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아덴 (Elizabeth Arden) 이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 (Taylor Swift) 와 향수 발매를 위한 글로벌 독점 라이센싱 제휴계약을 체결했다고 1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엘리자베스 아덴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제품명으로 하는 향수와 보조제품들을 개발, 공급하고, 마케팅을 전개할 수 있는 권한을 선점했다.
엘리자베스 아덴측은 “첫 향수가 내년 가을 중으로 북미시장에 공급이 착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울러 테일러 스위프트는 향수가 개발되는 과정에서부터 포장 및 광고전략 선정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에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테일러 스위프트(21세)는 올해 1월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과 ‘최우수 컨트리 앨범상’, ‘최우수 여성 컨트리 보컬상’, ‘최우수 컨트리 보컬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던 싱어 송라이터이자 배우이다.
‘포브스’ (Forbes)가 선정한 ‘2010년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순위에서 12위에 랭크되었는가 하면 ‘빌보드 매거진’(Billboard Magazine)에 의해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바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가운데 트위터 팔로워만 450만명, 페이스북 팬 또한 1,160만명을 상회하는 슈퍼스타이다.
엘리자베스 아덴의 로널드 롤러스톤 부회장은 “초고속으로 스타덤에 올라선 데다 다양한 수상경력과 믿을 수 없는 판매실적은 그녀의 특출한 재능을 입증하는 증거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가 젊은 아티스트로서 그녀가 지니고 있는 최고의 재능을 오롯이 반영한 새로운 향수를 선보일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해마지 않는다”고 말했다.
테일러 스위프트 또한 “향수가 자신의 과거와 생각들을 표현하고 기억을 되살려 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열광해 왔던 사람의 하나”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들을 엘리자베스 아덴과 손잡고 향수를 개발하는 과정에 반영시킬 수 있게 된 것에 마음이 설레인다”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 피터의 도시. 그 이름은 도시의 수호자인 성 베드로(Peter)에서 따왔다지만, 동시에 이 도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바이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피터대제(Peter I the Great)는 러시아를 유럽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도읍을 정한 곳이 발틱 해를 향해 있는 연안의 늪지대. 네바 강 하구의 음침한 섬들 위에 도시를 건설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소했다. 그러나 대제는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 오두막에 기거하며 관리들과 노동자들을 독려했다. 전 러시아에 석조 건축을 금지시키고, 모든 자재를 네바 강 하구로 실어오게 했다. 그리하여 100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로 이어진 북쪽의 베니스가 탄생했다.
도시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수십 년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제 다시 피터의 것으로 돌아갔다. 이곳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인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은 대제의 위엄을 기린 조각상이다. 말을 탄 대제가 서 있는 돌은 전설의 '번개 맞은 돌(Thunder Stone)'로 무려 1500톤에 이르는데, 이것을 오직 인력만으로 6Km나 끌어 핀란드 만에 가져온 뒤 배에 실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놓았다.
백조, 죽어가면서 태어나다.
1890년의 어느 날, 비쩍 마른 소녀 하나가 엄마의 손을 잡고 회청록색의 마린스키 극장(Mariinsky Theatre)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그때는 알렉산드로 골로빈이 만든 황금의 커튼 장식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마리우스 페티파의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녀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소녀는 엄마를 보채 바로 그 극장에 있는 제국 발레학교(현재의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찾아갔다. 처음엔 너무 어리고 아파 보인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11살이 되어서는 기필코 입학 허가를 얻어냈고, 혹독한 훈련을 거친 소녀는 러시아의 백조가 되었다.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Pavlova)는 남성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 발레의 전설을 만들어낸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1905년, 마린스키 발레단의 정식 단원이 된 직후 발표한 소품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는 그녀의 이니셜 같은 작품이 되었다. 밝고 경쾌한 백조가 아니라 죽음 직전에 가냘픈 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백조의 모습은 이전의 발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먼 나라를 떠돌아다녀야 했지만, 파블로바는 고향의 백조들을 잊지 않았다. 1923년 러시아에 극심한 기근이 닥쳐오자 그녀는 기꺼이 구호물품을 보냈고, 마린스키 극장 앞에는 물품을 받으려는 무용수들이 긴 줄을 지었다고 한다.
