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땅에서 만나는 피라미드는 의외로 친숙하다. 수천 년 세월이 담겼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진귀한 보물이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존재감은 일상과 가깝다. 이집트기자 지구의 피라미드 역시 삶과 뒤엉켜 있다. 수도 카이로에서 외곽으로 접어들면 시야에 들어오는 게 '삼각의 무덤'들이다. 변두리 재건축 지역에 우뚝 솟은 회백색 건물처럼 피라미드는 생뚱맞게 서 있다.
기자 지구 피라미드. 책 속에서 봤던 피라미드 군이 나란히 도열해 있다.
기자 지구 피라미드는 보통 카이로의 한 부속 관광지처럼 설명되곤 한다.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버스로는 40분 정도 걸린다.' 4,500년 역사를 지닌 피라미드 입장에서 보면 마뜩잖다. 카이로가 도시로서 의미를 갖춘 것은 바빌론 성을 쌓은 후부터니 피라미드보다 2,000년쯤이나 뒤진다. 기자 지구 일대는 카이로가 들어서기 전, 이미 고대 왕국의 혼이 담겼던 곳이다. 어쩌면 이곳 투박한 땅에서 어색한 것들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의 경관일지도 모른다.
4,500년 역사의 쿠푸왕 피라미드
이집트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는 70여 개가 넘는다. 나일강 일대, 문명의 발상지에 고루 흩어져 있다. 그중 기자 지구의 3대 피라미드는 가장 빼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부터 카프라왕,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 등 사막 위에 도열한 세 개의 무덤들은 묘한 여운이 서려 있다. 그 중 대 피라미드로 알려진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650년경 전 만들어진 것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대표주자다. 원래 높이가 145m였으며 수 톤 무게의 석재들만 200만 개가 넘도록 쌓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쌓아올린 석재에는 수천년 세월이 담겨 있다.
가장 크고 오래된 규모를 자랑하는 쿠푸왕 피라미드.
이제는 유명 관광지가 된 피라미드에 닿는 길이 수월하지만은 않다. 다가서기 전 낙타 몰이꾼을 만나고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접근하는 호객꾼들의 성화가 이어진다. 수천 년 역사를 조용하게 음미할 여유가 부족하다. 하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만나는 '진통' 쯤으로 생각해 두자. 오히려 경계할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훌쩍 이동하려는 가벼운 마음이다.
이곳 피라미드는 보는 위치와, 높이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바위 하나하나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윤곽도 변한다. 멀리서 웅장한 자태를 감상했으면 사막의 태양 아래 반만년을 견뎌온 바위 하나하나를 곱씹어 본다. 돌덩이에는 지난한 세월의 온기가 전해진다.
이집트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군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투박한 땅 위 피라미드 인근에는 도시가 형성돼 있다.
피라미드의 실체에 궁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서는 투어에 나선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오갈 작은 통로가 무덤 속에는 미로처럼 뻗어 있다. 이집트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은 쌓인 돌들을 바라보며 프랑스 전 국경에 장벽을 세울 수 있겠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황무지에 쌓아 올린 '세계 불가사의'
피라미드를 둘러싼 학설은 하나로 모아진다.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며 왕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계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왕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고 태양신과 함께 하늘을 순회한다고 믿었다. 피라미드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활발하게 계속됐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만 정확한 축조법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10만 명이 동원돼 20여 년 동안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집트인의 신앙심이 표출된 피라미드에 대해 건축가 알베르티는 '미치광이의 발상'이라며 헐뜯기도 했다.
피라미드를 지키는 역할을 했던 스핑크스는 세월이 흐르면서 다소 애착이 가는 모습으로 변했다.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는 길이 57m, 높이 20m의 대단한 덩치를 자랑한다. 하지만 아랍인의 침입 때 코가 잘리고 영국에 수염도 빼앗긴 뒤로는 다소 애처로운 모습이 됐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배경 삼아 야간에는 '소리와 빛의 쇼'가 펼쳐진다. 형형색색 화려하지만 수천 년 잠들어 있을 무덤 속의 왕에게는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다.
피라미드에서 나서면 복잡한 거리가 형성돼 있다. 현지인들은 아흐라무 거리, 여행자들은 피라미드 거리로 부르는 곳이다. 이집트의 각종 맛집들과 상가들, 전 세계 패스트푸드점들이 거리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2012년에는 이곳에 투탕카멘 등의 유물이 보존될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고대의 왕들은 수천 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흔적에 기대어 살 '고마운' 터전을 마련해 줬다.
피라미드를 구경하기 위해 나선 이집트 소녀들.
이집트의 전통 종이 파피루스에 새겨진 그림.
피라미드가 전통적인 삼각탑 형태만 지닌 것은 아니다.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피라미드의 모양은 지역에 따라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기자 지구 인근인 사카라의 조세르왕 피라미드는 계단식으로 돼 있으며, 다슈르는 한쪽 변이 굴절되거나, 벽돌색이 붉은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이 일대의 피라미드들은 고대 왕국이었던 멤피스의 영화로움을 반증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이집트를 찾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피라미드를 알현해야 할 듯한 유혹에 빠진다. 그 앞에 서면, 무슨 주문에라도 홀린 것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수천 년 세월의 흔적에 고개를 떨어뜨리게 된다.
가는 길 인천~카이로 구간은 대한항공, 카타르항공 등이 운항 중이다. 이집트 입국 때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하다. 30일 동안 유효한 비자를 현지 공항에서도 발급받을 수 있다. 카이로에서 기자 지구까지는 버스가 운행되며 택시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기자, 사카라, 다슈르를 어우르는 현지 투어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① 페라리가 2002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이후 8년만의 '순위 담합 사건' 재연으로 포뮬러원(F1)이 술렁이고 있다..
② 페라리는 지난 25일 오후 2시(현지시간) 독일의 호켄하임링(1주, 4.574km)에서 열린 2010 F1 월드 챔피언십 제11전 독일GP에서 개막전 이후 모처럼 만에 선두권을 형성하며 경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49바퀴째에 1위 펠리페 마사(29, 브라질)가 2위 페르난도 알론소(29, 스페인)에게 고의로 순위를 양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③ 경기 직후 국제자동차 연맹(FIA)은 페라리 팀원들과 면담 후 '팀오더 규정'을 위반했다며 벌금 10만 달러를 부과했다. 또한 FIA는 세계모터스포츠위원회(WMSC)에 회부해 추가 징계 여부를 논하겠다고 밝혔다.
