석인도 배치하여 왕릉으로서의 격식에 다가갔다.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마는 무석인 뒤쪽에만 배치하였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바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에는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바꿨으며, 고종 때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懿皇后)로 올렸다.
< 건릉 | 健陵 >

<사도세자의 둘째아들로 영조에 의해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왕위에 오른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의 곡장. 꽃담으로 장식되었다. 사도세자 융릉과 마찬가지로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하나만 놓여 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 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융릉에 있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정조는 제위 24년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수원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을 쌓았다. 무엇보다 지극한 효심은 백성들에게까지 추앙을 받았다.
<장명등을 비롯하여 건릉의 석물들은 사도세자의 융릉과 거의 똑같다. 팔각 장명등에 새겨진 매·란·국 꽃무늬는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운 정조 시절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華城) 천도를 꿈꾸었다.
효의왕후도 정조에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다. 효의왕후는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로 진봉되었고, 소생 없이 69세로 승하했다. 능호를 정릉(靜陵)이라 했다가 건릉에 합장되면서 능호를 따로 쓰지 않았다.

<정조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화성으로 천도를 꿈꾸었다. 왕릉은 화려하고 기운찼던 그 꿈을 소리 없이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건릉은 사도세자의 현륭원 동쪽 구릉에 있던 것을 서쪽 구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의왕후와 합장한 것이다.
|
|
 |
|
 |
 |
|
 |
| 태그 : 윤건릉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 왕릉의 비밀(홍유릉)
1월 21,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조선 왕릉의 비밀.... 홍유릉 편


사적 제 207 호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가는길 : 서울시내 -> 내부순화도로 -> 북부간선도로 -> 춘천방향 -> 남양주시청방향 -> 이정표
< 홍릉 | 洪陵 >

<홍릉은 1897년 조선의 국호를 버리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다>
조선 26대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 ~1919)와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95) 민씨의 능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종은 조대비에게 수렴청정을,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고종은 1866년 명성황후 민씨를 맞아들였는데, 민씨의 척족들은 강력한 쇄국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서 대외 개방정책을 취했다.

<참도는 삼단이며, 중앙을 좌우보다 한 단 높게 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가 악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그 와중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비를 폐서인시켰다가 하루 만에 서인에서 빈의 호칭을 내리고, 그해 다시 왕후로 복위시키는 조서를 내려 숭릉(崇陵) 오른쪽 에 자리잡고 숙릉(肅陵)이란 능호를 내려 국장절차를 진행하다가 김홍집 내각이 실각함에 따라 5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병풍석과 난간석 사이 지면을 울퉁불퉁한 치맛주름 형태의 상석裳石으로 메웠다>

<문·무석인외에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 석물이 사열하듯 참도를 따라 홍살문까지 줄지어 서 있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황제가 되었다. 이때 민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고, 능호를 홍릉(洪陵)이라고 다시 정하고 2년 만에 국장이 마무리되었다. 이곳이 오늘날의 청량리 홍릉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퇴위한 뒤 1919년 승하하자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의 능을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었던 민비의 능도 옮겨와 합장릉으로 했다.
< 유릉 | 裕陵 >

<유릉은 하나의 봉분에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계비 순정황후 세 분을 합장한 유일한 예이다>
조선 마지막 능으로 27대 순종황제(純宗皇帝, 1874~1926)와 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삼합장릉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융희로 고쳤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계비 순정황후의 합장릉. 고종황제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 능의 격으로 조성되었다>
순종의 재위기간은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구하는 비사(悲史)와 민족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왕'으로 강등된 순종은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승하하므로 순종황제의 인산(因山)일인 6월 10일이 일제에 항거한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날로 알려져 있다.
순명효황후는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에 승하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공원에 모셔졌다가 순종 승하시 천장하여 함께 모셔졌다.

<해태는 시비와 선악을 본능적으로 판단한다는 동물로 머리 가운데 뿔이 있다.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들이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재를 물리치는 동물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했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계비가 되었다가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나라를 잃은 후 일제의 침탈행위,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던 순정효황후는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을 달래다가 1966년 춘추 72세로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되었다.
*이 글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청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정보이며, 문화재청의 허락을 득하여 게제 합니다.
|
|
 |
|
 |
 |
|
 |
| 태그 : 홍유릉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사릉
1월 2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조선 왕릉의 비밀.... 사릉


사적 제 209 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

사릉 가는길 : 경춘국도 금곡 -> 사릉리 방향 390번 도로(좌회전) -> 우측으로 이정표, 근처에 광해군묘와 홍유릉이 있고, 광릉은 약 40분 거리에 있다
< 사릉 | 思陵 >

<처음에 대군부인의 예우로 장사 지내졌다가 후에 왕비의 능으로 추봉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생략되었다>
조선 6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다음해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왕후는 의덕왕대비로 진봉되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정자각 앞에서 끊겨 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은 건물채가 짧아 평면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느낌이다>
1457년에 단종을 복위코자 한 사육신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대비 역시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그 후 노산군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생이별을 하고, 동대문 밖 연미정동에 초가를 지어 정업원(지금의 청룡사)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에서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절 뒤 산봉우리(동방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해했다. 정순왕후는 소생 없이 82세까지 살았다.
<해주 정씨 묘역의 문석인 앞에서 바라본 사릉의 정자각. 정순왕후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가 시집인 정씨 집안 묘역에 모셨다>

<사릉의 능역은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소나무 숲이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이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정씨(해주 정씨) 가족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
 |
|
 |
 |
|
 |
| 태그 : 비밀 | 사릉 | 왕비 | 정순왕후 | 정자각 | 조선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광릉)
1월 1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본 게시물은 문화재청에서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자료입니다.
조선 왕릉의 비밀.... 광릉편


사적 제 197 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 99-2

광릉 가는길: 서울(미아리)→의정부→축석고개→광릉수목원→광릉(33㎞)
< 광릉 | 光陵 >

<세조는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석만 두르는 등 능제를 간소화하였다>
조선 7대 세조(世祖, 1417~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83)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의 자연 박물관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세조는 1452년 단종 즉위 후 다음해 1453년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455년 단종에게서 왕위를 건네받았다.