'빈사의 백조' - 안나 파블로바는 죽는 순간까지 백조 의상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벌떼 같은 작곡자들
콘서바토리의 중흥을 이끈 림스키-코르사코프.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러시아와 세계를 대표하는 작곡자들,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음악인들, 그리고 바로 마린스키 극장 건너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the Rimsky-Korsakov St. Petersburg state conservatory)에서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다.
콘서바토리는 1862년 안톤 루빈스타인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오늘날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1871년부터 1906년까지 이 학교에 몸담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첫 강의를 맡았을 당시 그는 27살의 해군 장교였는데, 발라키예프, 무소르그스키 등과 함께 소위 '5인조(the Five)'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부 유럽 음악의 모방이 아닌 '러시아의 음악'을 하기 위해 애썼는데,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던 것이 새로운 음악을 위한 활력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신의 음악적 기초가 너무나 취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미 콘서바토리를 통해 충실히 공부해온 차이코프스키에 상담을 요청했고, 러시아의 독자적인 음악을 위해서도 유럽 음악의 기초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앞서 더 큰 공부를 자청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후 후진 양성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열정이 콘서바토리를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로 만들어낸 것이다.
극작가 체호프, 사상 최악의 야유를 받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Alexandrinsky Theatre)에서 [갈매기]가 초연된 후, 극작가 안톤 체홉은 스탭들과 가족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극을 쓰지 않겠다." 그만큼 연극은 엉망이었다. 고독과 몽환의 이야기는 스타 연기자들을 동원해 지나치게 화려하게 만들어졌고, 멜로드라마를 거부한 실험적인 극은 관객들은 물론 제작진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상태였다. 2막이 시작되자 야유는 넘쳐났고, 주연 여배우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후에 모스크바에서 새롭게 상연되어 호평을 얻기는 했지만, 체호프는 그 공연도 만족하지 못했다.
이렇게 체호프에게 연극사에 길이 남을 좌절을 가져다준 극장이지만, 알렉산드린스키는 러시아 공연 예술의 메카로 오늘날까지 그 영광을 이어오고 있다. 이 도시 곳곳을 빛내온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카를로 로시(Carlo Rossi)가 디자인한 건물로, 안팎으로 19세기의 우아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극장 앞의 작은 광장은 크리스마스 즈음에 열리는 축제로 많은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체호프를 좌절시킨 제국 시대의 극장, 알렉산드린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락방에 숨어들다
도스토예프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심장이다. 그런데 그 심장은 살짝 얼어 있다. 마치 북쪽 바다처럼 말이다. 이 도시는 톨스토이, 고골리, 고리키 등 러시아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만큼 이 도시의 정신을 반영한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국의 영광은 영광이지만, 19세기 러시아인의 삶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검은 빵 한 조각을 먹지 못한 채 이상을 향해 버둥거리는 청춘들이 넘실거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 이 도시의 작은 쪽방에 기거하며 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며 소설을 써나갔다. 서유럽의 합리주의를 쫓지만 러시아의 종교적 영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 정신의 풍요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물질적 빈곤으로 고통 받는 인간들….
이 도시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기거하며 글을 썼던 두 장소가 남아 있다. 센나야(Kaznacheyskaya ul 7, Sennaya)의 좁은 골목에서 그는 세 개의 방을 옮겨 다녔는데, 바로 [죄와 벌]을 썼고 그 무대가 되는 곳이다. 블라디미르스카야(Vladimirskaya) 지하철 역 근처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박물관(Dostoevsky Museum)의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썼다고 한다.
일리야 레핀의 리스트를 훔쳐보다
19세기부터 혁명 이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리스트는 정말로 화려하다. 문학, 음악, 연극, 발레 등 수많은 분야에서 교과서 레벨의 이름들이 줄을 잇고 있다. 21세기의 우리가 그 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조악한 기술로 찍은 흐릿한 흑백 사진은 젖혀 두자. 그들에게는 국민 초상화가가 있었다. 바로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차르와 톨스토이와 멘델레예프까지, 그의 리스트에 들지 않았다면 러시아의 유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
레핀은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초기에는 고국에 있는 코사크 족의 호쾌한 일상과 풍습을 그려냈다. 이어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과 같은 작품을 통해 방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시선으로 민초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그려내면서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시대를 만들어간다. 완숙기에 접어들어서는 러시아 여러 국민 영웅들의 초상, 국가적 행사들을 기록하는 데 집중해 역사적 기록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도 했다. 러시안 뮤지엄(Russian Museum)은 '사드코(Sadko)' 등 그의 걸작들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러시아 사실주의 대가, 레핀의 '사드코'.