④ 이번 사건은 과거 2002년 오스트리아GP에서 루벤스 바리첼로(38, 브라질)가 경기 종료 직전 속도를 늦춰 미하엘 슈마허(41, 독일)에게 우승을 양보한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당시 사건의 주범이었던 페라리가 또 다시 일을 저질렀으며 당시 퍼스트-세컨드 드라이버가 확실히 구분되던 팀 양상이 현재 페라리 팀에도 차츰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⑤ 이번 사건에 대해 레드불의 크리스찬 호너 대표는 영국의 오토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F1의 수치"라며 "페라리와 알론소 모두 이럴 필요까진 없었다"고 비난했다. 맥라렌의 마틴 휘트마시 대표 역시 "내 관점에서 본 이번 사건을 페라리 팀의 중역들과 이야기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휘트마시 대표는 맥라렌의 대표가 아닌 포뮬러원팀협의회(FOTA) 회장으로서 페라리 측과 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남미 대륙에서 오직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를 쓰게 된 것은 서른 두 살 청년의 운, 혹은 비운 때문이었다.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1468~1520). 바스코 다 가마의 화려한 귀환 이후 후속 탐험대를 맡게 된 그는 열 세 척의 함선을 이끌고 1500년 3월 8일, 인도로 출발한다. 바스코 다 가마가 밟았던 항로 그대로 아프리카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무역풍을 타고 가던 그는 강풍으로 돌변한 바람 때문에 표류하게 되었다. 희망봉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야 할 지점을 놓친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원뿔 모양의 산이었다. 육지가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 있었던 대륙.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브라질이었다.
현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는 거대한 예수상이 자리잡고 있다. 포르투갈에게서 독립한지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이 예수상은 그 거대한 규모로 여러 영화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높이 38m, 양팔의 길이 28m, 무게 1,145톤. 높이 710미터의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체감규모는 훨씬 더 크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6년간 에이토르 다 실바 코스타(Heitor da Silva Costa)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예수상은 기단 내부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도 갖추고 있다. 2007년에는 신 세계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리스본에도 이와 비슷한 거대 예수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테주강을 바라보고 브라질 예수상과 비슷한 포즈로 서 있는 이 예수상은 브라질 예수상 이후에 만들 어졌다. 자신들에게서 독립한 것을 기념해 만든 조각상을, 심지어 본따서 만들다니! 여하튼 기단 75m, 예수상 28m의 적지 않은 크기로 탑 내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테주강과 리스본의 전망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니, 나름대로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파두는 일종의 메아리다. 포르투갈에서 나아간 이들이 포르투갈로 가지고 돌아온 "포르투갈의 목소리"이다. 라틴어 'Fatum(숙명)'에서 유래했다는 포르투갈 전통 가요인 파두(Fado)는 주로 숙명과 좌절, 고난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포르투갈 전통의 기타반주에 맞춰 검은 망토를 걸친 여가수, 파디스따가 부르는 애절한 곡조의 파두는 전용 파두 클럽들을 통해 아직도 포르투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파두의 기원 중 가장 유력한 것은 18세기에 브라질로 이주해간 포르투갈인들이 즐기던 춤이었다는 것이다. 남미와 흑인 노예들의 음악이 포르투갈인들의 정서 속에 섞여들었다. 그것들을 선원들이 즐겨 부르게 되면서, 파두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1840년 이후에는 춤은 남지 않았고 오직 노래만이 알파마나 바이루 알뚜 부근에 위치한 수많은 파두 클럽들을 채우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은 이는 자타공인 파두의 여왕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이다. 오늘날의 파두를 만들고 전세계로 전파시킨 그녀가 1999년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포르투갈의 수상인 안토니우 구테레스는 3일간의 국장을 선포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 앨범
빈민촌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행상과 재봉사를 전전하다가 밤무대 직업가수로 데뷔한 그녀. 데뷔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타가 된 그녀의 목소리가 "포르투갈의 목소리"가 된 이유는, 노래 속에 영혼의 절규를 담았기 때문이다. 드넓은 바다를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노래, 파두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목소리 안에서 영혼을 얻었다. 그녀가 살던 집은 현재 작은 박물관이 되어, 파두에 흔들린 이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해양왕 엔리케의 눈으로 바다를 보다, 발견의 기념비
해양왕 엔리케
포르투갈이 바다를 향해 일찍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은 좁고 바다를 접한 면적은 넓은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벽이지만, 또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바다에 대한 열망을 직접 실천한 해양왕 엔리케 덕분에 유럽은 대항해시대의 막을 열었다.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1394~1460). 일찌감치 바다로 나아가야 함을 깨달은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고 그곳을 중계무역에 활용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포르투갈 남단의 알가르베 총독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유럽 각국의 항해가, 천문학자, 조선공, 지도제작자를 초빙하여 여러 항해 기기를 개발하고 선박을 개량하며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더 넓은 바다를 탐했다. 마침내 적도를 넘어 세네갈에 도착한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카보 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발한 원정활동은 이후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데도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열다섯번이나 원정대를 꾸려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미지의 땅에 보냈던 그.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은 없지만, "해양왕"이라는 그의 별칭은 과분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 해양왕 엔리케의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발견의 탑]이 세워졌다. 그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났다는 바로 그 자리다.
항해중인 범선 '카라벨'의 모양을 한 이 기념비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뱃머리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바로 해양왕 엔리케이다. 그 뒤를 바스코 다 가마, 서사시인 까몽이스, 그 외에도 많은 모험가와 천문학자, 선교사가 따르고 있다. 높이 53m로 위용을 자랑하는 발견 기념탑을 보느라 바닥을 놓치지는 말 것.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전성기 당시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나라들을 표시한 세계전도가 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
애덤 스미스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바스코 다 가마의 행로는 말 그대로의 최초가 아니라 "유럽인으로서 최초"일 뿐이지만, 유럽이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로 진입한 시발점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바스코 다 가마가 리스본을 출발한 것은 1497년 6월이었다. 그해 11월에 희망봉을 돌고,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상륙한 것은 이듬해 5월 20일이었다. 항해 자체는 괴롭고 힘들기 그지 없었다. 괴혈병, 폭풍, 그리고 선상반란의 위협이 상존했다. 하지만 항해의 성과는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후추를 싣고 1499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그는 상상을 초월한 이익을 남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왕실로부터 연금, 재산에 덧붙여 귀족의 지위까지 부여받은 그는 아직도 역사상에 탐험가의 대명사와 같이 굳건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만 "영웅"이었을 뿐이다. 1502년 다시 캘리컷에 간 그는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조각낸 신체들을 캘리컷의 왕 자모린에게 보내며 "카레를 만들라"고 비아냥거렸다. 도시를 파괴하고 무력으로 제압한 그는 포르투갈의 교역에는 톡톡히 이바지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악마'일 수밖에 없었다.
