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궁궐 이야기....창덕궁 성정각 권역
9월 2,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창덕궁-성정각 권역
성정각誠正閣 권역 궁궐


5-h-1 영현문迎賢門
위치와 연혁 : 지금은 내의원이라 부르는 성정각의 남문이다. 『궁궐지』의 「창덕궁·성정각」조에 “성정각은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다. 그 곳의 남문을 영현문이라 한다.”<원전 1>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정각이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었다는 것은 문의 편액을 해석할 때 도움이 되는 중요한 단서이다.
뜻풀이 : ‘영현(迎賢)’이란 ‘어진이를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세자가 공부하는 장소이므로, 어진이를 맞아들여 공부에 힘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제작 정보 : 지금 영현문 안쪽 본채에는 현판이 붙어 있지 않고,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란 편액과 함께 마당에 약을 찧는 절구가 있으므로 내의원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것은 순종 때의 일시적 조치였으므로 성정각으로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5-h-2 보춘정報春亭

위치와 연혁 :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남향하여 붙은 현판이다. 『궁궐지』에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원전 2>라고 하였다. 『동궐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뜻풀이 : ‘보춘(報春)’은 ‘봄이 옴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고 성정각이 춘궁(春宮: 왕세자)이 독서를 하는 곳이므로 ‘춘(春)’ 자가 중의적으로 쓰인 듯하다.
5-h-3 희우루喜雨樓

위치와 연혁 :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동쪽을 향해 붙은 현판이다. 『궁궐지』에서는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원전 3>라고 하였고, 『동궐도』에서도 비슷하게 기록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1) 54권에 「희우루지(喜雨樓志)」가 있다.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정유(1777, 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자 마침 비가 내렸고, 또 몇 개월 동안 가물다가 이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다시 비가내려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지어 기념했다는 내용이다.<원전 4>

뜻풀이 :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喜雨]는 뜻이다. 송나라 소식(蘇軾,1036~1101년)이 「희우정기(喜雨亭記)」2)를 지은 이래 ‘희우’는 정자의 이름으로서 각지에서 애용되었다. 창덕궁 주합루 뒤에도 희우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제작 정보 : ‘喜(희)’ 자는 속자로 써서 하반부 점획(點劃)이 하나 생략되었으며 ‘樓(루)’ 자도 속체로 써서 정자(正字)와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5-h-4 집희緝熙
위치와 연혁 : 예전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관물헌(觀物軒) 건물에 걸려 있는 어필 현판이다. 『동궐도』에는 지금의 이름이 아니라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년)가 세자로 책봉된 다음 이 곳에서 서연(書筵) 3)을 한 일이 있고, 1874(고종 11)년에는 순종이 이 곳에서 탄생하였다. 1884(고종 21)년 갑신정변 때에는, 사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 수비가 용이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개화파가 고종을 모시고 이 곳으로 피신하여 청나라 군사들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뜻풀이 : ‘집희(緝熙)’란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緝熙]는 의미이다. 『시경』 「대아(大雅)·문왕(文)」편 4)에 “심원하신 문왕이여, 아! 계속해서 밝히시고 공경하시도다.”<원전 5>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주자(朱子, 1130~1200년)는 “집(緝)은 이어지는 것이요, 희(熙)는 밝은 것으로 또한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원전 6>라고 하여 ‘임금[文王]의 밝은 덕이 계속하여 빛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한편 경희궁(慶熙宮)에도 집희당(緝熙堂)이 있었는데, 영조는 「집희당시(緝熙堂詩)」를 지어 “이 전각은 옛날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어 날로 더욱 친하도다.”<원전 7>라고 읊었다. 집희당은 본래 세자의 거처이고 그 뜻이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繼續光明)’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제작 정보 : 집희라는 현판에 ‘갑자년(甲子年)’, ‘어필(御筆)’이라 덧붙여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재위하는 동안 갑자년이 들었던 영조·순조·고종 가운데 어느 임금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종이 즉위 원년에 15세의 나이로 글씨를 썼으므로 다소 서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5-h-5 조화어약調和御藥·보호성궁保護聖躬

위치와 연혁 : 현재 성정각 앞 행각에 ‘조화어약’과 ‘보호성궁’이란 편액이 나란히 북쪽을 향하여 걸려 있다. 본래 창덕궁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의 약방 자리에 있었다. 고종 때 내의원을 전의사(典醫司)로 개편하였고, 순종 때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내의원이 헐리어 현판과 도구들을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뜻풀이 : ‘조화어약(調和御藥)’은 ‘임금이 드시는 약을 조제한다’는 의미이다.
‘보호성궁(保護聖躬)’은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성(聖)’은 임금을 뜻하며 ‘궁(躬)’은 몸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근래에 나온 일부 책에서 이 현판들을 정조의 어필이라고 본 경우도 있지만, 임금이 스스로 ‘보호성궁’이라고 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경지략』에서는 원해진(元海振)이 ‘화제어약(和劑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여덟 글자를 썼다고 했다.<원전 8> ‘화제어약’은 ‘조화어약’을 착오로 잘못 쓴 것으로 보이며 원해진은 인적 사항 미상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명필로 유명한 원진해(元振海, 1594~1651년)를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5-h-6 자시문資始門

위치와 연혁 : 중희당(重熙堂)의 서쪽에 위치했던 문이다. 지금은 중희당이 없으므로 마치 관물헌, 즉 집희의 출입문처럼 되어 있다. 『궁궐지』에는 “중희당이 관물헌 동쪽에 있는데, 1782(정조 6)년에 건립되었고, 동쪽이 중양문(重陽門), 서쪽이 자시문이며, 편액은 정조의 어필이다.”<원전 9>라고 되어 있다.
뜻풀이 : ‘자시(資始)’는 ‘만물이 힘입어 비롯한다’는 의미이다. 『주역(周易)』에서 나온 말로 건괘(乾卦; )의 자시(資始)가 곤괘(坤卦; )의 자생(資生)과짝을 이룬다. 「건」의 단사(彖辭) 5)에,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니[資始], 이에 하늘을 통합하였도다.”라고 했고, 「곤」의 단사에는,“지극하다 곤의 원(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생겨나니[資生], 이에 순히 하늘을 받든다.”라고 했다. 주자의 풀이를 종합하면, ‘건원은 천덕(天德)의 큰 시작[大始]이므로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 모두 이에 힘입는다. 자시의 시(始)는 기(氣)의 시작이고, 자생의 생(生)은 형(形)의 시작이다.’<원전 10>라고 하였다.

제작 정보 : 현재의 현판이 실제 정조가 직접 쓴 글씨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5-h-7 망춘문望春門

위치와 연혁 : 관물헌 뒤의 후원으로 이어진 길가에 남쪽 방향으로 난 문이다.『동궐도』에는 희정당의 동문으로서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있어서 후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되어 있다.
뜻풀이 : ‘망춘(望春)’이란 ‘봄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대로 동향이 되어야 춘(春)의 의미와 어울린다. 망춘은 중국의 수·당 시대 이래로 전각이나 정자의 이름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제작 정보 : 현판에 쓰인 ‘?(망)’은 ‘望(망)’의 속자이다. 동궐도에는 희정당의 동문으로서 동서 방향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남향으로 되어 있어 방향이 전혀 다르다. 지금 망춘문 바로 아래에 현판이 걸리지 않은 문이 동향으로 나있는데, 『동궐도』 상으로는 이 문이 망춘문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자리는 응경문(凝慶門)이 되어야 할 듯하다.
5-h-8 동인문同仁門

위치와 연혁 : 희정당의 동쪽 문으로 경사진 계단 위에 위치해 있다. 현재 집희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뜻풀이 : ‘동인(同仁)’이란 ‘차별 없이 인애(仁愛)를 베풀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인덕(仁德)을 함께 행한다’는 의미도 있다. 동쪽이 오행상 인(仁)에 해당하는 방위이므로 동인이란 의미와 잘 어울린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20에 “이치가 하나로부터 각기 나누어지므로 비록 차별 없이 인애로 대해주나, 스스로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원전 11>고 하였다.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 6)이 쓴 『소서(素書)』의 「안례(安禮)」에서는 “인을 같이하면 서로 근심하고, 악을 같이하면 서로 당파를 짓는다.”<원전 12>라고 하였다.
──────────────────────────
1) 『홍재전서』는 정조의 문집이다. 시문·윤음·교지 및 기타 편저를 모았다.
2) 「희우정기」는 소식이 1062년에 부풍이라는 고을에 관리로 부임했을 때 지은 정자를 희우정이라고 부른 내력을 쓴 글이다.
3) 서연은 황태자나 왕세자를 가르치는 강의를 일컫는다. 강의는 조강, 주강,석강이 있었다.
4) 「문왕」은 대아편의 첫 시로, 문왕이 천명을 받아 주나라를 건설한 것을 기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5) 단사는 단전(彖傳)이라고도 하며,『주역』 64괘의 뜻, 덕, 괘문, 괘명 등을 통괄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6) 황석공은 중국진(秦) 나라 말의 은사(隱士)이자 병법가(兵法家)이다.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를 전해 주었는데, 장량은 이 병서를 읽고서 한나라 고조의 중국 통일을 도왔다고 한다.
<원전 1> 『궁궐지』, “春宮 胄筵之所也. 南曰迎賢門.”
<원전 2> 『궁궐지』, “喜雨樓報春亭, 卽誠正閣之東樓. 東曰喜雨, 南曰報春.”
<원전 3> 『궁궐지』, 보춘정 <원전 2> 참조.
<원전 4> 『홍재전서』 권54, 「희우루지」, “予名新建之樓曰喜雨. 喜雨而名其亭, 古也. 歲丁酉,重建斯樓, 時天旱久, 不雨垂月餘. 工役始而雨,左右曰瑞也, 名斯樓喜雨可乎. 予曰未也, 雨未滂?, 田將蕪矣, 曷云瑞. 又數月而不雨, 左右曰樓成矣. 予命夙駕, 共近臣, 言止于樓, 而天作雲, 沛然下雨. 左右復請以喜雨名斯樓, 予曰可. 顧近臣曰, 歲可大有, 而民樂業, 喜其大矣. 古人之以喜雨名其亭, 欲以志喜雨之喜也. 心而喜喜雨而志之, 則志乎心不忘可已. 惡乎名其亭, 心者已知之, 而人之知弗與焉. 志乎心則己獨喜其喜, 而不與人共喜也. 故喜之大者, 志乎心, 志乎心之不足, 志之於物, 志於物之不足, 遂有亭之名焉.於是乎其喜之志也大矣, 故名斯樓曰喜雨樓云.”
<원전 5> 『시경』 「대아·문왕」편,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원전 6> 주자, “緝續, 熙明, 亦不已之意.”
<원전 7> 영조, 「집희당시」, “此閣古春邸, 堂中寶墨新. 繼續光明也, 尊賢日益親.”
<원전 8> 『한경지략』 「내의원(內醫院)」, “正廳所揭板曰 和劑御藥保護聖躬八字 則元海振書也.”
<원전 9> 『궁궐지』, “重熙堂, 在觀物軒東. 正祖六年壬寅建, 東曰重陽門, 西曰資始門.堂額正祖御筆.”
<원전 10> 『주역』 「건」, “(彖曰)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이 구절에 대한 『본의』의 해석, “此一節者, 釋元義也. 大哉, 歎辭. 元,大也始也. 又爲四德之首而貫乎天德之始終, 故曰統天.”; 『주역』 「곤」, “(彖曰)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이 구절에 대한 『본의』의 해석, “此以地道明坤之義, 而首言元也. 至, 極也.比大義差緩. 始者, 氣之始, 生者, 形之始. 順承天, 施地之道也.”
<원전 11> 『주자어류』, 권20, “理一而分殊, 雖貴乎一視同仁, 然不自親始也不得.”
<원전 12> 황석공, 『소서』 「안례」, “同仁相憂,同惡相黨.”
|
|
 |
|
 |
 |
|
 |
| 태그 : 궁궐 | 성정각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 - 선정전 권역
8월 2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선정전 권역
선정전宣政殿 권역

4-h-1 선정전宣政殿

위치와 연혁 : 인정전의 동편에 있는 임금의 편전이다. 원래 이 곳의 이름은 아침마다 임금에게 정무를 아뢰던 청사(廳舍)라는 뜻의 조계청(朝啓廳)이었는데,1461(세조 7)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이라고 고쳐 불렀다.<원전 1> 편전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렀다. 이 곳은 임금의 집무실이지만 때때로 왕비가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따르면 1471(성종 2)년 가을에 왕비가 이 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고, 1477(성종 8)년과 1493(성종 24)년 봄에는 친잠례(親蠶禮) 1)를 지냈다.
조선 후기에는 편전을 내전의 희정당(熙政堂)으로 옮겨 사용하였다.
선정전은 남아 있는 창덕궁의 건축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조선 중기 건축 재료의 모습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재건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때 또 불에 타 1647(인조 25)년 11월에 인경궁(仁慶宮)을 헐어서 재건하였다. 1803(순조 3)년에 또 불에 타서 이듬해(1804년) 12월에 재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영조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 『소학(小學)』을 토론하여 영조 20년에 『선정전훈의소학(宣政殿訓義小學)』을 간행하기도 했다.