<광릉의 숲은 세조의 유언대로 조선왕조 내내 풀 한 포기도 뽑지 못하게 할 정도 잘 보호되어 오늘날에는 천연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 박물관이 되고 있다>
밖으로는 국력을 크게 강화해 두 차례나 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회유하였고, 안으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술(纂述)하고 편찬(編纂)을 시작하는 등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는 많은 치적을 쌓았다.

<정희왕후 능역에서 바라본 정자각. 광릉은 참도가 없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다>

<광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동원이강릉으로 조영된 첫 왕릉이다>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尹?)의 딸로 11세 때 가례를 올려 슬하에 의경세자(추존되어 덕종), 예종(睿宗), 의숙공주를 두었다.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하고,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여 1년 2개월 만인 20세에 승하하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13세의 자산군(者山君, 成宗)을 왕위계승권자로 지명하여 당일로 즉위시키고 7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독려했던 일화나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청정 등 정희왕후는 강인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1483년 춘추 66세로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였다.
|
|
 |
|
 |
 |
|
 |
| 태그 : 경국대전 | 광릉 | 세조 | 수목원 | 조선왕릉 | 축석고개 | w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
 |
조선왕릉의 비밀... 소경원,의령원,효창원,회묘
1월 1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문화재 향기 |
 |
| |
|
|

소경원 (비공개)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길(원당동) 산 37-1 (서삼릉내 위치)
서삼릉 가는길 | 서울시내 → 구파발 → 삼송리 검문소에서 좌회전(삼송역) → 농협대학 지나서 이정표
< 소경원 | 昭慶園 >

조선 16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의 원이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큰아들이자 효종의 형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9년간 심양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명의 멸망을 직접 목도한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는 인조의 의심을 샀다.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하였으나 급사하였다. 부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하고,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두 아들이 사망했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하였으나 고종 때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 의령원 | 懿寧園 >

조선 21대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큰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52)의 원이다. 의소세손은 태어난 다음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 추계예술대학, 중앙여고 자리)에 묻혔다가 1949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효창원 | 孝昌園 >

조선 22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86)의 원이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에 장사지내 효창묘라 했다가 효창원으로 바꾸었다. 효창원이 있어 그 일대가 효창공원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회묘 | 懷墓 >

조선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1445~82)의 묘이다. 한미한 양반집안의 딸인 윤씨는 집안이 궁핍해지자 궁에 들어왔다. 성종보다 열두 살 연상이지만 빼어난 미모로 1473년(성종 4) 숙의에 봉해졌고, 원비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해 연산군을 낳았으나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의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1489년 묘비조차 없던 윤씨의 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했다.성종이 1494년 승하하고 그 국장기간에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1504년 연산군은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호를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다. 능의 석물 또한 왕릉의 형식을 따라 조성하게 하고, 제향 절차를 종묘에 위패를 모신 역대 왕의 제사 절차에 맞추도록 했다.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지만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다. 조선 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석인과 문석인, 호석과 양석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회묘는 원래 서울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경희대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 | |
|
 |
|
 |
 |
|
 |
| 태그 : 소경원 | 회묘 | 효창원 | 의령원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 영원
1월 1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문화재 향기 |
 |
| |
|
|
영원 (비공개)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홍유릉내 위치)
영원(홍유릉) 가는길 : 서울시내 -> 내부순화도로 -> 북부간선도로 -> 춘천방향 -> 남양주시청방향 -> 이정표
< 영원 | 英園 >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과 방자비의 합장묘이다. 영친왕의 이름은 은(垠)이며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영왕(英王)에,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1년 얻은 아들 진(晉)은 다음해 한국 첫 방문길에 잃고, 1931년 둘째 아들 구(玖)를 얻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으로 불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방자비와 함께 귀국했다.


영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에 있다.이 외에 홍유릉 능역 안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의 소생인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의 묘,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光華堂, 1887~1970) 이씨의 묘,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三祝堂, 1890~1972) 김씨의 묘, 고종과 후궁 귀인 양씨의 딸인 덕혜옹주(1912~89)의 묘, 그리고 의친왕 계비인 수인당 묘가 있으며, 영친왕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이 최근 2005년 조성되어 있다.
| |
|
|
 |
|
 |
 |
|
 |
| 태그 : 마지막황태자 | 고종 | Gay Lesbian and Bisexual | Google | 영원 | 영친왕 | 조선왕릉 | Media | Spam | Twitter | United States | Washington DC | Witeck-Combs Communications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조선왕릉의 비밀... 영휘원,숭인원
1월 1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문화재 향기 |
 |
| |
|
| |
|
 |
|
 |
 |
|
 |
| 태그 : 숭인원 | 영휘원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