1998년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 해안에 상륙한,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인도와 포르투갈에서는 각각 기념행사가 있었으나, 그 행사의 성격은 판이했다. 리스본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벌어졌으나 인토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인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검은 깃발을 올리며 항의행진을 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가 세워진 것도 1998년이다. 떼주 강 위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총 길이 17.2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 1, 2위를 다툰다.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이토록 긴 다리에 바스코 다 가마의 이름을 붙여주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장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온 것이 아닐까?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상륙 장면
[우스 루지아다스]의 아버지가 묻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ónimos)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년~1580)는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의 책은 국내에 한권, 루지아다스가 번역되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그의 이름은 드높다. 157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 국민의 정신적인 성서"로 불린다.
수도원 건설의 스폰서였던 마누엘 1세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 바쿠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인, 즉 포르투갈인"이다. 이 애국적인 대서사시가 찬양하고 있는 것은 인도항로의 발견, 즉 바스쿠 다 가마의 첫 번째 원정이다. 이 역사적 사건은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와 얽혀 웅장한 위대함을 갖게 되었다. 11음절의 8연시(聯詩) 10편, 전부 1,102절(節)로 되어 있는 이 대작은 작가 자신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겪은 경험과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가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비견될만 하다.
현재 카몽이스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대항해시대의 고유한 건축양식인 마누엘양식으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건물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된 수도원이다. 원래는 해양왕 엔리케가 세운 예배당이었으나,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으로 증축했다. 이곳에서 리스본 항구를 출발하는 항해단을 위한 미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강에서 바다로, 벨렘 탑
리스본이 자리하고 있는 테주 강 하구는 바다와 상당히 가깝다. 테주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지점. 그곳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강물은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 물 높이의 차이를 보인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벨렘 탑이 애초에 물속에 세워진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
현재의 벨렘탑은 물 속에 있지 않다.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육지로 걸어나왔다. 처음 지어졌던 당시, 물이 차올랐다 빠지곤 했던 1층은 정치범 감옥이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19세기 초까지 감옥으로 사용되던 그 1층은, 때마다 차올랐다 빠지는 물로 죄인들을 고문했다.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 등 시대에 따라 사상은 달랐지만 그들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특징 때문에 "테주강의 귀부인"이라는 애칭까지 가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을 싸잡아 폄하하면 곤란하다.
물 위에 앉은 나비와 같다는 벨렘 탑
1515년부터 21년까지 7년간 지어진 이 마누엘 양식의 3층탑은 현재 리스본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던 3층의 테라스는 아름답고, 2층에는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어 모든 떠나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벨렘 탑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다. 선박출입을 감시하는 요새이기도 했고, 모든 탐험대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탐험가들은 오랜 항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벨렘 탑을 보았고, 돌아와 지친 눈으로 처음으로 벨렘탑을 보았다. 바다를 통해 오는 이들에게, 벨렘탑은 리스본의 얼굴이었다.
축구를 통해 세계로 나가다, 알쿠셋(Alcochete) 스타디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는 것과 축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당연히 우연이겠지만, 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과 포르투갈은 둘다 축구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축구장 전경
축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집념은 열광에 가깝다. 포르투갈에서 축구는 인생역전의 유력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정부에서도 축구를 권장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포르투갈이 배출한 세계적인 선수들의 목록을 보라. 에우제비오, 피구, 호날두 등.
대항해 시절 이후 축소되고 위축된 포르투갈에게 축구는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 아닐까? 늘 넓은 땅을 동경해온 이들에게 축구 경기장은 또 다른 '영토'인 것은 아닐까?
알쿠셋(Alcochete) 스타디움은 리스본을 대표하는 스포르팅 팀의 축구장이다. 2003년 개장을 기념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스포르팅은 3-1로 승리를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축구선수공장"으로도 불리는 이 팀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수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F1조직위는 지난 6일 오후 한국관광공사에서 열린 해외지사장회의에 참석해 해외에 영암 F1대회를 적극 홍보해줄 것을 당부하고 성공 개최를 위한 공동협력 방안을 협의했다. 이날 회의는 지난 2월 전남도와 한국관광공사간에 체결한 'F1대회를 활용한 관광산업 발전 업무협약'에 따른 것이다.
관광공사는 앞으로 F1대회를 연계한 패키지 관광상품 개발, F1 전담 여행사 운영, 4월중 여행사 팸투어 추진 등을 지원하는 등 관람객 유치를 위해 해외 네트워크망을 적극 활용해나갈 계획이다. 특히 5월에 시작하는 2010 상해엑스포와 연계한 한국관광 투자유치 설명회 및 APTIC(아시아·태평양 관광투자 컨퍼런스)에 F1대회 홍보관을 설치해 전남의 관광코스와 F1대회를 집중 부각시킴으로써 해외 티켓 판매망 구축에 공동 협력키로 했다.
김신남 전남도 F1조직위원회 기획홍보부장은 "한국관광공사의 23개 해외지사가 해외 관람객 유치를 위한 F1 한국대회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한국관광공사
"열린 사회를 만들고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Mission이라고 Facebook 설립자 겸 최고 경영자 '마크 주거버크'(26)은 말했고, 식스 어파트 CEO겸 공동 창업자 '미나 트롯' "커뮤니케이션이 진화할 수록 블로그는 진화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만약 '페이스북 나라'가 있다면 중국(13억명), 인도(11억명)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된다. 페이스북의 고향인 미국 인구는 3억명이다. 페이스북은 올해 2월 4억 명을 돌파한 지 다섯 달 만에 1억 명이 늘어나 현재는 회원수 5억명을 돌파했다.
어떻게 6년 전 미국 하버드 대학 기숙사에서 탄생한 하나의 웹사이트가 오늘날 이렇게 세계인을 이토록 열광케 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었고, 평평한 세계는 시장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제 기업 간의 경쟁은 한 국가 내에서만이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처음부터 글로벌을 겨냥한 제품을 만들지 못하면 금세 따라 잡히거나 경쟁력을 갖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스마트해진 소비자들은 더 이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 행동으로 자국 상품만을 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반영해준 현지화된 글로벌 상품에 열광한다.