뜻풀이 :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이는 곧 어진 정치를 베푼다는 말이다. '선정'이라는 이름은 6세기 후반 중국남북조 시대에 북주(北周) 2)에서 황제의 연호로 쓰인 적이 있고, 당(唐)나라(618~907년) 때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안에 있던 건물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또 『고려사』에 "왕국모(王國?)가 먼저 고의화(高義和, 1049~1119년) 3)라는 장사로 하여금 이자의(李資義)를 선정문 안에서 베게 하였다."<원전 2>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개경에 선정전(宣政殿)이라는 이름의 궁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h-2 선정문宣政門
위치와 연혁 :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이다. 영조는 직접 선정문에 나아가 궁궐에 물건들을 납품하던 공인(貢人)이나 시전 상인 등을 만나 폐단을 물어 보고 체납된 세금을 감해 준 적이 있다.<원전 3> 정조 역시 선정문에서 공인과 시전 상인들을 불러 모아 민심을 물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폈다.<원전 4>

뜻풀이 :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4-h-1 선정전 참조.
──────────────────────────
1) 친잠례는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양잠의 경제적 중요성을 알리고 장려하고자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거두던 국가적 의례를 말한다.
2) 북주(北周, 556년~581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선비족인 우문씨(宇文氏)가 건국한 왕조이다. 연호로 선정을 쓴 시기는 무제(武帝) 때인 578년 한 해다.
3) 고의화는 고려시대의 무신이다. 헌종 초에 왕위 후계 다툼이 있었는데 이 때 상장군으로 있던 왕국모의 명을 받아 한산후(漢山侯) 균을 받드는 이자의를 죽이고 계림공(鷄林公) 즉 숙종의 즉위를 도왔다. 숙종과 예종 때에 높은 관직에 올랐고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원전 1> 『세조실록』 7年 12月 19日(乙酉), "傳于禮曹曰, 昌德宮朝啓廳稱宣政殿, 後東別室稱昭德堂, 後西別室稱寶慶堂, 正殿稱兩儀殿, 東寢室稱麗日殿, 西寢室稱淨月殿, 樓稱澄光樓,東別室稱凝福亭, 西別室稱玉華堂, 樓下稱光世殿\廣延殿, 別室稱求賢殿."
<원전 2> 『고려사』 권 127 열전, 「이자의(李資義)」, "國?, 先令壯士高義和, 斬資義於宣政門內."
<원전 3> 『영조실록』 33年 正月 5日(丁酉), "上御宣政門, 召見貢市人等, 問弊?, 減久逋."
<원전 4> 『정조실록』 8年 3月 20日(乙巳).
|
|
 |
|
 |
 |
|
 |
| 태그 : 궁궐 | 선정문 | 선정전 | 조선왕릉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_ 궐내각사 권역
7월 2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_ 궐내각사 권역


3-h-1 내각內閣

위치와 연혁 :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이문원(?文院)이라고도 불렀으며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각(內閣)'이라는 현판은 규장각 남문에 붙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규장각을 복원하고서 붙인 것이다.
뜻풀이 : '내각(內閣)'은 '궁궐 내의 중앙 관서'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오래 전부터 쓰여서 중국의 삼국 시대에는 비서각(秘書閣)을 가리켰으며 송나라 때는 태종(976~997년)이 세운 용도각(龍圖閣), 진종(眞宗, 968~1022년)이 세운 장서각인 천장각(天章閣), 인종(仁宗, 1010~1063년)이 세운 보문각(寶文閣) 등을 두루 내각이라고 불렀다. 1) 명나라·청나라 때에는 재상의 관서(官署)를 가리켰다.

제작 정보 : 2001년에 설치하면서 서예가 이동익(李東益)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2 규장각奎章閣

위치와 연혁 : 내각이라고도 하며 왕실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정조(正祖,1752~1800년)가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王室世譜), 보감(寶鑑) 등을 보관·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북원(北苑), 곧 지금의 주합루(宙合樓)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규장각은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 2) 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매월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 출신들을 등용했다. 이런 조치들은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1781년에는 규장각 청사를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또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훗날 병인양요(1866년) 3) 때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었다. 1868(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주합루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고 소장 도서들도 이문원·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시강원(侍講院) 등에 분산되었다. 국권을 빼앗기면서 이 도서는 1911년 조선 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그 후 주무 관청이 몇 차례 바뀌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남았다. 그 도서를 소장·관리하고 연구하는 기관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뜻풀이 :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라는 뜻이다. '규(奎)'는 천체(天體)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 중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문장(文章)'을 상징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임금의 글이나 글씨를 미화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제작 정보 : 지금의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3 옥당玉堂

위치와 연혁 :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다.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 4)의 상징이었다. 일단 홍문관원이 되면 특별한 허물이없는 한 출세가 기약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지제교(知製敎) 5)가 될 만한 문장과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경연관(經筵官)이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그 기구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했다가 1463(세조 9)년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1506(중종 1)년에 복구했다. 1894(고종 31)년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건물은 일제에의해 헐렸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옥당(玉堂)'은 '옥같이 귀한 집'이라는 뜻이다.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집, 또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집이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한편 옥당은 일반 명사로서 궁전의 미칭으로도 쓰이는데 한나라 때 궁전 이름으로 쓰인 적이 있다. 『한서(漢書)』 「이심전(李尋傳)」의 주석에 "옥당전은 미앙궁에 있다."<원전 1>라고 하였다. '옥당'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로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였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한림원(翰林院)의 기능을 '홍문관'과 '예문관'의 둘로 나누어 홍문관을 옥당이라고 하고 예문관은 한림이라고 불렀다.<원전 2>

제작 정보 : 홍문관 건물에 현재 붙어 있는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은 근래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2001년에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긴 것이다. 옛날에 걸려 있던 현판 두 종류가 현재 문화재관리국에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임진년(?) 9월에 이원영(李元英)이 전서(篆書)로 쓴 것으로 유물번호 670번이고, 또 하나는 1699(숙종 25)년 정월 초하룻날에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8~1716년) 6)가 예서(?書)로 쓴 것으로 유물 번호 1000번이다.
3-h-4 예문관藝文館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숭범문과 향실 사이에 위치한 관청이다. 예문관의 출입문은 숭범문 바깥쪽에 이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고, 사초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보관하는 관청이다. 영조가 14년과 32년에 친히 행차하여 각각 '태공사필(太公史筆)', '창수고풍(?守古風)'이란 글씨를 써서 걸었다고 한다. 1811(순조 11)년 화재로 사료와 서적이 모두 불에 탔다.<원전 3> 현재의 건물은 2005년에 복원한 것이다. 영조 어필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뜻풀이 :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이다. 예문은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 7)에 관련된 도서를 총칭하기도 하고 사장(辭章), 문예(文藝)만을 한정하기도 한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5 약방藥房

위치와 연혁 : 내의원(內醫院)으로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이다.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설치되었다가 1443(세종 25)년부터 내의원이라고 했다. 약방은 인정전 서쪽 행각에 가까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병을 가까이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의원을 내의사(內醫司), 궁 밖에 있는 의료 기관인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를 외의사(外醫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약방의 역할을 나타내는 '調和御藥(조화어약)', '保護聖躬(보호성궁)'의 현판이 현재는 옛 성정각(誠正閣)의 남쪽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고 약절구도 그 마당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純宗, 1874~1926년)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내의원이 헐리고, 현판들과 의약 도구들이 옮겨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도구들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 때 성정각이 내의원의 기능을 맡게 된 듯하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약방(藥房)'은 '약을 짓는 방'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6 양지당養志堂

위치와 연혁 : 선원전과 인정전 사이에 있으며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하던 집이다.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했다. 임금의 초상화나 임금이 쓴 글씨를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없어졌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

뜻풀이 : '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건물의 기능으로 보아 선원전에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이 곳에 머물며 '고상하고 엄숙한 뜻을 배양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 정보 :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7 억석루憶昔樓
위치와 연혁 : 선원전 남행각에 위치한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원전 4> 이로 보아 억석루는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자편(?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뜻풀이 :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이며, 『한경
지략』의 기록에 따르면 약을 최초로 발명한 신농씨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제작 정보 :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3-h-8 운한문雲漢門

위치와 연혁 : 내각 안에 있는 봉모당(奉謨堂)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뜻풀이 : '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역복(?樸)」8) 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하늘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도다."<원전 5> 「대아(大雅)·운한(雲漢)」 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빛이 하늘을 따라 돌도다." 라는 용례들이 보인다.<원전 6> '운한'에는 '하늘', '임금의 아
름다운 덕'이라는 뜻도 있으며, 특히 '제왕의 필묵'이라는 뜻도 있어 봉모당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3-h-9 봉모당奉謨堂

위치와 연혁 :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1776(정조 즉위)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 때 본래 이 곳에 있었던 역대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지었다.<원전 7>
봉모당은 다시 1857(철종 8)년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의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이는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 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했다. 1911년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지금의 봉모당은 소유재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1969년7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뜻풀이 : '봉모(奉謨)'는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모훈이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사를 논의하여 적은 글' 또는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등의 편명에서 용례를 볼 수 있다.
3-h-10 책고冊庫

위치와 연혁 : 봉모당 뒤쪽에 세 채가 있으며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뜻풀이 : '책고(冊庫)'는 '책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뜻으로 '서고(書庫)'라는 말과 같다.
제작 정보 : 현재의 현판은 최근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새롭게 붙인 것이다. <동궐도>에 '책고(冊庫)'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건물의 기능 또는 용도를 기록한 것이지 현판이 곧 '책고'라고 쓰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3-h-11 검서청檢書廳