‘21세기의 푸쉬킨들’을 만나자
비주얼 아티스트 바비 바다로프는 푸시킨스카야-10의 시인 콘테스트에서 수상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정말로 많은 예술가들의 리스트를 읊었지만, 그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하나를 뽑으라면 그 답은 명료하다. 시인 알렉산더 푸쉬킨. [유진 오네긴(Eugene Onegin)]등 러시아 문학의 원형이 되는 위대한 작품들을 줄줄이 낳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를 유혹한 남자와의 결투 끝에 죽었다는 로맨틱한 최후가 더욱 큰 애정을 불러일으켜 왔다.
우리는 이 도시 곳곳에서 푸쉬킨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푸쉬킨스카야-10(Pushkinskaya-10) 아트센터'는 21세기의 푸쉬킨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1989년에 문을 연 이곳은 "박물관이 아닌 박물관"을 지향하는 갤러리, 스튜디오, 공연장, 그리고 가게들의 집합체다. 온갖 아방가르드한 예술 행위들이 벌어지는 장소이며, 독특한 나이트클럽 피시 패브릭(Fish Fabrique)으로도 유명하다.
베르디의 [아이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화려한 개선장면일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다] 공연을 보러 왔다가 2막의 개선장면이 끝나면 "이제 볼 거 다 봤다"며 집에 가는 관객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페라 [아이다]의 진짜 재미는 3막과 4막에 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주인공들의 갈등과 긴장은 더욱 팽팽해지고 감동 또한 커진답니다. 그러니 2막 끝난 뒤 절대로 집에 가지 마세요. 그리고 코끼리, 말, 낙타의 행렬은 결코 오페라 [아이다]의 핵심이 아닙니다. 대규모 야외무대의 경우 넓은 무대를 볼거리로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동물들을 등장시키는 것뿐, 스토리나 음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고 있는 동안 이집트 국왕은 운하 개통 기념으로 국제적인 수준의 오페라를 공연하고 싶어 베르디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를 위해 운하가 개통되는 1869년에 맞춰 카이로 오페라 극장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와의 계약을 못 미더워했던 베르디는 일단 의뢰를 거절했다가, 프랑스의 이집트학 연구가인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짤막한 소설 초고를 읽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 소재로 대본을 써서 오페라를 만들면 대단히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아이다]였답니다.
라다메스의 아리아 - 정결한 아이다 Celeste Aida / 플라시도 도밍고[테너]
이집트인의 합창 - 가자! 신성한 나일 강가로 Su! del Nilo al sacro lido
개선행진곡 - 오라, 승리자들이여 Vieni, guerriero vindice / 제임스 레바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그러나 이 오페라는 운하가 개통되고 2년이나 지난 187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야 카이로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될 수 있었습니다. 한 해 전에 오페라 작곡은 끝났지만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는 바람에 파리에서 제작한 무대의상을 실어내 올 수가 없었다는군요.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초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파라오가 통치하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와 나일 강변의 도시 테베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지금도 이집트의 관광상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레이저 빔을 쏘며 현장감 있는 야외공연을 펼치기도 하죠.
콜로세움과 비슷한 외관을 가진 이탈리아 베로나 야외극장에서는 1913년부터 거의 매년 여름 [아이다]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은 6월 중순에 시작해서 8월 말까지 계속되는데, 올해는 프랑코 제피렐리가 연출한 [아이다]가 무대에 오릅니다.
[아이다]는 고대 이집트의 멤피스, 나일강변, 테베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출처: NGD>
이 오페라에서 인물들의 갈등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국경분쟁이라는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갈등의 핵심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Radames. 테너), 원래는 에티오피아 공주지만 전쟁포로로 끌려와 이집트 왕궁에서 노예로 일하는 여주인공 아이다(Aida. 소프라노), 라다메스를 사랑하는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Amneris. 메조소프라노), 이 젊은 주인공들의 삼각관계입니다.