처음부터 세계를 노리지 않으면 곧 도태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 국가의 소비자와의 소통이다. 쌍방향적 소통 접점을 만들고 그들의 니즈를 실시간적으로 파악하여 제품에 반영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단순히 선진시장에서 성공한 제품을 해외시장에 그대로 적용하던 것이 글로벌 비즈니스 1.0 이라면, 현지 고객과 소통하고 쌍방향적으로 운영하여 시장에 따라 조직 운영을 유연하게 가져가는 것이 글로벌 비즈니스 2.0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기업에게 더 이상 전통적 방식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기존의 글로벌라이제이션 방식은 기업이 국내시장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고객을 확보하고 사업 지식과 노하우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금흐름이 안정되고 사업기반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 성장, 발전을 하게 되면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과정에 이르는 단계별 발전을 띈 형태, 즉 SNS서비스의 싸이월드가 국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선진 나라에 론칭을 하였지만 그 결과는 한국에 비해 터무니 없는 성적을 가지고 돌아온 좋은 사례라 볼 수 있다.
그래서 AFTERABC는 설립과 함께 영어 사이트를 동시에 오픈했고 그리고 사이트 기획단계부터 '블로그 EC, 기업블로그'와 같은 핵심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개발하여 왔으며, 출시부터 신속하게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전통 기업들은 사업초기에 내수시장을 공략하고 약 5~10년 후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반면 AFTERABC(Born Global 기업)는 글로벌 비즈니스 2.0을 지향하며 그에 맞는 제품을 기획,개발하여 동일한 시기에 복수의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 설 계획이다.
최근 국내 최초로 북미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아이온'인 엔씨소프트가 개발 초기부터 철저히 글로벌 게임으로 기획하여 성공했다. 그전에 북미에 출시한 '리니지'나 '길드워', '타뷸라라사'의 실패 경험를 교훈으로 삼은 좋은 예이다.
태생부터 전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하고 있는 AFTERABC는 '5억 명 인구를 가진 AFTERABC 나라' 회원 5억명 돌파의 그 시기? 아마도 그것은, Born Global 기업으로 나가고 있는 AFTERABC 비즈니스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제 것인 양 팔았을지언정 '대동강 물'이라는 확실히 존재하는 상품을 팔았다.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구글! 구글의 데이타 베이스에 넘쳐나는 세상 모든 정보가 '대동강 물'이듯이,
2009년 미스코리아 진 김주리가 미스 유니버스 인기투표 7위에 랭크됐다. 김주리는 8월 2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되는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출전하는 후보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기투표에서 7위를 달리고 있다. 미스유니버스 공식 인기 투표 사이트(missosology.org)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번 투표는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대한민국 대표 미녀 김주리가 7위에 오른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이 같은 결과는 동양미와 서양미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김주리의 외모에 그녀만의 고고한 지적인 이미지가 한국을 넘어 세계에 통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김주리가 높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예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한편 25일 2010년 미코진 정소라 에게 왕관을 물려준 김주리는 국내무대를 떠나 이제는 해외무대로 도전한다
제 59회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출전 하기 위해 김주리는 3일 출국해 미국 LA에 머물며 한인방송 라디오 언론사인터뷰 행사 등 공식일정을 치르고 7일 라스베가스 만달레이베이 호텔에 16일 동안 합숙 후 23일 대회를 치른다.
<:OBJECT width="500" height="405">페르난도알론소, 2010 F1 11R 독일GP 우승......시즌 2승째[2010.07.25,뉴시스]
① 알론소는 25일 밤(한국시간) 독일 호켄하임 서킷에서 진행된 '2010 F1 월드 챔피언십(이하 F1) 11라운드 독일GP에서 1시간27분38초864의 성적으로 우승했다.
② 2번 그리드(예선 2위)에서 출발한 알론소는 4.574km의 서킷을 67바퀴 도는 독일GP에서 팀 동료인 펠리페 마사(29. 브라질)를 4.1초 차로 제치고 2010 F1 개막전인 바레인GP에 이어 시즌 두 번째 우승을 맛봤다.
③ 드라이버 포인트에서는 '맥라렌의 원투펀치' 해밀턴과 버튼이 각각 157점과 143점으로 1, 2위를 지킨 가운데 웨버가 136점으로 뒤따랐다. 팀 포인트 서는 맥라렌이 22점을 더하고 가장 먼저 300점 고지에 올라섰다. 레드불은 272점, 페라리는 208점으로 추격했다.
④ 2010 F1 12라운드 헝가리GP는 다음달 1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헝가로링 서킷에서 진행된다.
① 오는 10월 전남 영암서 열리는 '포뮬러원 코리아 그랑프리'를 제 시간에 관람하려면 환승 주차장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할 전망이다. F1 조직위원회가 대회 기간 중 교통난을 해결하고자 환승 주차장과 경주장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조직위가 이런 방안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서킷 접근 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탓이다.
② 현재 건설 중인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 가려면 영산강 하구둑을 건너야 한다. 현재 이곳은 출퇴근시간에도 상습 정체 구간이어서 대회 기간엔 경주 시작 전과 끝난 직후 엄청난 교통 체증이 예상된다.
③ 우선 조직위가 예상하는 정체 구간은 목포 나들목부터 영산강 하구둑을 지나 경주장에 이르는 18km 구간이다. 예상 정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경주 시각까지 이며, 경주가 끝난 직후에도 정체가 예상ㅈ된다. 따라서 조직위는 승용차의 유입을 줄이거나 분산시켜 교통체증을 해결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④ 이와 관련해 F1 조직위 관계자는 "경주장에서 가깝게는 5km부터 멀게는 50km까지 환승 주차장을 설치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할 예정"이라며 최소 10분에서 많게는 1시간까지 걸린다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또한 "F1 버스 차선을 운영해 셔틀버스를 이용해야만 제 시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F-1 그랑프리의 전경기 티켓은 F-1을 주관하는 FOM(Formula One Management)에서 각 경기가 열리는 지역의 주최권자와 협의하여 결정됩니다. 보통 FOM이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각국의 주최권자가 그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각 국별로 사정에 따라 판매시기와 가격등을 조정하게 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라남도가 최대주주로 되어있는 KAVO가 국내 주최권자이기 때문에 자연히 FOM과 KAVO가 협의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해외 판매는 F-1 공식 웹사이트(www.f1.com) 혹은 FOM에서 지정하는 여러 티켓 에이전시에서 판매하게 되고, 국내에서는 역시 KAVO가 지정하는 여러 티켓 에이전시에서 판매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국내에서의 티켓 판매 시기는 명확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의 관례를 감안해볼때 경기가 개최되기 6개월에서 3개월 사이에 판매 시작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우리나라 경기가 10월 15일부터 17일까지이니까 최소한 4월~7월중에 판매가 시작되지 않을까 싶네요.
가격에 대해서는, FOM에서 티켓 클래스별 가격에 대해서도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고, 어느나라나 거의 비슷한 가격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저렴한 티켓인 일요일 입장권(결승전이 열리는 일요일 경기장 '입장'만 되는 티켓으로, 좌석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티켓입니다. 일종의 입석 티켓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의 경우가 약 100 US달러 정도 하는 편입니다. 이런 입장권도 보통 예매를 하는 편이 좋습니다. 국가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도 매진되면 현장 판매가 안 되니까요..