위치와 연혁 : 규장각의 검서(檢書)들이 입직(당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이 검서들은 입직을 해야 했다. 이들은 번갈아서 임금의 갑작스런 하문에 대비하고자 밤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입직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이다. 현재의 검서청은 규장각의 서쪽에 있으며 순종 때 대유재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뜻풀이 : '검서(檢書)'는 '서적을 점검한다'는 뜻이다.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가리킨다.
──────────────────────────
1) 조선 규장각의 근무 규정 또한 송나라의 용도각, 천장각의 규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2) 근시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를 말한다.
3) 1866년 대원군이 천주교를 금한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보복하고자 프랑스 군이 공격한 사건이다.
4) 청요직은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아울러 가리킨다. 청환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만 시키던 벼슬로, 규장각·홍문관·예문관 등이다. 봉록은 낮으나 뒤에 고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다.
5) 지제교는 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이다. 조선 후기에는 홍문관 관원이 내지제교를,규장각 관원이 외지제교를 맡았다.
6) 김진규의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이다. 인경왕후의 오빠. 송시열의 문하로 숙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붕당정치 속에 등용과 파직되기를 여러 번 했다. 문장과 전서·예서, 그림에 뛰어났다.
7) 육예는 고대 중국에서 고급관료의 자제가배우던 6종의 교양는 예용(禮容), 악(樂)은 주악(奏樂), 사(射)는 궁사(弓射), 어(御)는 마술(馬術), 서(書)는 서사(書寫),수(數)는 산수(算數)를 의미한다.
8) 「역복」은 주나라 문왕의 치덕으로 훌륭한 신하들이 모여듦을 비유하여 노래했다.「운한」은 가뭄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임금이 하늘에 간곡히 기도를 올리는 내용이다.
<원전 1> 『한서』 「이심전」, "玉堂殿在未央宮."
<원전 2 > 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經世遺表)』 권1, 「춘관예조·홍문관(春官禮曹·弘文館)」"中國之制, 翰林謂之玉堂, 乃吾東分而二之, 弘文館稱玉堂, 藝文館稱翰林."
<원전 3> 『궁궐지』 "藝文館, 在仁政殿西月廊.英宗十四年戊午, 親臨藝文館, 特書太公史筆四字, 揭于楣. 三十二年丙子, 親書?守古風四字,揭于館中. 純宗十一年辛未, 災古來史籍, 盡入燒燼, 後重建, 一在昌慶宮明政殿, 掌制撰辭命."
<원전 4> 『한경지략』 「내의원(內醫院)」, "命內局所 祭神農氏位板 設欌于大廳 以致敬焉. 又御書入審憶昔四字 揭扁."
<원전 5> 『시경』 「대아·역복」, "倬被雲漢 爲章于天."
<원전 6> 『시경』 「대아·운한」, "倬彼雲漢 昭回于天."
<원전 7> 『정조실록(正祖實錄)』 즉위년 9월 25일(癸巳) 조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 1권 「경도(京都)」 편에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
|
 |
|
 |
 |
|
 |
| 태그 : 내각 | 검서청 | 봉모당 | 궁궐 | 궐내각사 | 규장각 | 약방 | 양지당 | 억석루 | 예문관 | 옥당 | 운한문 | 조선왕릉 | 창덕궁 | 책고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 창덕궁_ 인정전 권역
7월 2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창덕궁_ 인정전 권역


2-h-1 인정전仁政殿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곳이다.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 곳을 이용했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정했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정전은 1405(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1428(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9(광해군 원)년에 중건했다. 1803(순조 3)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이듬해인 1804(순조 4)년에 재건하였고, 1857(철종 8)년에는 낡아서 다시 고쳐 지었다.


뜻풀이 :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仁政)'은 특히 『맹자(孟子)』에서 강조하는 정치 사상이다. 『맹자』에서는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1)을 비롯하여 무려 10군데에 걸쳐 '인정'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인정은 바로 맹자가 강조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공자가 가장 중요시한 인(仁)에서 비롯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2-h-2 인정문仁政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출입문이다. 인정문은 1405(태종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1744(영조 20)년 10월에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났을 때 옮겨 붙어 좌·우 행각과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 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1803(순조 3)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된 일이 있는데, 인정문도 그 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가 인정문과 그 주위 행랑을 왜식(倭式)으로 일부 변형했으나 1988년 현재와 같이 원상을 회복하였다.
인정문은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로 그 의미가 큰 곳이다. 왕세자는 앞 임금이 별세한 궁궐의 빈전(殯殿: 왕의 빈소)에서 옥새를 받고 그 궁궐의 정전이나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앞 임금이 창덕궁에서 별세할 경우 다음 임금은 인정전이나 인정문에서 즉위한 것이다. 특히 즉위식은 인정전보다는 주로 인정문에서 치러졌다.
뜻풀이 : 2-h-1 인정전 참조.
2-h-3 진선문進善門

위치와 연혁 :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위치한다. 진선문 앞에는 금천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1409(태종 9)년부터 진선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창덕궁이 창건될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度支部) 2)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할 때 헐렸다가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른다. 태종대와 영조대에는 이 곳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뜻풀이 : '진선(進善)'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정전이 임금의 정전(正殿)이므로 진선문을 통하여 바른 말을 올리거나 인재를 천거하여 임금이 바르게 되고 바른 교화[正敎]가 펴지기를 기원하는 이름이다. 전자의 용례로 『후한서』 「채무전(蔡茂傳)」에서는 "교화를 일으킴은 반드시 착한 말을 올리는 데서 연유한다."라고 하였다.<원전 1> 후자의 용례로 한나라 때 반고(班固, 32~92년) 3)가 편찬한 『백호통의(白虎通義)』의 「고출(考黜)」 편에서 "현명한 사람이 많으면 훌륭한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면 악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원전 2>

제작 정보 : 본래의 현판은 정난종(鄭蘭宗, 1433~1489년) 4)의 글씨인데, 1999년 복원하면서 서예가 정도준이 새로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2-h-4 숙장문肅章門

위치와 연혁 : 인정문 밖 동쪽에 있다. 진선문에서 인정문을 지나 마당을 따라 마주 보이는 문이다. 1475(성종 6)년 문 이름을 지었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 등이 있어서 이 인정문 뜰과 조정 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 의식이 많이 치러졌다. 이 일대는 일제 때 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졌다가 최근 모두 복원되었다.
뜻풀이 : 숙장(肅章)'은 '엄숙하고 문채(文彩)난다'는 의미이다.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원래 현판은 정난종 글씨였는데 최근 복원하면서 정도준이 새로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동궐도』에는 현판이 바깥에 그려져 있어 지금과 다르다. 이를 두고 화공의 실수라고 하기도 하고 잘 보이도록 일부러 바깥에 그렸다는 논란이 있다.
2-h-5 광범문光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동문이다. 동쪽으로 임금의 경호 업무를 맡은 선전관청(宣傳官廳), 승정원, 내시들의 집무실인 내반원(內班院)과 통한다.
뜻풀이 : '광범(光範)'은 '규범을 빛낸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2-h-6 숭범문崇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문이다. 서쪽으로 예문관, 내의원과 통한다.
뜻풀이 : '숭범(崇範)'은 '규범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2-h-7 향실香室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북쪽에 위치한 향청은 의례에 쓰이는 축문과 향을 관리하던 직소이다. 교서관 소속으로 책임직은 충의(忠義)인데,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공신의 자손이 임명되었다. 향관은 참하문관(參下文官)이 맡았고, 이틀에 한 번 숙직하였다. 명종의 신임을 돈독히 받은 상진(尙震,1493~1564년) 5)과 영·정조 때의 문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 6)가 이 곳을 거쳐 정승에까지 오른 일이 유명하다.<원전 3>
뜻풀이 : '향실(香室)'은 '향을 보관하는 방'이란 의미이다.
제작 정보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1) 「양혜왕장구」는 맹자가 여러 제후국을 다니며 왕들과 정치에 대해 대화한 내용을 모은 장이다.
2) 탁지부는 1895년 이후 국가의 재정업무를 총괄하고 지방의 재무를 감독한 중앙부처다.
3) 반고는 『한서』를 편집한 후한 초의 역사 학자다.
4) 정난종의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다. 시호는 익혜(翼惠).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5) 상진의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이다. 1519(중종 14)년 사관(史官)이 되었으며, 이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으로 후대에 크게 칭송을 받았다.
6) 박세채는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소론의 영수로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탕평론을 강조하여 영·정조대 탕평책 시행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원전 1> 『후한서』 「채무전」, "興化致敎, 必由進善."
<원전 2> 반고, 『백호통의』 「고출」, "多賢乃能進善 進善乃能退惡."
<원전 3> 『한경지략』, "香室, 在仁政殿西, 掌書各祭享祝文及封香, 其官名忠義, 以功臣子孫爲之, 而香官則以參下文官爲之, 更日直宿. 案, 朴南溪世采, 曾經香室忠義, 尙政丞震, 以香官拜相, 故香室先生中, 今稱道." |
|
 |
|
 |
 |
|
 |
| 태그 : 광범문 | 궁궐 | 숙장문 | 숭범문 | 향실 | 인정전 | 조선왕릉 | 진선문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_ 궁문
7월 1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궁문

1. 궁문宮門


1-h-1 돈화문敦化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남쪽 정문이다. 남아 있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1405(태종 5)년 창덕궁을 짓고 나서 몇 년 후인 1412(태종 12)년 5월에 세웠다.<원전 1> 1451(문종 즉위)년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중창(重創)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8(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세웠다.
뜻풀이 : '돈화(敦化)'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용(中庸)』에서 처음 나왔다. 『중용』 30장에서 "만물이 함께 길러져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함께 이루어져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요 큰 덕은 교화를 돈독하게 하니[敦化], 이는 천지가 위대해지는 것이다."라고했다. <원전 2>
중국 후한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정현(鄭玄, 127~200년) 1)은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어서 새싹들을 적셔 주니 제후에게 비유한 것이다. 큰 덕은 교화를 돈독하게[敦化] 하여 만물을 두텁게 자라게 하니 천자에게 비유한 것이다."<원전 3>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학자 공영달(孔穎達, 574~648년) 2)은 소(疏)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지으신 것은 제후의 작은 덕으로써 말하자면 냇물의 흐름이 새싹들을 적셔 주는 것과 같고, 천자의 큰 덕으로써 말하자면 인애(仁愛)가 두터워서 만물을 변화·생성시키는 것이다."<원전 4>라고 했다.
즉 '돈화'는 원래 『중용』에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쓰였고,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제작 정보 : 1412(태종 12)년 9월에 돈화문의 문루(門樓)에 동종(銅鍾)을 걸었는데 이 때 당대의 이름난 문인인 변계량(卞季良, 1369~1430년) 3)이 종의 명문[鍾銘]을 지었다. 그러나 변계량의 문집인 『춘정집(春亭集)』에는 이 글의 제목을「광화문종명(光化門鍾銘)」이라고 잘못 써 놓았다.
1-h-2 금호문金虎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서쪽 궁장에 있는 문이다. 승정원(承政院)의 승지나 홍문관(弘文館)의 교서관(校書館) 등 궁중 관서 벼슬아치들이 다니던 문이다. 한성의 역사가 담긴 책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창덕궁(昌德宮)」 조에 따르면"서쪽이 금호문인데, 편액은 성임(成任, 1421~1484년) 4)이 썼다. 조정의 신료[朝臣]들은 모두 이 문으로 출입하는데, 사헌부의 대관(臺官) 5)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한다. 해가 저물어 문을 잠그면 당직 관리가 반드시 가서 확인한다."<원전 5>고 하였다.

뜻풀이 : '금호(金虎)'는 '금 호랑이'라는 의미이다. '금(金)'은 오행 사상에서 서쪽을 가리키고, '호(虎)' 또한 서방(西方) 백호(白虎)를 가리키므로 서문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회남자(淮南子)』6) 가운데 하늘과 땅을 포함한 만물의 형성 과정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천문훈(天文訓)」 편에 "서방은 금(金)이다. 임금으로는 소호(少昊)이고 ... 신으로는 태백(太白)이며, 짐승으로는 백호요, 음으로는 상(商), 날로는 경신(庚辛)일에 해당한다."<원전 6>라고 하였다. 즉 백호는 서방을 상징하는 동물인 것이다.
1-h-3 단봉문丹鳳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돈화문의 동편 궁장에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조에, "남쪽의 오른편이 단봉문이다. 동쪽으로 건양문이 있고, 이 문 동쪽으로는 창경궁이다."<원전 7>라고 했다. 단봉문은 본래 종친부의 왕족및 친·외척과 상궁이 출입하던 문으로 무관인 선전관(宣傳官)이 개폐를 관리했다. 이 문은 함부로 여닫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1476(성종 7)년 6월에 병조(兵曹)의 사령(使令) 정연부(鄭延夫)가 문이 잠긴 후에 제멋대로 열자, 이를 교대시(絞待時: 교수형)의 율로 다스린 일이 있다. 또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 1748~1781년) 7)이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숙위대장이 된 다음 한밤중에 이 문을 드나들어 문제가 된 일이 있다.
뜻풀이 : '단봉(丹鳳)'은 '붉은 봉황새'란 의미이다. 단봉에는 여러 가지 뜻이있다. 글자 그대로는 머리와 날개 끝이 붉은 봉황새를 말하지만, 조서를 전달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키기도 하며, 도성과 조정을 일컫기도 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은 이름인 듯하다. 중국에도 '단봉'으로 이름 지은 건물이 많이 있다.
1-h-4 요금문曜金門