라다메스는 등장하자 곧 '정결한 아이다'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신탁에 따라 에티오피아군을 물리칠 이집트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공주 암네리스는 라다메스가 승전해 돌아오면 결혼하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아이다가 라다메스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불같은 질투에 휩싸입니다. 라다메스는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고, 에티오피아 포로 가운데는 신분을 감추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왕 아모나스로(Amonasro. 바리톤)가 섞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 아이다를 시켜 라다메스에게서 이집트 군대의 기밀을 알아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밀을 누설한 라다메스는 절망에 빠집니다. 아모나스로가 아이다와 함께 에티오피아로 가자고 라다메스를 설득할 때 암네리스 공주가 나타나 라다메스를 반역죄로 체포하게 하는데, 라다메스는 필사적으로 아이다와 아모나스로를 도망시킵니다.
암네리스는 라다메스에게 아이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지만, 라다메스는 신전 사제들의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채, 산 채로 돌무덤에 갇히는 사형선고를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라 짐작한 아이다는 미리 돌무덤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다가 라다메스를 맞이해 서로의 굳건한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암네리스와 라다메스의 무대장면. 암네리스는 라다메스를 사랑하며, 아이다를 질투하는 이집트의 공주이다.
침략주의적 색채가 짙은 개선장면의 개선(改善)
[아이다]를 초연했을 때 베르디의 나이는 58세. 이탈리아 국민음악가이자 유럽 최고로 군림하는 오페라 작곡가였지만 베르디는 이미 자신의 시대가 지났다고 느꼈습니다. 온 유럽이 바그너 오페라에 환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선율,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 불협화음, 마치 현대 영화음악처럼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바그너의 음악이 오페라 관객을 매혹했던 것입니다. 베르디 역시 [돈 카를로] 등에서도 꾸준한 음악적 변화를 시도했지만, 특히 [아이다]에서는 현대적 화성이 더욱 돋보이게 작곡했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까지 했던 베르디는 정치발전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를 품었습니다. 당대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들의 보수반동적인 태도와 선동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베르디는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도망쳐 아득한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를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연출가들은 [아이다]의 개선행진 음악이 뿜어내는 전체주의적, 침략주의적 색채를 혐오해, 개선장면을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연출하기도 합니다. 이 장면의 금관악기 소리가 화성적으로 귀에 거슬리는 이유는 편협한 애국주의를 비웃으려는 작곡가 베르디의 본래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사방과 천장이 밀폐된 돌무덤 속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맞이하는 죽음은 개인을 억압하고 흡수해버리는 거대한 사회에서 개인이 개인으로 남기 위한 유일한 선택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암네리스 공주와 이집트 사제들로 대표되는 무덤 밖 권력자들을 가볍게 뛰어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동시대 오페라 역시 이승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죽음을 통해 이루는 순수하고 강인한 주인공들을 보여줍니다
전처는 전남편과 관련된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허트로커'로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한 캐서린 비글로(59) 감독은 최근 보내온 이메일 인터뷰 답변에서 오스카를 두고 경쟁했던 전남편이자 '아바타'를 연출한 제임스 캐머런(56)과 그의 작품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간 '남자들의 영화'를 주로 찍어왔고 첫 전쟁영화로 아카데미를 휩쓴 신장 182cm의 이 감독은 "여성으로서 처음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감회"에 대해서조차 침묵했다.
-전쟁영화를 찍은 계기가 있습니까.
"마크 보울(작가)은 이라크 종군취재에서 돌아와 폭탄제거반에 대해 얘기해 줬습니다. 그들이 반경 300m를 궤멸시킬 수 있는 폭탄을 작은 공구로 해체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죠. 게다가 그들은 이 일을 자원하고, 심지어 즐긴다는 것을 알았을때 나는 이작품을 찍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영화엔 교전이나 폭격같이 전쟁영화에 흔한 장면이 거의 없는데요.
"마크는 교전 경험은 없지만 포화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그의 경험 덕분에 나는 관객들이 전장에 있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 수 있었죠. 극장을 나설 때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고 싶을 정도로요. 이 영화에서 관객은 전투병의 눈으로 영화를 봅니다. 3층 발코니에 있는 사람이 빨래를 너는 건지, 저격수에게 연락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도록 말이죠."