티켓의 등급에 대해서는 각 서킷별로 코스 구간에 따라, 혹은 스탠드 아래쪽과 윗쪽에 따라서도 요금이 차등지정됩니다. 일반적으로 F-1 경기때 패독 클럽과 같은 스페셜 티켓을 제외한 일반 스탠드 좌석 요금중 제일 비싼 곳은 메인 스탠드의 가장 끝부분이거나 혹은 1번코너나 마지막 코너 부근이 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메인스탠드 가운데같은 부분은 F-1 머신들이 한창 가속이 붙어있기 때문에 스탠드에서 머신 식별이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사실 이 구간에서는 메인 스탠드에 있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야 확인이 가능하기도 하다는...) 그래서 차라리 머신이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감속을 하게 되는 1번 코너나, 혹은 코너를 빠져나와서 가속을 시작하는 마지막 코너 부근, 그리고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 메인 스탠드 끝이 머신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비싸다고 합니다.
25일 열린 2010 시즌 포뮬러원(F1) 월드 챔피언십 11라운드 독일 그랑프리(GP)에서 페라리가 원투 피니시로 시상대를 점령했다.
이날 우승한 페르난도 알론소(페라리. 스페인)는 4.574km의 서킷을 총 67바퀴 도는 독일 호켄하임 서킷을 1시간27분38초864라는 기록으로 주파해 시즌 개막전인 바레인 GP 우승에 이어 두 번째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날 경기는 페라리팀의 기민한 운영 전략이 빛났다. 3번째 그리드에서 출발한 펠리페 마사(페라리. 브라질)가 출발 직후 첫 코너에서 세바스찬 베텔(레드불 레이싱. 독일)을 앞지르며 1위로 올라섰다. 이후 마사는 경기 후반 더 빠른 스피드를 기록하던 팀 동료 페르난도 알론소에게 선두를 내주는 콤비 플레이로 소속팀에 시즌 첫 원투 피니시를 안겼다.
이와 달리 폴포지션을 획득하며 홈 경기 우승에 기대를 모은 세바스찬 베텔은 페라리의 압박에 선두권을 내주고 아쉬운 3위에 머물렀다. 또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메르세데스GP. 독일)는 9위에 머물렀다.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맥라렌은 루이스 해밀턴(맥라렌. 영국)과 젠슨 버튼(맥라렌. 영국)이 나란히 4, 5위를 차지하며 시즌 득점 선두를 지켜냈다. 이로써 시즌 11라운드까지 드라이버 포인트는 루이스 해밀턴이 157점으로 1위, 젠슨 버튼이 143점으로 2위, 마크 웨버(레드불 레이싱. 호주)와 세바스찬 베텔이 136점으로 공동 3위를 달리고 있다. 이번 경기에서 우승한 페르난도 알론소는 123점으로 5위다.
컨스트럭터즈에서는 맥라렌이 300점을 달성하며 1위를 지키고 있다. 그 뒤로 레드불 레이싱이 272점, 페라리가 208점으로 삼파전의 선두 그룹을 형성했다. 맥라렌과 레드불의 양강 구도에 강호 페라리가 가세한 가운데 올 시즌 12라운드는 다음달 1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펼쳐진다
③ 짜릿한 야간 스피드 축제 관람을 위해 싱가포르 항공이 F1특별 패키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싱가포르 항공 측은 오는 9월 24일(금)부터 26일(일)까지 2박3일 F1관광패키지를 마련해 국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④ 프로그램 명은'SIA Holidays F1 그랑프리'. 2010 싱가포르 그랑프리 에어텔 패키지는 항공, 숙박, 교통편을 한번에 해결해 자동차경주 팬들이 자유롭게 경기와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상품으로 구성했다.
⑤ 특히, 올해 개장한 복합 엔터테인먼트 리조트인 '리조트월드센토사'와 '마리나베이샌즈', 바다를 메워 만든 '리조트월드센토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카지노, 동남아시아 최초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테마 별 6개의 고급 호텔, 쇼핑몰 페스티브 워크 등을 갖춰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다.
F1 조직위원회가 대회기간 중 교통난을 해결하고자 환승 주차장과 경주장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조직위가 이런 방안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서킷 접근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탓이다.
현재 건설 중인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 가려면 영산강 하구둑을 건너야 한다. 현재 이곳은 출퇴근 시간에도 상습 정체 구간이어서 대회 기간엔 경주 시작 전과 끝난 직후 엄청난 교통 체증이 예상된다. 게다가 우회로는 2011년에나 완공될 예정어서 결국 셔틀버스를 적극 활용키로 했다는 게 조직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우선 조직위가 예상하는 정체 구간은 목포 나들목부터 영산강 하구둑을 지나 경주장에 이르는 18km 구간이다. 예상 정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경주 시각까지이며, 경주가 끝난 직후에도 정체가 예상된다. 따라서 조직위는 승용차의 유입을 줄이거나 분산시켜 교통체증을 해결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조직위에 따르면 경주장 출입 예정인 운전자는 주차권이 확인돼야 경주장에 주차할 수 있고 환승주차장도 이용할 수 있다. 경주장은 유료로 운영하며 환승주차장은 무료다.
이와 관련해 F1 조직위 관계자는 "경주장에서 가깝게는 5km부터 멀게는 50km까지 환승 주차장을 설치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할 예정"이라며 "최소 10분에서 많게는 1시간까지 걸린다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또한 이 관계자는 "F1 버스 전용 차선을 운영해 셔틀버스를 이용해야만 제 시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조직위가 각 환승 주차장별 이용 인구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있어 셔틀버스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 예로 특정 환승 주차장에 관람객이 몰린다면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긴 줄을 서는 건 기본. 그렇다면 한시적인 버스 부족 사태가 생길지도 있다. 게다가 짐이 많은 관람객들은 소지품 분실 방지에도 신경쓸 수밖에 없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경주 시각을 맞추기 위해 일반 도로 위에서 버스들이 레이스를 벌이는 진풍경이 펼쳐질 가능성마저 있다.
10월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나 실제론 그렇지 않다. F1은 어느 특정 지역 만의 대회가 아니라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3대 스포츠로 자리한 국제적 행사다. 따라서 세계인이 대한민국을 지켜보고 있는 데다, 우리 국민들은 오히려 F1 성공에 의구심마저 갖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를 극복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앞으로 7년 동안 열린다고는 하지만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전라남도 영암에 경주장만 건설되는 상황이고, 뚜렷하게 대책이 마련된 것도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가능성만 무성할 뿐이다.