위치와 연혁 : 창덕궁의 서북쪽 담장에 난 문이다. 요금문은 궁중의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이다. 무관인 선전관이 개폐를 관리한다. 희빈(禧嬪) 장씨(張氏, ?~1701년)의 무고로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년) 8)가 쫓겨날 때 이 문을 지난 일이 있다.
뜻풀이 : '요금(曜金)'은 '금빛이 빛난다'는 의미이다. '요(曜)'는 빛난다는 뜻이고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과 가을을 상징하므로 서문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제작 정보 : 원래 현판의 글씨는 성종 때 판결사(判決事) 신자건(愼自健,1443~1527년) 9)이 썼다. <원전 8> 그의 글씨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서예에 뛰어났고, 성종도 그의 글씨에 감탄해 요금문 편액을 쓰게 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현판은 중건 이후에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1-h-5 건무문建武門

위치와 연혁 : 농산정의 북쪽 담장에 딸린 문이다. 이 문의 바깥으로 성균관대학교 운동장과 금잔디광장이 보인다.
뜻풀이 : '건무(建武)'는 무(武)를 세운다는 의미이다. '무(武)'는 오행에서 북방의 현무(玄武)를 뜻하므로 북문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제작 정보 : 편액이 문의 안쪽에 달려 있다. 필사자를 알 수 없고, 칠이 되어 있지 않다.
──────────────────────────
1) 정현. 자는 강성(康成). 유가 경전연구에 힘써, 옛 문장들을 새롭고 쉽게 풀었다. 훈고학의 시조로 존경을 받았다.
2) 공영달은 당초기의 학자이다. 문장·천문·수학에 능통했다.
3) 변계량. 자는 거경(巨卿),호는 춘정(春亭). 고려 말·조선초의 문신이다. 문장이 뛰어나『태조실록』 편찬,『고려사』 개수작업에 참여했다.
4) 성임은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 안재(安齋), 시호는 문안(文安).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5) 사헌부 대관은 고려·조선 시대에 탄핵, 감찰 등을 담당한 관료다.
6) 『회남자』는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책으로 도가와 음양오행,유가, 법가 사상 등이 반영되어 있다.
7) 홍국영은 영조때 등용되어 벽파가 세손(정조)을 해하려는 음모를 막아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 실권을 잡자 반대파 못지 않은 세도를 휘둘렀다.
8)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계비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문제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났다가 1694년 복위하였다.
9) 신자건의 자는 표직(杓直),호는 송재(松齋),본관은 거창(居昌)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서예에 전념했다.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깊이 터득하였다.
<원전 1> 『태종실록(太宗實錄)』 12년 5월 22일(乙巳), "都城左右行廊成. 自闕門至貞善坊洞口,行廊四百七十二間, 進善門之南, 建樓門五間, 名曰敦化."
<원전 2> 『중용』,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원전 3> 위 구절에 대한 정현의 주, "小德川流,浸潤萌芽, 喩諸侯也. 大德敦化, 厚生萬物, 喩天子也."
<원전 4> 위 구절에 대한 공영달의 소, "孔子所作春秋, 若以諸侯小德言之, 如川水之流, 浸潤萌芽, 若以天子大德言之, 則仁愛敦厚, 化生萬物也."
<원전 5> 『한경지략』 「창덕궁」, "西曰金虎門, 額成任書, 朝臣多由此門出入, 而臺官則必由敦化正門出入. 金虎門下?後, 入直注書, 必往考門?."
<원전 6> 『회남자』 「천문훈」, "西方金也, 其帝少昊, 其佐?收, 執矩而治秋, 其神爲太白, 其獸白虎, 其音商, 其日庚辛."
<원전 7> 『한경지략』 「창덕궁」, "南右曰丹鳳,東曰建陽, 此門以東, 昌慶宮也."
<원전 8> 『한경지략』 「창덕궁」, "又西曰曜金,成宗朝, 命判決事愼自健書門額."
|
|
 |
|
 |
 |
|
 |
| 태그 : 단봉문 | 돈화문 | 건무문 | 궁문 | 궁궐 | 금호문 | 요금문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
7월 7,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창덕궁
창덕궁昌德宮, 지금에 이르기까지

태종(太宗, 1367~1422년)이 경복궁이 아닌 별도의 이궁(離宮)을 세우도록 명하여 1405(태종 5)년에 완성한 것이 창덕궁이다.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종은 바로 한양의 경복궁으로 돌아왔으나, 경복궁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경복궁은 왕자의 난을 겪은 피의 현장이기 때문에 기피했다고도 알려진다. 그러나 부왕인 태조(太祖, 1335~1408년)가 건설한 법궁(法宮) 1)인 경복궁을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창덕궁에 주로 머물면서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거나 상왕인 정종(定宗, 1357~1419년)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푸는 등의 주요 행사는 경복궁에서 했다. 어쨌거나 실록에서는 태종이 경복궁으로 행차한 것을 '이어(移御)'라고하고 창덕궁으로 간 것을 '환어(還御)'라고 한 것으로 보아 창덕궁이 태종의 주된 거주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궁이 완성되고 궁의 이름은 창덕궁으로 정했으나 이 때까지는 아직 궁궐로서의 여러 시설들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태종 연간에는 건물이 계속 세워졌다. 즉, 궁 안 여기저기에 누각과 연못 등을 조성하고 석교(石橋)를 만들었으며, 1412년에는 비로소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세조(世祖, 1417~1468년) 가 즉위하고서는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내 각 건물의 명칭을 고쳤는데, 이 때 고쳐진 전각들의 이름이 대체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조선 전기에는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므로 창덕궁은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성종(成宗, 1457~1494년)이 즉위하고부터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년)은 재위 중 주로 이 궁에서 정사를 보면서 실정(失政)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왕들이 이 궁의 정전에서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일도 점점 잦아졌다.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과 경복궁·창경궁 등 조선 왕조의 3대 궁궐은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세 궁궐 가운데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에 들어가 1609(광해군 1)년에 중건되었다. 곧이어 창경궁도 복구되었지만 경복궁만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7(고종 4)년에 가서야 중건되었다. 따라서 창덕궁은 임진왜란 뒤 중건되면서부터는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을 대신하여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 무대가 되었다.

창덕昌德의 뜻풀이
'창덕(昌德)'은 '성(盛)한 덕'이라는 뜻이다. '창(昌)'은 '밝다', '선하다', '창성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 1) 법궁(法宮)은 정궁(正宮)이라고도 하며, 왕이 공식적으로 정사를 보는 궁을 일컫는다. 법궁 이외에 따로 세운 궁을 이궁(離宮)이라고 한다.
|
|
 |
|
 |
 |
|
 |
| 태그 : 궁궐 | 태종 | 세계문화유산 | 현판 | 유네스코 | 주련 | 창덕궁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경복궁--집옥재 권역
6월 29,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경복궁--집옥재 권역

14-h-1 집옥재集玉齋

위치와 연혁 : 건청궁 서편에 있는 건물이다. 1881(고종 18)년에 창덕궁 함녕전(咸寧殿)의 북별당(北別堂)으로 지었으며,<원전 1> 1891(고종 28)년에 경복궁 보현당(普賢堂) 1) 뒤쪽으로 이건(移建)하였다.<원전 2> 2층 건물인 집옥재는 도서관으로 쓰였다. 집옥재의 장서 목록인 『집옥재서적목록(集玉齋書籍目錄)』(奎 11676)이 현재 규장각에 남아 있어, 집옥재에 소장되었던 도서의 종류와 분량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집옥재서적목록』은 1908(隆熙 2)년 규장각 분과규정(分課規程)이 제정됨에 따라 도서과(圖書課)에서 왕실의 여러 도서들을 모아 황실 도서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집옥재의 장서를 규장각에서 인수할 때에 작성한 것이다.
뜻풀이 : '집옥(集玉)'은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는 뜻이다. 집옥재는 수많은 도서를 모아 놓은 서재의 기능을 하였으므로 '옥처럼 귀한 서책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제작 정보 : 현판의 좌측에 서사자(書寫者)를 나타내는 '미원장(米元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미원장은 북송의 서예가인 미불 3)을 일컫는다.
14-j-1 집옥재集玉齋의 주련

위치와 연혁 : 집옥재 정면의 여섯 기둥에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1) 灑潤含膏 雲氣多壽 (쇄윤함고 운기다수)
촉촉이 젖어 기름지니 운기(雲氣)는 장수하게 해 주고,
(2) 稱物納照 鏡心彌光 (칭물납조 경심미광)
만나는 사물마다 비추어 주니 거울은 더욱 밝도다.
집옥재의 이름 중에서 '옥(玉)'의 '온윤(溫潤)'한 덕목을 설명한 것이다. 촉촉이 비를 내리는 구름처럼 임금께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고,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임금 또한 사리를 밝게 판단하여 정치를 잘 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운기다수(雲氣多壽)'는 구름 기운에는 사람을 장수하게 하는 성질이 있다는 말로, 당나라 때 학자 단성식(段成式, 803?~863년) 4)의 『유양잡조(酉陽雜俎)』 「광지(廣知)」편에 나온다.<원전 3> '칭물납조(稱物納照)'는 모든 사물들이 고루 햇빛을 받는다는 의미로, 서진(西晋) 시대의 문인 육기(陸機, 260~303년) 5)의 「연연주오십수(演連珠五十首)」에 보인다.<원전 4>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인 '王杰(왕걸)'이라는 이름과 '王偉人印(왕위인인)'이란 사각의 음각 도장이 새겨져 있다. 왕걸(王杰, 1725~1805년) 6)은 청나라 때의 문인으로 조맹부의 서법에 능했다.
뜻풀이 :
(3) 玉樹陵소 雲煙煥采 (옥수능소 운연환채)
아름다운 나무가 하늘에 솟으니 안개구름 찬란히 빛나고,
(4) 寶花留硏 筆墨生香 (보화류연 필묵생향)
귀한 꽃이 벼룻가에 머무니 필묵(筆墨)에 향기가 나도다!
집옥재 주위의 아름다운 풍광과 집옥재 안에 소장된 귀한 서화 작품과 문방구들을 표현한 구절이다.
앞 구절에서 '옥수(玉樹)'는 진귀한 보석으로 만든 나무, 또는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뛰어난 인재를 비유하기도 한다. '능소(陵?)'는 하늘에까지 솟는 것을 의미하며 능소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뒤의 구절에서 '보화(寶華)'는 귀중한 꽃을 의미하며 혹 모란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연(硏)'은 '연(硯)'과 통용되었으며, 꽃이 벼룻가에 머문다는 것은 벼루에 꽃이 새겨진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張國華(장국화)'라고 적혀 있고 아래에 사각의 도장이 찍혀있으나 정확한 판독이 어려워 누구인지는 미상이다.
뜻풀이 :
(5) 西山朝來 致有爽氣 (서산조래 치유상기)
서산에 아침이 되니 상쾌한 기운이 이르고,
(6) 太華夜碧 人聞淸鐘 (태화야벽 인문청종)
태화산(太華山)에 밤 깊으니 맑은 종소리를 듣도다!
집옥재의 맑고 깨끗한 분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앞 구절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 338?~386?년) 7)가 자신의 근무 태만을 지적하는 상관 환충(桓?, 328~384년)에게 대답한 구절이다. 자신은 벼슬에 뜻이없고 속세를 훌쩍 초월하였음을 은유한 구절이다.<원전 5>
아래 구절은 당나라 때 시인인 사공도(司空圖, 837~908년) 8)의 시론서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에서 뽑은 것으로, '고고(高古)'라는 풍격을 설명한 내용이다.<원전 6> 태화산(太華山)은 중원의 오악(五岳) 중 서악으로 꼽히는 산이다.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의 남쪽에 있으며 화산(華山)이라고도 부른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인 '옹방강'이라는 이름과 '담계'라는 사각 도장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색깔이 칠해져 있지 않아, 세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청의 문인 옹방강은 김정희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문인들과 많은 교유를 하여 조선의 청조학 수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h-2 협길당協吉堂

위치와 연혁 : 집옥재의 동쪽에 집옥재와 붙어 있다. 협길당이 지어진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1881(고종 18)년에 함녕전의 별당으로 집옥재를 지을 때 같이 지었거나,<원전 7> 아니면 집옥재를 1891(고종 28)년에 보현당 뒤쪽으로 이건할 때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원전 8>
경복궁에는 협길당이 두 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68(고종 5)년에 만경전(萬慶殿)의 북행각(北行閣)으로 만들어진 협길당이 그 하나이다.<원전 9> 만경전은 자경전 북쪽, 만화당(萬和堂)의 남쪽에 자리 잡은 건물이었다. 일제 때 나온『궁궐지』에도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원전 10> 그런데 『궁궐지』의 집옥재 항에서도 건물의 동쪽에 협길당이 있다고 기록<원전 11>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협길당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두 채가 되는 것이다. 다만, 『북궐도형』에는 집옥재 동쪽의 협길당만 기재되어 있고 만화당에는 협길당이 없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다.
뜻풀이 : '협길(協吉)'은 '함께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협(協)'은 '함께', '길(吉)'은 '복'을 의미한다.