-그래서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집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관객들이 전장에 나간 심정이 되게끔하는 것이었죠. 가능한 한 사실과 비슷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어요. 그러면 관객은 마치 군화를 신고 군용트럭에 탄 것 같을 겁니다. 사실상 관객이 폭타제거반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하는것이죠."
-극 중 주인공은 전쟁 중독자로 보이지만 악인으로 묘사되지도 않는 게 독특했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위험한 임무를 대단한 기술로 수행해 냅니다. 그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살려내지요. 그러나 그가 미국에 돌아와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를 때는 어쩔 줄 몰라하지요. 이것이 이 영화의 역설이며 전쟁의 흥미로운 점, 또는 전쟁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시나리로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명배우들 위주로 캐스팅한 이유는.
"관객들은 배우마다 기대치가 있어서, 유명배우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무명배우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긴장이 더욱 커지는 것이죠."
'4월 22일 개봉 되는" hurt locker" 오스카,감독상,작품상..6개부문의 상을 휩쓸어서가 아니라,멋진 케서린의 빛나는 진면목을 불 수있는 기회 이기도하고, 영화속의 나를 볼 수 있을 것 이란 생각이 들어서 놓치지 않고 보려고 합니다~~~*'
러셀 크로우가 신작 '로빈후드'의 캐릭터를 위해 혹독한 체중감량을 감행했다. 제작단계부터 '글래디에이터'의 리들리 스콧 감독과 러셀 크로우가 10년만에 다시 재결합해 화제를 모은 '로빈후드'는 평범한 활잡이에서 부패한 권력에 맞서 스스로 반역자가 된 영웅 로빈후드를 그린 액션 서사극.
캐릭터를 위해 억양고치기와 체중 불리기 등 완벽한 준비로 유명한 러셀 크로우는 '로빈후드'를 위해 당시 시대와 역사, 로빈후드의 전설과 관련된 수많은 서적을 독파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특히 극중 천부적인 활잡이의 모습에 걸맞게 10kg이상의 체중감량을 하며 근육을 키우고 3개월 이상 강도 높은 궁수 트레이닝을 소화하는 등 '로빈후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할리우드 관계자는 "자연스런 로빈후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올림픽 선수처럼 하루 200개 이상 활쏘기 연습도 했다"고 전했다. 그 결과 러셀 크로우는 활로 사냥을 하고 심지어 120야드(약110m)거리의 카메라를 향해 활을 쏘면 똑바로 카메라에 날아갈 만큼 전문 궁수가로 거듭났다는 후문이다.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로빈후드'는 내달 13일 전세계 동시 개봉된다. (배우로서 한 남자로서 노력하고,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넘 멋진 러셀!!)
작년 9월, 7년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컴백앨범 <I LOOK TO YOU>로 화려하게 부활한 휘트니 휴스턴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휘트니 휴스턴은 10년만의 정규 월드 투어인 Nothing but Love World Tour를 시작하며, 한국을 월드 투어의 첫 무대로 결정하고, 일본, 호주, 유럽투어로 이어지는 일정을 확정하였다. 지난 12월 이번 월드투어의 리허설 무대를 러시아에서의 2회 공연으로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재정비된 투어팀과 함께 휘트니 휴스턴 만의 마법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월드 프리미어 무대를 만나게 될 예정.
팝의 역사를 다시 쓰는 휘트니 휴스턴의 감동적인 무대를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출연 :
전 세계가 기다려온 전설적인 디바의 컴백! 10년 만의 월드투어, 역사적인 첫 무대를 장식할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VIII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963년 8월 9일,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휘트니 휴스턴은 소울(Soul) 뮤지션이었던 어머니 시씨 휴스턴과 사촌 디오나 워릭, 할머니 아레사 프랭클린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가스펠 음악을 부르며, 음악적인 재능을 키웠다. 이후 그녀는 패션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한 뒤, 아리스타 레코드의 사장인 클라이브 데이비스에 의해 발탁되어 음악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앨범 을 발매하며 데뷔한 휘트니 휴스턴은 이 앨범으로 미국 내에서만 1,300만장, 전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놀라운 음반판매고를 기록하며, 데뷔 앨범으로는 최다 판매기록을 세웠다. 이 앨범에서 발표된 4장의 싱글은 모두 싱글 차트 Top 5안에 진입했고, 첫 싱글 'You Give Good Love'(3위)를 제외한 3곡의 싱글('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이 연속으로 팝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데뷔앨범에서 3곡의 1위곡을 배출한 최초의 아티스트가 됐다.