시작은 힘들지만 매우 중요하다. 첫 인상이 사람의 이미지를 좌우하듯 F1 GP도 마찬가지다. 세부 지침 마련은 물론 정확한 수요 예측과 빠른 대응은 필수다. 따라서 F1 GP 관람을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교통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하며,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첫 단추를 잘 꿰야 나머지 단추도 잘 꿸 수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F1 황제' 미하엘 슈마허(41·독일)가 2011년에도 국제자동차경주대회 포뮬러 원(F1) 그랑프리에 계속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AFP통신이 23일(한국시간) 보도했다.
25일 독일 호켄하임에서 열리는 2010시즌 11번째 경주를 앞두고 있는 슈마허는 "내년에도 계속 드라이버로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2006년을 끝으로 은퇴했던 슈마허는 올해 다시 F1 머신에 올랐으나 10차례 레이스에서 4위에 두 차례 오른 것이 최고성적일 만큼 팬들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슈마허는 "3년의 공백을 딛고 다시 우승하기란 쉽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1994년 F1 첫 종합 우승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2000년부터 5년 연속 등 모두 7차례나 F1 정상에 올랐던 슈마허는 "내가 지금 성적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을 즐기면서 여유를 갖겠다"며 "어차피 모터스포츠는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여전히 우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자신했다. 슈마허는 랭킹 포인트 36점을 얻어 이번 시즌 출전한 25명의 드라이버 가운데 9위에 머물고 있다. 1위 루이스 해밀턴(영국)의 145점과는 격차가 크다.
1뭄바이에는 사진작가나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포토 포인트가 하나둘이 아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성문, 비현실적일 만큼 거창한 기차역, 사람 하나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시장.... '도비 가트(Dhobi Ghat)'는 그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카메라를 끌어들인다.
마하락스미 기차역 근처에 있는 도비 가트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영 세탁소다. 말하자면 매머드급의 야외 빨래터인데, 이곳에 고용된 빨래 일꾼(dhobi)들은 매일 아침 4시부터 오후 6시까지 1인당 4백 벌가량의 세탁물을 처리한다. 이들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커다란 빨래통에 세탁물을 불린 뒤 그것을 빨아 만국기처럼 줄에 매달아 놓는다. 그 총천연색의 빨래들은 마치 혼재의 도시 뭄바이를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온갖 더러운 빨래감들이 그곳에서 새로운 내일을 맞는다.
정글북의 고향 - 키플링의 생가
"나에게는 도시들의 어머니, 내가 그 문에서 태어났기에, 야자수와 바다 사이, 세계의 끝으로 가는 증기선이 기다리는 곳." [정글북], [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디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 그가 태어난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뭄바이(Mumbai)가 아니라 봄베이(Bombay)였다.
봄베이는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거점으로 육성된 무역항이다. 뭄바이(Mumbai)라는 지역 고유의 마라티 어로 개칭된 것은 1995년부터.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봄베이라고 부르고 있고, 도시 역시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절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곳곳에 남아 있는 빅토리아 식의 거대한 건물들을 지나치다 보면, 키플링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키플링은 다섯 살 때 봄베이를 떠나 영국에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십대 후반 옥스포드 대학으로의 진학이 여의치 않자 인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봄베이 항에 들어서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 나의 영국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라호르(Lahore)를 비롯한 아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이전의 유럽인에게서는 전혀 없던 감수성을 가지고 새로운 문학을 토해냈다. 키플링이 태어난 생가는 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있었던 J.J. 응용예술학교(Sir J.J. Institute of Applied Art)의 캠퍼스 안에 남아 있다.
키플링과 [정글북]의 감수성은 봄베이 해안에서 태어났다.
모든 신들과 짐승들의 기차역
1903년의 빅토리아 터미너스.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도시는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다. 건축물에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라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 정점이 아마도 이 기차역(차트라바띠 시와지 터미너스, Chhatrapati Shivaji Terminus) 같다. 봄베이-뭄바이처럼 구 영국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빅토리아 터미너스라는 이름을 내던졌지만 여전히 빅토리아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터미너스는 1887년 '대 인도 반도 철도회사(Great Indian Peninsular Railway Company)'의 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웅장한 고딕의 형체 위에 온갖 상상과 현실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 카메라를 들이대다 보면 메모리 용량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식민의 도시이며 불복종의 도시 - 간디 기념관
인도인들은 말한다. "뭄바이는 인도지만 인도가 아니다. 오히려 유럽에 가깝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봄베이는 동인도 회사와 영국의 식민 거점이었다. 초기에는 아라비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본토와는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1818년 마라타인들을 물리치고 서부 인도의 영토를 합병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인도 식민화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도 독립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였기도 하다.
뭄바이에는 파시족이라는 페르시아 계의 소수 민족이 경제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밝은 피부를 지니고 있는 그들은 일찍부터 영국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무굴 제국과의 거래 중계를 통해 영국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인도 식민화가 가속화되자 그 독립 운동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베푼 것도 그들이었다. 덕분에 뭄바이는 인도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끝없는 투쟁의 장소가 되었다.
뭄바이에 있는 간디 기념관(Mani Bhavan)은 그를 지지했던 친구의 집으로, 간디가 각지의 지지자들과 만난 장소였다. 1917~1934년에 독립운동 본부로 사용되었고 1932년 간디가 체포된 장소이기도 하다. 2층에 보존되어 있는 간디의 방에는 그가 실 잣는 법을 배우던 현장과 그가 애용하던 대나무 지팡이 등이 재현되어 있다.
뭄바이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기억한다.
볼리우드의 환영 - 필름 시티
볼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때 인도 하면 '카레'를 떠올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바로 '맛살라' 영화다. 온갖 향신료를 집합해놓았다는 뜻의 '맛살라'는 인도 영화의 특색을 곧바로 전해준다. 영웅과 미녀의 로맨스, 춤과 노래의 향연, 권선징악과 쾌락의 공존.... 한 편의 영화 안에 좋다는 것은 모두 모아놓았다. 그 양념의 향연을 만들어내는 제작소 볼리우드(Bollywood)가 바로 뭄바이다.
봄베이와 할리우드가 합쳐져서 태어난 단어인 '볼리우드'는 원조 할리우드를 넘어 세계 최다의 영화 제작 편수를 자랑한다. 그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 뭄바이 북쪽 산제이 간디 국립공원에 인접해 있는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인 '필름 시티(Film City)'다. 현지 투어를 이용하면 여러 영화의 제작현장을 둘러본 뒤 맛살라 스타일의 디스코 파티로 마무리 할 수 있다. 시내에 있는 100개가 넘는 영화관 역시 볼리우드의 진면목을 현지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다. 처치게이트 스테이션 맞은편의 에로스, 메트로 극장 등이 유명하다.