제작 정보 : 현판은 명나라 말기의 서예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년) 8)의 글씨이다. '吉(길)'자의 윗 부분이 표준 서체는 '士(사)'이지만 여기서는 '土(토)'의 형태를 취했는데, 서법에서 흔히 나타나는 속체이다. '堂(당)'에서 '土(토)' 위에 점을 더한 것도 마찬가지다.
──────────────────────────
1) 보현당은 건청궁 서쪽에 있었던 전각이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현판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미불에 대해서는 곤녕합의 주련 참조.
3) 단성식은 벼슬에있는 동안 왕실 비각(秘閣)의 책을 모두 읽어, 박학(博學)이라고 불렸다.『유양잡조』는 당시
괴이한 사건, 언어,풍속 등을 기술한 책이다.
4) 육기는 오나라 명문가 출신이나 오나라가 망한 후 학문에 전념했다. 팔왕(八王)의 난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다. 수사와 기교가 뛰어난 시로 육조 시대 화려한 시풍을 이끌었다.
5) 왕걸은 섬서(陝西) 한성(韓城)출신으로 자는 위인(偉人), 호는 성원(惺園)·보순(?淳)·외당(畏堂). 1761(건륭26)년 진사에 급제해 벼슬이 동각태학사(東閣太學士)에 이르렀다.
6) 왕휘지는 동진때 사람으로 자는 자유(子猷).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년)의 다섯번째 아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고고하고 얽매임없는 성품으로 일화를 많이 남겼다.
7) 사공도는 산서성(山西省) 하중우향(河中虞鄕) 출신. 869년 진사(進士)에 급제, 벼슬이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그의 시는 기품이 있어 만당의 으뜸으로 꼽혔다.
8) 동기창은 명나라 말기의 문인, 화가 겸 서예가. 자 현재(玄宰), 호 사백(思白)·향광(香光)·사옹(思翁),시호는 문민(文敏).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정쟁을 피해 사임하고 문인 서화가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원전 1> 『일성록』 고종 18년 9월 24일(癸丑),"營建所, 以咸寧殿北別堂堂號, 及集玉齋上樑文製述官·書寫官·懸板書寫官差出, 啓. 咸寧殿北別堂堂號集玉齋, 集玉齋上樑文製述官上護軍金炳始, 書寫官大護軍金元植, 懸板書寫官直提學金永壽."
<원전 2> 『고종실록』 권28, 고종 28년 7월 13일(乙亥), "命寶賢堂改建, 集玉齊移建, 令重建所擧行."
<원전 3> 단성식, 『유양잡조』, 「광지」 편, "山氣多男, 澤氣多女, 水氣多?, 風氣多聾, 木氣多?,石氣多力, 阻險氣多?, 暑氣多殘, 雲氣多壽, 谷氣多痺, 丘氣多狂, 衍氣多仁, 陵氣多貪."
<원전 4> 육기, 『문선』, 「연연주오십수」, "靈輝朝?, 稱物納照."
<원전 5> 『진서(晉書)』 「열전」, 권50, "?嘗謂徽之曰 卿在府日久, 比當相料理. 徽之初不酬答,直高視, 以手版?頰云, 西山朝來, 致有爽氣耳."
<원전 6> 사공도, 「이십사시품」\ 「고고」, "畸人乘眞, 手把芙蓉, 汎彼浩劫, ?然空縱, 月出東斗,好風相從, 太華夜碧, 人聞淸鐘, 虛佇神素, 脫然畦封, 黃唐在獨, 落落玄宗."
<원전 7> 『일성록』 고종 18년 9월 24일(癸丑), "營建所, 以咸寧殿北別堂堂號, 及集玉齋上樑文製述官^書寫官^懸板書寫官差出, 啓. 咸寧殿北別堂堂號集玉齋, 集玉齋上樑文製述官上護軍金炳始, 書寫官大護軍金元植, 懸板書寫官直提學金永壽."
<원전 8> 『고종실록』 권28, 고종 28년 7월 13일(乙亥), "命寶賢堂改建, 集玉齊移建, 令重建所擧行."
<원전 9> 『일성록』 고종 5년 6월 10일, "營建都監以新建各殿堂號及門名別單啓. 別單....(중략)...萬慶殿, 西行閣建和堂, 北行閣協吉堂·?熙堂."
<원전 10> 『궁궐지』, 「경복궁」, "萬慶殿...(중략)...北行閣十八間, 以東有協吉堂, 以西有福熙堂, 及平在門."
<원전 11> 『궁궐지』, 「경복궁」, "集玉齋...(중략)...以東有協吉堂十九間."
|
|
 |
|
 |
 |
|
 |
| 태그 : 궁궐 | 협길당 | 조성왕릉 | 주련 | 집옥재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현판과 주련- 경복궁- 향원정 권역
6월 2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향원정 권역...
1
3-h-20 향원정香遠亭

위치와 연혁 : 건청궁 앞의 연못인 향원지(香遠池)의 가운데 섬에 있는 정자이다. 1867(고종 4)년에서 1873(고종 10)년 사이에 건청궁을 만들면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뜻풀이 :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이다. 북송대 학자 주돈이(周敦이, 1017~1073년) 1)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香遠益淸]'<원전 1>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향원지 연못에 원래 연(蓮)이 심겨 있었음을 알려 주는 이름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의 오른쪽 위에 '御筆(어필)'이라는 전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어 고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13-j-20 향원정香遠亭의 주련


뜻풀이 :
(1) 玉池龍躍舞(옥지용약무)
아름다운 연못에 용이 뛰쳐 오르며 춤추네.
향원지를 신선이 사는 선계로 비유하고 그 못에 용이 뛰노는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옥지(玉池)는 신선이 사는 곳의 연못을 뜻한다.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의 문인인 강엄(江淹, 444~505년) 2)의 「혜중산언지(혜中散言志)」 시에 "朝食琅?實, 夕飮玉池津"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주련의 출전은 미상이며, 대구가 되는 구절이 없어 한 짝이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2) 千山華月逈(천산화월형)
천산에는 빛나는 달이 멀리까지 비추고
(3) 萬里衆星明(만리중성명)
만리에는 뭇 별들이 밝게 빛나네.
온 산에는 하늘 높이 뜬 달이 밝게 비추어 주고, 먼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묘사하였다.
(4) 崑랑雲霞積(곤랑운하적)
곤륜산 꼭대기에는 구름 노을 쌓였고,
(5) 蓬壺日月長(봉호일월장)
신선 사는 봉래에는 세월이 길도다.
향원정이 있는 섬을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에 비유하여 선계처럼 세월이 가는 줄 모르는 곳이며 경치가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봉호(蓬壺)'는 봉래산(蓬萊山)의 별칭이다. 이 산은 전설 속에서 동해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사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생긴 모양이 병같이 생겼다 하여 이와 같이 불렸다. '곤랑'은 곤륜산 꼭대기에 있다는 봉우리인 낭풍전을 가리키며 역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졌다.

제작 정보 : 위의 두 쌍의 주련에는 각각 필사자를 나타내는 '불(?)'이란 글자가 있어 중국 북송의 이름난 문인 미불 3)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짝을 잃은 (1)번도 같은 필체임을 보아 이 향원정의 글씨는 모두 미불의 작품을 새긴 것이다.
13-h-21 열상진원洌上眞源


위치와 연혁 : 향원지로 흘러드는 샘물의 우물 뚜껑 측면에 새겨진 글이다. 고종때 경복궁 중건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뜻풀이 :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뜻이다. 한강을 다른 말로 '열수(洌水)'라고 하였기 때문에 '열상(洌上)'은 한강의 북쪽, 즉 서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열상을 열수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 듯하다.
한강의 근원은 지리학적으로는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검룡소이지만, 왕궁에서 흘러나온 물이 한강으로 유입되므로 상징적으로 이 곳을 진원(眞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제작 정보 : 글씨는 예서체로서 돌에 새겨진 금석문이다.
──────────────────────────
1) 주돈이는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가의 영향을 받아 유교를 새로이 해석해「태극도설」을 저술했다.
2) 강엄은 남조의 송·남제(南齊)·양 세 왕조를 섬겼다. 양나라 때 벼슬이 높이 올랐으나 문학 활동은 송·제 시대에 활발했다. 역대 이름난 시인들의 작풍을 본따 지은「잡체시 30수」가 대표작인데, 인용한 시도 그 하나로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중산 혜강의 시를 본떴다.
3) 미불에 대해서는 곤녕합의 주련 참조.
<원전 1> 주돈이, 「애련설」,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 濯淸漣而不夭.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 而不可褒翫焉."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궁궐 | 향원정 | 열상진원 | 조선왕릉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경복궁 자경전 일대행각
5월 17,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의 현판(縣板)과 주련(柱聯)
자경전慈慶殿 권역


10-h-1 자경전慈慶殿

위치와 연혁 : 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다. 교태전 아미산 동쪽에 있다. 1867(고종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새로 지었다.<원전 1> 1873(고종 10)년 12월에 불탔으며, 1888(고종 25)년에 재건하였다.
뜻풀이 : '자경(慈慶)'은 '자친(慈親)이 복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자(慈)'는 '자친, 곧 어머니', '경(慶)'은 '복'을 가리킨다. 국왕의 어머니인 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므로 이와 같이 이름 지었다.
제작 정보 : 현판은 1888(고종 25)년,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성이호(成?鎬, 1817~1895년)가 썼다.<원전 2>
10-h-2 만세문萬歲門
위치와 연혁 : 자경전의 남쪽 문으로 정문에 해당한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세웠다.<원전 3>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만들었다.

뜻풀이 : '만세(萬歲)'란 만년, 곧 '긴 시간'을 뜻한다. 이 곳에 거처하는 주인공이 오랫동안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0-h-3 청연루

위치와 연혁 : 자경전의 누각이다. 건축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31(1449)년 6월 18일(병인) 기사에 '내가 지은 건물'<원전 4>이라는 기록이 있어 세종 대에도 같은 이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현재의 건물은 1867(고종 4) 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다시 세웠다. <원전 5> 높은 돌기둥 위에 누마루를 깐 팔작지붕집이다.
뜻풀이 : '청연'은 '맑고 한가함' 또는 '조촐한 연회'를 뜻한다. '연(잔치 연)'은'연(燕)'과 통하며 '편안함', 또는 '잔치'라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에 따라 '淸燕樓(청연루)'로 표기한 곳도 있다.

제작 정보 : '樓(루)' 자는 옛 서법을 따랐기 때문에 정자체와는 차이가 난다.
10-h-4 협경당協慶堂
위치와 연혁 : 자경전의 동쪽에 있다.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자경전과 함께 만들어졌다. 1876(고종 13)년에 불탔다는 기록<원전 6>이 있다.