이러한 상업적 성공은 각종 음악 관련 상의 수상과도 직결됐다. 휘트니 휴스턴은 1986년 2월에 열린 제 2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팝 부문 최우수 여성 보컬리스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1986년과 1987년 두 해에 걸쳐 7개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또 1986년 빌보드지 연말결산 차트에서 여자가수로는 처음으로 'Top Pop Artist'에 올랐고, 데뷔 앨범은 'Top Pop Album'과 'Top Black Album'에 선정됐다.
1987년 두 번째 앨범 <Whitney>는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팝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에서 동시에 1위로 차트에 데뷔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앨범으로 휘트니 휴스턴은 전 유럽차트는 물론, 아시아와 남미지역에서도 절정의 인기를 누리며, 전세계적으로 휘트니 휴스턴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진정한 소울 음악으로의 변신을 시도한 3번째 앨범에서 휘트니 휴스턴은 보컬리스트를 넘어 제작에까지 참여하는 등 새로운 음악적 커리어를 쌓기도 한다.
1992년 만능 엔터테이너로 변신을 꾀하며 영화 '보디가드'에 출연한 휘트니 휴스턴은 영화의 OST를 무려 20주 동안이나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등극시키며, 1990년대 미국에서 발표한 앨범 중 최고 판매고를 기록한다. 특히 이러한 전 세계적인 신드롬은 우리나라로까지 이어져 팝 앨범 사상 전무후무한 120만 장이라는 엄청난 음반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7살 연하의 가수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을 발표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노래에 담을 줄 아는 아티스트로 성장한다. 명실 상부한 여성 최고의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한 휘트니 휴스턴은 이른바 여성가수들의 역할모델로서의 위상을 다지며, "디바 열풍"을 이끄는 장본인이 된다.
1998년에는 머라이어 캐리와의 듀엣곡 등을 포함해 발매한 <My Love is Your Love> 앨범을 통해 진정한 흑인음악을 구사하는 흑인 가수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줬으며, 이는 전작 앨범들에 비해 저조한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으로는 앞으로 추구할 음악을 뚜렷하게 제시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휘트니 휴스턴은 이후 조지 마이클과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 최고의 아티스트들과의 듀엣곡들이 수록된 베스트앨범 <The Greatest Hits>와 R&B음악을 그녀만의 다양한 보컬 기교로 재해석한 앨범 <Just Whitney>를 발매했다.
그러나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 브라운과의 불운한 결혼생활로 음악적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전세계 팬들은 그녀의 재기를 반신반의했고, 언론 역시 그녀가 과거와 같은 환상적인 목소리를 회복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2009년 2월 프리 그래미 파티에서 그녀를 발굴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가 "휘트니 휴스턴이 컴백 준비를 모두 끝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해 가시화 된 그녀의 컴백은, 2009년 9월 새 앨범 <I LOOK TO YOU>로 화려하게 실현되었다. 이번 앨범에는 전설적인 작곡가 데이빗 포스터를 비롯, R&B의 젊은 거장인 알 켈리, 에이콘과 알리시아 키스 등이 참여해 휘트니 휴스턴 특유의 청량하면서도 유려한 명품 보컬에 여유와 모던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휘트니 휴스턴의 컴백에 대한 음악계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다. 롤링스톤즈가 AMA시상식 무대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공연을 본 후 "예전의 휘트니가 돌아왔다"며 찬사를 보낸 것을 비롯해, 더욱 원숙해진 그녀의 음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그간 불운한 사생활에 따른 슬럼프를 딛고, 마흔 일곱의 나이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휘트니 휴스턴. 그녀의 첫 내한공연에서 아픔을 이겨내고 더욱 성숙해진 그녀의 음악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