슬럼 위의 공중 정원 - 행잉 가든
볼리우드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 중, 이 도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는 아마도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아닐까? 영화는 도시 북서쪽에 있는 주후 슬럼에서 태어난 어린 주인공들이 암흑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백만장자 퀴즈 대회'를 통해 보여준다. 대니 보일 특유의 스타일 감각이 굴절된 렌즈를 제공하지만, 영화는 이 도시의 극과 극, 빈곤과 사치의 대조를 분명히 보여준다.
말라바 언덕에 있는 행잉 가든(Hanging Garden)은 이 도시의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 같다. 이 도시 연인들의 쾌적한 데이트 장소인 이 정원은 문자 그대로 호수 위의 공중에 지어져 있다. 이 근처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인 파시족들이 시체를 독수리에게 쪼여 먹이는 '침묵의 탑'이 있다.
공중정원에서 도시의 아이러니를 내려다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새들은 시체를 포식한 뒤 가까운 이 호수로 날아가 목을 축이는데, 그 때문인지 호수의 물이 지독히 오염되었고 공원을 그 위 공중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독수리가 거의 사라졌는데, 시체들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을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 풍문도 있다.
웃음의 요가 - 게이트 오브 인디아
조지 5세의 방문을 위해 지어진 '게이트 오브 인디아'. 웃음 요가의 명소가 되었다. <출처: (cc) Rhaessner at en.Wikipedia>
'게이트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는 1911년 영국 왕 조지 5세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바다 위의 거대한 문이다. 그 지나친 스케일이 희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건축물인데, 매일 아침 그 문 아래에서 혼신을 다해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국의 인도 지배를 비웃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웃음 요가'를 하고 있다.
뭄바이의 의사인 마단 카타리아(Madan Kataria)는 1995년 모두 다섯 명의 구성원을 모아첫 번째 공개적인 웃음 클럽의 행사를 열었다. 웃기는 일이 없어도 웃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 웃음 요가는 곧바로 큰 인기를 모아 전 세계 60여 개국에 퍼져 나갔고, 뭄바이에만 70개 이상의 클럽이 만들어졌다. BBC의 다큐멘터리 [휴먼 페이스]의 진행자인 코미디언 존 클리즈는 뭄바이의 교도소에서 열리는 웃음 요가 행사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것도 요가인 만큼 무턱대고 웃는 게 아니다. 절차와 수련법이 있다. 깊은숨을 들이쉬고 웃음 연습을 시작해, 침묵의 웃음, 사자의 웃음, 칵테일 웃음 등을 배워나간다.
오는 7월 전남 영암에서 열리는 2010 포뮬러원(F1) 코리아 그랑프리의 홍보대사로 선임된 류시원이 영암 F1 흥행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세계 3대 스포츠의 하나인 포뮬러원의 한국 대회의 얼굴인 홍보대사를 맡게 된 류시원은 최근 <폴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포뮬러원과 모터스포츠를 삶의 일부로 생각할 만큼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며 "앞으로 선진적인 레이스 문화가 국내외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류시원은 영암 F1 흥행에 대해 "아직은 국내에서 F1 그랑프리에 대해 인지도나 지식이 대중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조심스런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때문에 모터 스포츠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우려도 되지만 올 해 코리아그랑프리 홍보대사를 맡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모터 스포츠 대중화에 앞장 서려고 한다"며 "개인적으로는 F1 그랑프리는 평생에 한 번은 꼭 봐야 할 스포츠라 생각한다. 모터 스포츠 인으로서 누구보다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반드시 흥행에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지금까지 8번의 F1 경기에 참관했다"는 류 감독은 "참관 시 우연인지 운이 좋았었는지 패독 클럽에서 제가 좋아하는 슈마허, 알론소, 루이스 해밀턴 선수를 직접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어서 굉장히 영광이었다"며 "개인적으로 그들과 함께 서킷을 달려보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드라이버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꿈은 존재한다"고 설명하며 "하지만 현재로서는 먼 길이라 생각해 늘 꿈속에서 출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CJ레이싱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절친 김의수 선수와 "일본의 디원 드리프트 시합이 보고 싶어 관람한 적 있다"는 류 감독은 실제 "PIAA HONDA팀의 니폰 포뮬러 3000 클래스 나가시마 감독이 한국 방문 했을 때 정식으로 3000 클래스에 출전해보겠냐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며 "그 전에도 슈퍼 다큐 라던지 여러 번 기회는 많았지만 현재는 감독으로서 국내 프로팀 중 최고의 팀을 목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활동에만 집중할 생각이고 목표를 이룬 후 한번쯤은 해외 진출도 생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 회 타국의 모터스포츠 현장을 직접 체험해 본 류 감독은 '한국과 타국의 모터스포츠 분위기에 대해 "사실 국내 모터스포츠 현실은 시설이나 흥행, 지원 등 환경이 여러 가지로 매우 어렵다"며 "실제로 1~2 개뿐 인 서킷 조차도 운영이 여의치 않기도 하다"고 뒤처지고 있는 국내 모터스포츠 현실을 아쉬워했다.
이어 "이는 한국이 최고라 할만한 수준의 자동차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터스포츠 인으로서 매우 안타깝다"며 "외국은 체계적이고 좋은 시설들과 다양한 경기장이 있다. F1 코리아 그랑프리를 계기로 영암 서킷 등 시설에 대한 투자가 진행 중이고 국내 모터스포츠도 앞으로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고 기대감을 드러내보였다.
한편, 한류스타가 아닌 레이싱팀 감독으로써의 류시원의 이야기는 <폴리뉴스>자매지 <폴리피플>4월호에서 자세히 엿 볼 수 있다
밀라노 는 콧대 높은 도시다. 누구나 동경하는 '명품 1번지'이고,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 두오모는 웅장함에다 세련미까지 갖췄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말끔한 슈트 차림의 멋쟁이들이 활보하는 골목길에서 덩달아 폼을 낸다. 밀라노에 들어서면 일단 옷깃에 힘부터 줘야 한다.
도도한 도시에서는 붉은색 벽돌의 한 건축물에 주목한다.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이다. 성당의 숨겨진 자존심만은 밀라노의 어느 공간에도 뒤지지 않는다. 건축의 대가인 브라만테가 1492년 완성했고, 내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이 보존돼 있다. 본당은 고딕양식이지만 브라만테의 손길이 닿은 부분은 신르네상스 양식이다. 화려한 밀라노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도 이 성당이 유일하다.