뜻풀이 : '협경(協慶)'은 '함께 복(경사)을 누린다'는 뜻이다. '협(協)'은 함께,'경(慶)'은 복을 의미한다.
──────────────────────────
<원전 1>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8월 18일(戊戌), "營建都監, 以各殿堂號及各門名別單啓. 慈慶殿樓淸?樓 北上室純熙堂 西小寢錫祉堂 中小寢德必堂."
<원전 2> 『고종실록』 권25, 고종 25년 5월 19일(庚午), "重建所, 以慈慶殿上樑文製述官金炳德,書寫官趙康夏, 懸板書寫官成?鎬.
<원전 3>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8월 18일(戊戌), "營建都監, 以各殿堂號及各門名別單啓...(중략)...慈慶殿, 南行閣門長樂門^萬歲門,東行閣門千春門, 北行閣門順?門, 北牆一角門呈瑞門, 西牆一角門順祉門, 板牆門延福門."
<원전 4> 『세종실록』 권124, 세종 31년 6월 18일(丙寅), "上謂承政院曰...(중략)...咸元·交泰殿·紫薇·宗會·松柏·麟趾堂·淸燕樓, 是予所建小室也."
<원전 5>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8월 18일(戊戌).자경전 원전 1 참조.
<원전 6> 『고종실록』 권13, 고종 13년 11월 4일(辛酉). 교태전 원전 2 참조.
|
|
 |
|
 |
 |
|
 |
| 태그 : 만세문 | 경복궁 | 궁궐 | 현판 | 협경당 | 자경전 | 주련 | 청연루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이야기.....경복궁-- 함원전 일대 행각
4월 25,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이야기....
경복궁-- 함원전 일대 행각
7. 함원전含元殿 권역


7-h-1 함원전含元殿

위치와 연혁 : 교태전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건축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31(1449)년 6월 18일(병인) 기사에 "내가 지은 건물" <원전 1>이라는 기록이 있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하였다. 함원전은 불교 행사가 자주 열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채롭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뜻풀이 : '함원(含元)'은 '원기를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명나라 때 반사조(潘士藻)라는 사람이 편찬한 『독역술(讀易述)』에서 건괘에 대한 「단전」의 해설인"건도가 변하여 화함에 각각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니 태화(太和)를 온전히 보존하여 이에 이롭고 정(貞)하다."를 주석하는 가운데, "성(性)은 생성의 이치이고 명(命)은 생성의 기이다. 태화(太和)는 원기(元氣)가 끊임없이 나는 것이니,정(貞)하여 원기를 머금고[含元] 또 만물의 처음을 연다."<원전 2>라고 썼다. 태화를 원기와 연관하여 설명한 것이다.
함원전은 당나라의 궁전 이름이기도 했다. 『구당서(舊唐書)』에 당 고종 3(651)년에 함원전을 새로 지은 사실이 기재되어 있는데 본래 이름은 봉래궁(蓬來宮)이었다.

제작 정보 : 지금의 현판은 1888(고종 25)년에 이명재(李命宰, 1838~1895년)가 썼다.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문신이다.
7-h-2 자안당資安堂
위치와 연혁 : 흠경각 서쪽 행각의 이름이다. 1868(고종 5)년에 만들었다. <원전 3>
뜻풀이 : '자안(資安)'이란 '평안함을 의지한다'는 뜻이다. '자(資)'는 '바탕으로삼는다', '안(安)'은 '평안함'을 의미한다.

제작 정보 : 자안당은 현재 현판이 '자선당(資善堂)'으로 붙어 있다. 『북궐도형』, 『일성록』에는 '자안당(資安堂)'으로 나온다. 『속음청사(續陰晴史)』1) 7권의 1895년 11월 16일의 기사에도 경복궁에 자안당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므로, <원전 4> 자안당이 경복궁에 실재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을 자선당이라 부른 예는 1915년 이후에 출판한 『궁궐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는 일제 총독부가 동궁을 헐어버린 뒤였으므로, 동궁에 있던 자선당의 현판을 이 곳에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동궁 권역에 자선당이 복원되어 있으므로 이 현판은 교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7-h-3 융화당隆和堂
위치와 연혁 : 함원전 서쪽 행각의 이름이다. 1868(고종 5)년에 만들었다.<원전 5>
뜻풀이 : '융화(隆和)'는 '조화를 융성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국 동진(東晋)에서는 362년부터 363년까지 융화를 연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작 정보 : 융화당은 현재 '隆化堂'으로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북궐도형』과 『일성록』에는 '隆和堂'으로 나온다. 1915년 이후에 나온 『궁궐지』의 경우에만, '隆化堂'이라 했다. '隆和堂'이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현판을 새로 교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7-h-4 선장문善長門

위치와 연혁 : 함원전 뒤뜰에서 북쪽의 아미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867(고종4)년 경복궁 중건시 만들었다.<원전 6>
뜻풀이 : '선장(善長)'은 '선의 으뜸'이란 뜻으로, 『주역』 건괘에서 나왔다. 「문언전」에서 '원형이정'을 설명하며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요,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이(利)는 의(義)에 화함이요, 정(貞)은 일의 근간이다."<원전 7>라고 하였다.
7-h-5 대재문大哉門
위치와 연혁 : 함원전의 서쪽 행각에 있는 문이다. 1867(고종 4)년에 만들었다. <원전 8>

뜻풀이 : '대재(大哉)'란 '위대하다'란 뜻이다. 『주역』의 건괘 등 여러 문헌에서 그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재(哉)'자는 어조사로서 감탄을 나타낸다.
제작 정보 : '哉(재)'자는 속자로 쓴 것이다.
7-h-6 흠경각欽敬閣

위치와 연혁 : 강녕전 서쪽, 함원전 앞에 있다. 1438(세종 20)년에 세우고 여기에 물의 힘을 이용하여 돌아가는 시계인 옥루(玉漏), 천문을 관측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등을 설치하였다. <원전 9> 1553(명종 8)년에 불탄 뒤 재건하였으며 <원전 10>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1876(고종 13)년에 불탔으며 <원전 11> 1888(고종 25)년에 원하였다. <원전 12>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철거되어 그 부재가 창덕궁 복원에 사용되었다. 199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뜻풀이 : '흠경(欽敬)'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흠모하고 공경한다'는 뜻이 되지만 여기서는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 준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흠경각에 시간을 알리는 천문 기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경』 「요전」의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라는 구절에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는데 원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2)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경히 따라서 해와 달과 성신(星辰)을 기구로 헤아리고 관찰하고 기록하여[曆象] 백성의 농사철[人時]을 공경히 주게 하셨다."<원전 13>

제작 정보 : 세종 당시 흠경각을 창설하는 데 참여한 관료이자 과학자인 김돈(金墩, 1385~1440년)이 기문(記文) 3)을 지은 바 있다. 현판은 1995년에 설치하였으며, 서예가 동강 조수호(趙守鎬)가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1) 한말의 정치가 김윤식(金允植,1835~1922년)의 일기. 1877년부터 1921년까지 35년간 쓴 일기로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2) 희씨와 화씨는 중국 고대 요 임금때 천문과 역상을 맡았던 관직, 또는 그 관직에 있었던 이들로 여겨진다.
3) 김돈이 쓴「흠경각기」의 원문은『세종실록』의 세종 20년 1월 7일(壬辰) 조에 나온다. 흠경각을 세운 배경과 시설을 자세히 설명한 글이다.
<원전 1> 『주역』 건괘,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太和, 乃利貞."
<원전 2> 반사조, 『독역술』, "性生之理, 命生之氣, 太和則元氣之生生者, 貞以含元而又開萬物之始."
<원전 3> 『일성록』 고종 5년 6월 10일, "營建都監, 以新建各殿堂號及門名別單啓. 別單...(중략)...含元殿, 西行閣隆和堂^資安堂. 康寧殿,東行閣壽慶堂^啓光堂, 西行閣宣安堂^建祥堂^紫薇堂."
<원전 4> 『속음청사』 권철, 乙未 十一月 十六日, 陽曆除夕. "壬子半陰半晴, 今日卽陽曆除夕也, 仕外署, 赴內閣, 承召入資安堂, 問候."
<원전 5> 자안당 원전 1 참조.
<원전 6> 『일성록』 고종 4년 8월 18일, "營建都監以各殿堂號及各門名別單啓. 該都監啓言, 今此景福宮營建時, 慈慶殿以下各殿堂殿號堂號及各行閣門名, 別單書入 而外他各門, 待其營建, 鱗次書入事...(중략)...含元殿, 西行閣門大哉門, 北墻門惇德門, 園一角門善長門."
<원전 7> 『주역』 건괘, "元者, 善之長也, 亨者,嘉之會也, 利者, 義之和也, 貞者, 事之幹也."
<원전 8> 『일성록』 고종 4년 8월 18일. 선장문 원전 1 참조.
<원전 9> 『세종실록』 권50, 세종 20년 1월 7일(壬辰). "欽敬閣成. 大護軍蔣英實經營之, 其規模制度之妙, 皆出睿裁, 閣在景福宮燕寢之傍."
<원전 10> 『명종실록』 권15, 명종 8년 9월 14일(丁巳), "景福宮 大內火. 太祖卽位三年所創, 康寧^思政二殿及欽敬閣, 皆燒盡."
<원전 11> 『고종실록』 권13, 고종 13년 11월 4일(辛酉). 교태전 원전 3 참조.
<원전 12> 『고종실록』 권25, 고종 25년 5월 19일(庚午), "重建所, 以慈慶殿上樑文製述官金炳德,書寫官趙康夏, 懸板書寫官成?鎬....(중략)...欽敬閣上樑文製述官洪祐吉, 書寫官金益容, 懸板書寫官宋秉瑞, 啓差."
<원전 13> 『서경』 「요전」, "乃命羲和, 欽若昊天,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궁궐 | 함원전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 강녕전, 향오문, 연생전, 경성전
4월 10,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문화재의 향기.... 궁궐 이야기
경복궁에 내에 있는 강녕전,향오문,연생전,경성전.....
강녕전康寧殿 권역


5-h-1 강녕전
위치와 연혁 : 왕의 침전이다. 근정전 북쪽에 있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다. 1433(세종 15) 년에 고쳐 지었고,<원전 1> 1553(명종 8)년에불탄 것을 재건했으나,<원전 2> 1592년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로 전부 타버렸다. 1867(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일제 때 화재로 없어진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을 재건하기 위해 1918년에 헐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뜻풀이 : '강녕(康寧)'은 '편안하고 건강함'을 의미한다. 강녕은 『서경』 「홍범」편에서 임금이 누리는 오복(五福) 1)의 하나로 제시되는데, 정도전이 이를 바탕으로 작명하였다. 정도전은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강녕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 2)의 오복 중에 세번째가 강녕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면 능히 다섯 가지 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다섯 가지 복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때에는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을러질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덕이 닦이지 못하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 나라 무공(武公) 3)이 스스로를 경계한 시(詩)에, '네가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세를 넘어 향수했으니,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원전 3>

제작 정보 : 현판은 1995년에 복원하면서 설치하였으며,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8~~2007년)이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5-h-2 향오문嚮五門

위치와 연혁 : 강녕전 남쪽 행랑의 전각문이다. 사정전에서 강녕전으로 가려면 이 문을 들어서야 한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원전 4>
뜻풀이 : '향오(嚮五)'는 '오복을 향함'이라는 의미다. '향(嚮)'은 '향하다', '오(五)'는 '오복'으로 풀이된다. 『서경』 「홍범」편의 '향용오복(嚮用五福)'에서 왔다. 「홍범」에서는 하늘이 우왕(禹王)에게 홍범구주, 즉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가지의 큰 법칙을 내려 주었다고 하였는데, 오복은 그 중에 하나로 제시되었다. 아홉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오행(五行) 4)이고, 다음 두 번째는 공경하되 오사(五事) 5)로써 함이요, 다음 세 번째는 농사(農事)를 짓는 데 팔정(八政) 6)을 씀이요, 다음 네 번째는 합함을 오기(五紀) 7)로써 함이요, 다음 다섯 번째는 세움을 황극(皇極)으로써 함이요, 다음 여섯 번째는 다스림을 삼덕(三德)으로써 함이요, 다음 일곱 번째는 밝히는 데 계의(稽疑)로써 함이요, 다음 여덟 번째는 헤아림을 여러 조짐[庶徵]으로써 함이요, 다음 아홉 번째는 향함을 오복(五福)으로써 하고 위엄을 보이기를 육극(六極)으로써 하는 것이다."<원전 5> 채침은 이 가운데 오복과 육극을 두고 "복(福)과 극(極)은 사람이 감동함에 하늘이 응하는 것이다....(중략)...오복을 향(嚮)이라 한 것은 권면하기 위한 것이요, 육극을 위(威)라 한 것은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원전 6>라고 풀이하였다.

5-h-3 연생전延生殿

위치와 연혁 : 강녕전 동쪽에 있는 건물이다. 1395(태조 4)년에 침전인 강녕전의 소침(小寢)으로 처음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1867(고종 4)년에 중건하였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서 불이나 건물이 전소하자, 이 건물을 헐어 복원하는 부재로 사용하였다.<원전 7>
뜻풀이 : '연생(延生)'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연(延)'은 '맞이하다', '생(生)'은 '동쪽의 생명의 기운'을 의미한다. 연생전은 정도전 8)이 작명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 있는 경성전(慶成殿)과 짝을 이룬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이 건물의 이름을 지은 의의를 설명하였다.
"연생전과 경성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하고, 성인(임금)은 만백성을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려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 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으로 삼으므로, 동쪽의 소침을 연생전이라 하고 서쪽의 소침을 경성전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천지가 만물을낳는 것을 본받음을 보이고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원전 8>

제작 정보 : 현판은 1995년에 설치했으며, 서예가 구당(丘堂) 여원구(呂元九)가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서체는 예서체다.
5-h-4 경성전慶成殿
위치와 연혁 : 강녕전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1395(태조 4)년에 침전인 강녕전의 소침으로 처음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1867(고종 4)년에 중건하였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서 불이 나 건물이 전소하자, 이 건물을 헐어 복원하는 부재로 사용하였다.<원전 9> 1995년 이 권역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하였다.
뜻풀이 : '경성(慶成)'은 '완성함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경(慶)'은 '기뻐하다','성(成)'은 '완성한다'는 뜻이다. 서쪽이 완성, 결실을 의미하므로 이와 같이 지었다. 경성전은 정도전이 작명하였으며, 강녕전 동쪽에 있는 연생전과 짝을 이룬다. 정도전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이루는 것을 본받아 정령을 밝히라는 의미로 이 건물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정도전의 풀이는 앞의 연생전에 나온다.<원전 10>
제작 정보 : 현판은 1995년 설치하였으며, 서예가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가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1) 「홍범」에서 다섯가지 복은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이다. 원문은 5-h-7 수경당 편을 참조하라.
2) 홍범 구주는세상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아홉가지 큰 원칙을말한다. 아홉가지 내용은 86쪽 향오문 편에서 확인하라.
3) 위(衛) 무공(武公)은 춘추 시대 주나라 제후국이던 위나라의 군왕으로 55년이라는 긴세월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4) 오행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다섯으로 자연 운행의 법칙을 말한다.
5) 오사는 자연의 오행에 대응한 인간의 다섯 가지 행동 방식이다. 모습, 말,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것이 공손하고 순리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6)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정치를 한다는 뜻이고, 팔정은 정치의 세부 항목인 경제, 토목 건설, 교육, 사법, 외교, 국방 등을 이른다.
7) 해, 달, 날, 별, 역수 등 천체의 운행을 말한다.
8) 정도전에 대해서는 이 책 19쪽 '경복의 뜻풀이' 주석 참조.
<원전 1> 『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7월 21일(壬申), "召領議政 黃喜, 左議政 孟思誠, 右議政仍令致仕權軫等議事, 一, 康寧殿 , 非予私有, 乃傳之萬世之寢殿也, 而卑陜且暗. 若至老?居此殿, 則必難見細札, 不能處決萬機, 予欲改造, 傳之後世, 如何?"
<원전 2> 『명종실록』 권15, 명종 8년 9월 14일(丁巳). 이 책 70쪽 사정전의 원전 2 참조 .
<원전 3>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7일(丁酉), "其康寧殿曰, 洪範九五福, 三曰康寧, 蓋人君正心修德, 以建皇極, 則能享五福. 康寧乃五福之一, 擧其中以該其餘也. 然所謂正心修德, 在衆人共見之處, 亦有勉强而爲之者. 在燕安獨處之時, 則易失於安佚, 而儆戒之志, 每至於怠矣,而心有所未正, 德有所未修, 皇極不建, 而五福虧矣. 昔者, 衛武公自戒之詩曰, 視爾友君子, 輯柔爾顔, 不遐有愆.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武公之戒謹如此, 故享年過九十, 其建皇極而享五福, 明驗已然. 蓋其用功, 嘗自燕安幽獨之處始也. 願殿下法武公之詩, 戒安佚而存敬畏, 以享皇極之福, 聖子神孫, 繼繼承承, 傳于千萬世矣.於是稱燕寢曰, 康寧."
<원전 4>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8월 18일(戊戌), "營建都監, 以各殿堂號及各門名別單啓....(중략)...康寧殿, 南行閣門嚮五門^安至門, 東行閣門?祿門^志道門, 內行閣門明良門^萬咸門,內牆一角門迪吉門, 南行閣門惟永門."
<원전 5> 『서경』 「홍범」, "初一曰, 五行, 次二曰, 敬用五事, 次三曰, 農用八政, 次四曰, 協用五紀, 次五曰, 建用皇極, 次六曰, 乂用三德, 次七曰, 明用稽疑, 次八曰, 念用庶徵, 次九曰, 嚮用五福, 威用六極."
<원전 6> 위 구절에 대한 채침의 주, "福極者, 人感而天應也....(중략)...五福曰嚮, 所以勸也, 六極曰威, 所以懲也."
<원전 7> 『순조실록부록(純祖實錄附錄)』 권8, 융희(隆熙) 10년 11월 27일(陽曆), "本職重建殿閣, 以景福宮內諸殿閣【交泰殿康寧殿東行閣^西行閣, 延吉堂, 慶成殿, 延生殿, 膺祉堂, 欽敬閣, 含元殿, 萬慶殿, 興福殿】舊材移建事, 與總督府, 議定後啓稟."
<원전 8>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7일(丁酉), "其延生殿·慶成殿曰, 天地之於萬物, 生之以春, 成之以秋. 聖人之於萬民, 生之以仁, 制之以義. 故聖人代天理物, 其政令施爲, 一本乎天地之運也. 東小寢曰, 延生, 西小寢曰, 慶成, 以見殿下法天地之生, 以明其政令也."
<원전 9> 『순조실록부록』 권8, 융희 10년 11월27일(陽曆). 이 책 88쪽 연생전 원전 1 참조.
<원전 10>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7일(丁酉). 이 책 88쪽 연생전 원전 2 참조
|
|
 |
|
 |
 |
|
 |
| 태그 : 강녕전 | 경복궁 | 경성전 | 궁궐 | Gyeongbokgung | Hotel Ibis | 향오문 | 연생전 | Seoul | Seoul LG Blogger Forum | South Korea | Sports | Stefan Gimpl | World Cup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근정전, 근정문, 월화문, 일화문]
3월 4,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3-h-3 일화문日華門
위치와 연혁 : 근정문의 동쪽에 난 작은 문이다.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으며<원전 1>, 임진왜란 때 불탔다.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월화문과 짝을 이룬다. 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문반은 일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뜻풀이 : '일화(日華)'는 '해의 정화'를 뜻한다. '해[日]'는 음양의 이치 상 양(陽)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문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tyle="LINE-HEIGHT: 180%; 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중국 당나라에서는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선정전 앞에 있던 두 문 가운데 하나를 일화문으로, 다른 하나를 월화문으로 지은 적이 있다.
tyle="LINE-HEIGHT: 180%; 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
──────────────────────────
tyle="LINE-HEIGHT: 180%; 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원전 1>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9월 29일(庚申), "殿門三間, 在殿之南. 左右行廊各十一間, 東西角樓各二間. 午門三間, 在殿門之南, 東西行廊各十七間, 水閣三間, 庭中有石橋御溝, 水所流處也. 門之左右行廊, 各十七間, 東西角樓, 各二間. 東門曰, 日華 , 西曰, 月華."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궁궐 | 근정전 | 월화문 | 일화문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근정전 행각의 주련]
3월 3,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궁궐 | 근정전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흥례문, 유화문]
3월 2,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제작정보:현판은 2001년 설치 하였으며, 홍례문과 같이 정도준이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궁궐 | 홍레문 | 홍례문 | 유화문 | 흥례문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덕양문, 기별청, 수정전]
2월 25,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속으로....






1)『관자』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의 저술로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관중을 따른 후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 정치의 실제지침들을 수록한 책이다.
<원전 1> 『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11월 8일(丁巳), "初八日. 營建都監, 以追後營建堂號門名別單啓....(중략)...修政殿, 內行閣南門修政門^鳳來門, 東門同和門, 西門景肅門, 北門隆智門, 中行閣南門永化門, 東門咸遂門, 西門尙賢門, 外行閣南門崇陽門, 東門延明門."
<원전 2> 『고종실록』 권32, 고종 31년 12월 16일(戊午), "詔曰, '君臣相見禮式, 參互改定, 務從簡易'. 又詔曰, '自今國政事務, 朕親詢各大臣裁決, 議政府移設于宮內, 改稱內閣, 處所以修政殿爲之, 奎章閣勿稱內閣'."
<원전 3> 『관자』 「대광」, "公內修政而勸民, 可以信於諸侯矣. "

|
|
 |
|
 |
 |
|
 |
| 태그 : 덕양문 | 경복궁 | 고종4년 | 궁궐 | 기별청 | 수정전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이야기...
2월 1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문화재청 회원들에게 제공되는 자료임*
우리나라 궁궐 이야기....
|
|
|
|

.
조선조 유교문화의 정수인 궁궐의 건물은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과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러한 유교적 이념을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입니다.
각 궁궐에는 경복궁, 창덕궁과 같이 각각의 이름이 있으며, 궁궐 내에 있는 전각들도 저마다의 이름이 있습니다. 궁궐 건축물의 이름이 걸려 있는 판을 현판(懸板)이라 부르며, 현판에는 각 건축물의 쓰임새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의 각 건물 기둥에는 한시의 문구를 새긴 주련들이 있습니다. 기둥에 대구가 되는 글귀를 써 붙였다 하여 주련(柱聯) 이라고 하는데, 주련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체로 짝을 이룹니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옛 경전과 각종 고전을 읽거나 해석해야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철학적 의미까지 새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그 뜻과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일반인들도 쉽게 궁궐의 현판과 주련을 이해할 수 있도록 2007년도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 연구 용역을 의뢰하여 연구보고서와 함께 동 보고서를 바탕으로「궁궐의 현판과 주련」을 발간한 바 있습니다.
금번 연재하는「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2007년도에 발행된 동 책자를 바탕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등의 순서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연재를 통하여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를 이해하고, 나아가 선조들의 멋과 운치를 느끼시길 바라며, 아울러 궁궐 답사의 훌륭한 길라잡이 역할이 되기를 소원 합니다.
아울러, 독자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궁궐의 현판과 주련」(2007 문화재청 발간)에 실린 연세대학교 철학과 이광호 교수님의 머리말을 소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머리말 : 궁궐의 현판과 주련을 내며..
조선조 500년은 유교를 이념으로 한 유교 국가였다. 유교의 범위는 시간적으로는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이어지며, 공간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한자 문명을 수용한 동아시아 국가 전역을 포함한다.
유학이 중국에서 발원하였다지만 유학의 형성과 발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민족들이 상호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학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보면 조선조 사회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조선왕조는 유학의 이념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정치 사회적으로 전력을 경주하였기때문에 조선조 사회는 유학 사상의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한 하나의 전형적 시험장이었다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런 만큼 조선조의 사상과 문화 전반의 이해는 유학 사상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전제로 한다. 하물며 왕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적 정치의 모든 것이 기획되고 집행되던 궁궐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근대 사회 이후 서구 문명의 동진과 함께 유교 문화의 종주국이던 중국의 정치와 문화가 몰락하기 시작하며, 유학은 동아시아 문화의 후진성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근대 100여년 동안 유교 문화는 전반적인 부정과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유학의 이념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사대부들을 실현의 주체로 하고, 왕을 권력의 정점으로 삼아 덕치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되, 권력의 핵심이 왕이었기에 모든 정치적 결정은 궁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조 문화의 절대적 공간이었다. 그래서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과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교적 이념의 기초가 인류의 보편적 이성인 천명에 기초한 덕치주의,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관, 민심을 천심으로 삼는 민본주의라면 궁궐의 현판에는 이러한 유교적 이념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처럼 현판은 그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판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는 궁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련(柱聯)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인 산문 등을 널빤지에 양각 또는 음각으로 새기거나 써서 전통 한옥의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주련의 내용은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하는 것,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것 등 다양하다. 여기에 쓰이는 글귀는 옛날부터 전하는 시문을 많이 이용하는데, 때로는 새롭게 창작한 것을 새겨 넣기도 한다. 주련의 글씨는 선대(先代)의 유명 서가(書家)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우리 선인들은 이러한 주련을 개인의 집이나 누정(樓亭), 사찰, 궁궐 등 생활 공간의 곳곳에 걸어 놓아 수시로 보고 감상하면서 인격 수양에 힘쓰고 멋과 운치를 누렸다. 전국 곳곳의 고택이나 유적지, 사찰, 궁궐 등에 널려 있는 주련은 선인들이 일상 속에서 멋과 운치를 누리고 수양에 힘쓴 생활 문화의 자취이다. 특히 우리 궁궐에는 여러 건물에 주련이 걸려 있는데, 오랫동안 전문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대련(對聯)으로 되어 있는 주련들이 짝이 바뀐 것이 많고, 일부는 한 짝이 분실된 것도 있어 찬란한 궁궐 문화에 비해 매우 아쉬운 점이 많았다.
금번에 문화재청에서 현판과 주련의 보존과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심도있는 조사 연구를 수행하게 한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대단히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한자로 된 문화 유산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인구가 거의 사라지는 마당에 고건축물의 현판과 주련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것은 전통 문화의 보존과 이해를 통한 발전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중요한 사업이다. 이 책을 토대로 우리의 궁궐 문화를 깊게 이해하면, 동아시아의 보편적 문화이던 유교 문화를 우리의 고유 문화로 토착화시킨 선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현대 문화가 가진 물질 만능주의의 병폐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교적 덕치주의, 인문주의 정신과의 만남의 길도 열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경복궁景福宮
경복궁景福宮,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처음으로 만든 궁궐이다. 1395년(태조 4년)에 근정전(勤政殿)·사정전(思政殿)·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근정문(勤政門)·강녕전(康寧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 등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으며 그 후 오랜 동안 공궐(空闕)로 방치되어 있다가 1867년(고종 4)에 중건하였다. 1917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내전 일곽이 불에 타자,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권역의 건물을 헐어다 재건에 썼다. 이때에 철거된 전각은 교태전·강녕전·연길당·경성전·연성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홍복전 등 400여 칸에 달하였다. 그 후 일인들은 광화문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이건하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공진회 건물 등 낯선 건축물을 지었다. 또 각 지역의 석탑 등의 석조물을 반입하여 요소에 배열하고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하였다. 1968년에는 6·25전쟁 때 문루가 불탔던 광화문 육축1)의 석대를 궁 남쪽에 옮겨 시멘트로 문루를 세웠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이후 복원 작업을 추진하였다. 1995년에는 강녕전이, 1999년에는 자선당 등이 복원되었으며,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어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건청궁이 2006년 복원되어 2007년 개방되었으며, 여러 전각들이 복원과 개방을 준비하고 있다.
경복景福의 뜻풀이
'景福'은 '큰 복'이란 뜻으로 '景'은 '크다', '福'은 '복'을 의미한다. 『시경(詩經)』에서는 이 말이 여러 군데에 나오지만 정도전 2)은 특히 『대아(大雅)』「기취(旣醉)」편에 나오는 것을 취하여서 이름을 지었다. 이름을 지은 의미를 정도전은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 3)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의 만년에 큰 복[景福]을 빈다.'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1) 육축(陸築)은 성이나 문의 아래돌로 만든 축대 부분이다. 2)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으로 활약한 정도전은 한양 천도를 주도했고,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도시 계획을 짜고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참수되었다. 3) 주아는 『시경』의 「대아」편을 가리킨다.
| |
|
|
 |
|
 |
 |
|
 |
| 태그 : 누정 | 문화재청 | 건물 | 경복궁 | 궁궐 | 사대부 | 사찰 | 현판 | 유교 | 전통한옥 | Tools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궁궐 이야기...
1월 27,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궁궐 이야기....
|

1-h-3 영추문 迎秋門

위치와 연혁 : 경복궁의 서쪽 궁문이다. 동쪽의 건춘문과 짝을 이룬다. 오행 상서쪽을 상징하는 계절이 가을이므로 이와 같이 이름지었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건춘문과 똑같은 규모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한 것이다.

뜻풀이 : '영추(迎秋)'란 '가을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건춘과 마찬가지로 영추 또한 『예기』의 「월령」 편에서 다음과 같은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 달에는 입추가 있으므로 입추 사흘 전에 태사가 천자를 뵙고 '아무 날이 입추이니 천지의 성덕이 금위(金位) 1)에 있습니다' 하고 아뢴다. 천자는 재계하다가 입추일에 삼공·구경·제후·대부들을 친히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나가 '가을을 맞는다[迎秋].'" <원전 1> 후한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예기』 주석의 틀을 마련한 정현(鄭玄, 127~200년) 2)은 "영추라는 것은 백제(白帝) 백초거(白招拒) 3)를 서쪽 교외에 나가서 제사지내는 것이다"고 했다. <원전 2> 가을을 맞이함, 곧 영추는 서방의 백제(白帝)를 제사지내는 행위로 풀이한 것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허계(許棨, 1798~1866년)가 썼다. <원전 3> 허계는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를 지냈다가 그 후 판의금부사에 오른 무관이다.
────────────────────────── 1) 금위는 오행에서 금의 방향, 즉 서쪽이자 가을에 해당한다.
2) 정현. 자는 강성(康成). 유가 경전 연구에 힘써, 옛 문장들을 새롭고 쉽게 풀었다. 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몰두하여 훈고학의 시조로 존경을 받았다.
3) 서방의 황제는 오행에서 백색의 기운에 해당하므로 백제라고도 한다. 백제의 이름이 백초거다.
<원전 1> 『예기』 「월령」, "是月也, 以立秋, 先立秋三日, 大史謁之天子曰, 某日立秋, 盛德在金. 天子乃齊, 立秋之日, 天子親帥三公九卿諸侯大夫, 以迎秋於西郊."
<원전 2> 『예기』 「월령」, "鄭氏曰, 謁告也. 迎秋者, 祭白帝白招拒於西郊之兆也."
<원전 3> 『고종실록』 권2, 고종 2년 9월 17일(己卯). 이 책 28쪽의 원전 3을 참조하라.
1-h-4 신무문 神武門

위치와 연혁 : 경복궁의 북쪽 궁문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태조 때의 기록에는 궁성을 쌓고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을 만들었다고는 되어 있으나 신무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원전 1> 이로 보아 광화문 등을 세운 이후 언젠가 세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문이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1475(성종 6)년이다. 궁의 북쪽이라서 인적이 드물었으나 왕과 공신들이 함께 회맹제(會盟祭)를 열 때에는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뜻풀이 : '신무(神武)'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武勇)'을 의미하며, 또한 신령스러운 현무(玄武)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오행에서 북쪽은 어둠, 죽음, 살상(殺傷) 등을 의미하며 이 방향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신수(神獸)가 현무다.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1)에 다음과 같은 용례가 보인다. "그러므로 시초(蓍草) 2)의 덕은 둥글면서 신묘(神妙)스럽고, 괘(卦)의 덕은 네모져 지혜로우며, 여섯 효[六爻]의 뜻은 변화하여 길흉을 알려 준다. 성인(聖人)이 이 괘와 효의 내용으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고 은밀한 데에 물러나 감추며, 길흉간(吉凶間)에 백성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한다.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미래를 알고 지혜로 과거의 일을 간직하니, 그 누가 이에 참여하겠는가. 옛날의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신묘한 무력[神武]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은 자일 것이다."<원전 2>
신무문의 성벽에는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온 세상이 태평스런 봄날과 같다'는 뜻이다. 온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제작 정보 :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현직(李顯稷)<원전 3>이 썼다. 이현직은 고종 때 어영대장 등의 관직을 지낸 이다.
────────────────────────── 1) 계사상전은 주역의 괘사나 효사를 설명한글이라는 뜻이지만, 단지 괘효사의 해석이 아니라 주역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시초는 원래 풀의 이름인데, 고대에 중국에서 이 줄기를 잘라 주역점을 쳤다. 이후 대나무 산가지로 바뀌어 서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전 1>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9월 20일(庚申, "是月, 太廟及新宮告成....(중략)...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 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 以限晨夕警中嚴. 門南左右, 分列議政府, 三軍府, 六曹, 司憲府等各司公?."
<원전 2> 『주역』 「계사상전」, "是故, 蓍之德, 圓而神, 卦之德, 方以知(智). 六爻之義, 易以貢. 聖人, 以此洗心, 退藏於密, 吉凶, 與民同患, 神以知來, 知以藏往, 其孰能與於此哉. 古之聰明叡知神 武而不殺者夫."
<원전 3> 『고종실록』 권2, 고종 2년 9월 17일(己卯). 이 책 28쪽의 원전 3을 참조하라.
1-h-5 계무문 癸武門

위치와 연혁 : 신무문의 오른쪽에 난 문이다. 돌로 만든 월문(月門) 1)이며 『궁궐지(宮闕志)』2)에 나온다.<원전 1>이 문을 들어서면 무청문(武淸門)이 나온다.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쪽 담밖에서 건청궁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하다. 1868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들었다.<원전 2>

뜻풀이 : '계무(癸武)'란 '북쪽의 현무'를 뜻한다. '계(癸)'는 천간(天干)의 마지막이며 방위로는 '북쪽'에 해당한다. '무(武)'는 북쪽을 상징하는 동물인 '현무(玄武)'를 의미한다.
제작 정보 : 서체는 전서체(篆書體)이며 돌에 새긴 금석문이다. 특히 '癸(계)'자는 소전(小篆) 3)으로 써서 알아 보기가 쉽지 않다.
──────────────────────────
1) 벽돌을 쌓아 둥근 아치형을 이루도록 만든 문을 월문이라 부른다.
2) 『궁궐지』는 헌종조(재위1834~1849년)에 발행한 것과 숙종조(재위1674~1720년)에 발행한 것이 전한다. 헌종 때 것은 각 건물의 연혁과 기능 등이 제시된 반면 숙종 때 것은 건물들의 규모만 밝혔다. 이 책에서 『궁궐지』는 따로 명시가 없는 한 헌종 때 것을 가리킨다
3) 전서는 대전(大篆)과 소전으로 나뉜다. 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기원전 259~210년)때 복잡한 대전을 간략화한 것이 소전이다.
<원전 1> 『궁궐지』, "武淸門, 門外宮墻, 石月門癸武門."
<원전 2> 『일성록(日省錄)』 고종 5년 6월 10일(丙辰), "營建都監, 以新建各殿堂號及門名別單啓. 別單...(중략)...興禮門外東墻門協生門, 西墻門用成門, 北內墻門內武門^神武門, 東邊門癸武門, 外東墻門 西墻門秋成門金華門."
1-h-6 광무문 廣武門 위치와 연혁 : 계무문의 오른쪽에 난 문이다. 언제 만들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계무문과 마찬가지로 돌로 만든 월문이며 『궁궐지』에 나온다.<원전 1>

뜻풀이 : '광무(廣武)'는 '무용(武勇)을 넓힌다'는 뜻이다. '광(廣)'은 '넓히다','무(武)'는 '무용'을 의미한다. 한편, 앞의 신무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무(武)'는 '현무'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오행상 북쪽은 어둠^죽음^살상 등을 의미하며 이를 상징하는 동물이 현무이다.
제작 정보 : 서체는 전서체이며 돌에 새긴 금석문이다. |
|
|
 |
|
 |
 |
|
 |
| 태그 : 경복궁 | 계무문 | 광무문 | 궁궐 | Freedom of the press | Google | 신무문 | 영추문 | 현판 | 주련 | United States |
 |
 |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