[최후의 만찬]이 전시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이 담기다
15세기 중반, 한때 서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밀라노는 부흥을 꿈꿨다. 천재 건축가와 화가를 밀라노로 끌어들인 것은 문화적, 경제적 기반을 지닌 부호들이었다. 밀라노 남부 소도시 출신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 당시 밀라노에 입성해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을 그려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세나콜로 Cenacolo]로 불리는 [최후의 만찬]은 예수의 예언을 듣고 놀라는 12제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후의 만찬]이 성당의 식당 안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산타마리아 성당의 회랑은 정교한 신르네상스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밀라노의 보석'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상.
작품과 성당은 오랜 기간 수난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7세기에 식당과 주방 사이를 넓히면서 [최후의 만찬] 중 예수의 다리부분이 잘려나갔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반원의 아치가 도드라진 교회의 대회당이 폭격을 맞아 붕괴됐다. 전반적인 복구 외에도 [최후의 만찬]의 최근 복원작업에만 20년이 걸렸다. 작품을 그려내는 것보다 7배 가량의 시간이 소요된 뒤 1999년에야 일반에 공개됐다. [최후의 만찬]이 훼손이 심했던 것은 레오나르 다 빈치가 당시 유행했던 프레스코화 대신 다양한 용매를 이용하는 '템페라' 기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 역시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는 큰 몫을 하게 된다.
본래 도미니크 수도회의 성당이었던 주요 공간들과 달리 식당을 구경하려면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입장인원과 관람시간까지 까다롭게 제한을 두고 있으며 사진촬영은 철저하게 금지된다. 재생과 복원에 오랜 정성을 기울였기에 요구되는 세심한 배려다.
성당은 투박한 도로변에 한적하게 들어서 있다. 정문 앞에는 나무벤치가 있어 여유롭게 붉은 색 벽돌의 신르네상스풍 건물을 감상할 수 있다. 성당 앞 뜰은 꼬마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도도한 명품들이 가득한 거리
밀라노에 들어서면 도심 곳곳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명품 도시' 밀라노가 아끼는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기술 박물관에는 회화뿐 아니라 과학, 해부학, 지리학, 천문학 등에도 능했던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때 밀라노 부호의 요새였던 스포르체스코성.
시내 어디서나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여인들을 만난다.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나서면 스포르체스코성으로 이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건축에 관여했던 성으로 한때는 귀족의 요새였다. 성 안은 중세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됐고 성 밖은 셈피오네 공원(Park Sempione)에 둘러싸여 있다. 녹음 짙은 공원 산책로와 성의 조화는 견고하면서도 고즈넉하다. 네 명의 제자를 곁에 두고 서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도 라 스칼라 극장 앞 공원에서 만난다. 예술의 거장이 서 있는 공원 한편에는 동성연애자들의 파격적인 키스가 눈을 현란하게 만든다.
부와 예술미를 등에 업은 밀라노는 명품과 패션의 도시로 성장했다. 몬테 나폴레오네(via monte napoleone), 델라 스피자 거리 등에는 아르마니, 프라다 등 세계최고 디자이너들의 본점이 진을 치고 있다. 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죄다 모델 같다. 패션의 거리답게 경찰들의 옷 매무새에도 세련미가 가득하다.
사방이 조각으로 채워진 대성당 두오모는 웅장하면서도 우아하다.
오렌지색 트램은 밀라노의 클래식한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밀라노의 도도함은 두오모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다. 1890년에 준공되기까지 500년의 세월이 걸렸고 수많은 건축가의 손을 거쳤다. 패션의 도시 한 가운데 위치했지만 우아함과 정교함만은 뒤지지 않은 채 밀라노를 빛내고 있다.
두오모 광장 앞 에마누엘 2세 아케이드는 쇼핑 공간인데도 바닥에 프레스코화가 칠해져 있다. 오렌지색 목조 트램은 밀라노의 명품 거리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세련된 도시는 고풍스러운 소재들이 뒤섞여 한껏 그 품격을 높이고 있다.
가는 길 밀라노까지는 다양한 경유 항공편이 운항중이다. 국제선 전용인 말펜사 공항은 유럽 각지를 연결하는 항공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열차를 이용해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하는 것도 일반적이고 수월한 방법이다.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까지는 열차로 불과 2시간 거리다. 말펜사 공항에서 중앙역까지는 2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가 운행되며 시내 곳곳은 지하철로 이동이 가능하다
브뤼셀 시민들의 유머감각은 브뤼셀에서 가장 유명한 동상, 마네캥-피스(Manneken-Pis)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관광객들을 실망시켜온 이 55cm짜리 자그마한 동상은 온갖 이야깃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장. 그랑플라스의 메종 뒤 루아 시립박물관에 있는 옷장에는 이 벌거벗은 소년의 옷이 한복을 포함하여 600벌 넘게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외국의 정상들이 방문할 때마다 소년의 옷을 선물로 챙겨왔다고 하니, 브뤼셀의 유머감각은 전염성이 강한 듯.
브뤼셀의 최장수 시민으로 사랑받는, '쥴리앙(Julian)'이라는 애칭도 있는 이 동상은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Jerome Duquenenoy)가 만들었는데, 1745년 영국에 약탈되는 것을 시작으로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1817년에 도난당했을 때는 심지어 조각 나기까지 했는데, 그것을 이어붙여 만든 것이 현재의 동상이다. 이 동상은 몇 개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프랑스군이 브뤼셀에 불을 질렀는데, 한 소년이 오줌으로 불을 껐던 사건이 이 동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이 오줌을 누는 한 브뤼셀은 안전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쥴리앙의 빈약한 몸매에 실망한 사람을 위해서 오줌 싸는 소녀의 동상도 마련되어 있다. 그녀의 옷장에는 몇 벌의 옷이 있을지 궁금하다.
모험소년의 전설, 땡땡(Tintin)
벨기에의 만화는 유명하다. 세계에서 일본인 다음가는 만화광으로 유명한 이들은 만화를 아이들의 장르로 제쳐두지 않는다. 이곳에서 그려져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만화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에서 첫손 꼽을 만한 작품으로 [땡땡, Tintin]이 있다.
용감한 소년기자 땡땡과 그의 애견 밀루의 모험을 그린 [땡땡의 모험] 시리즈는 1929년에 만화가 에르제(Herge)가 그리기 시작하여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현재 세계 60여 개국에 50개 언어로 소개되어 3억 부가 넘게 팔린 이 시리즈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굉장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에는 [땡땡과 트와존도르 호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1982년에는 작가 에르제의 75세 생일을 축하해, 벨기에 항공우주국이 당시 발견된 화성과 목성 사이의 혹성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유명인들이 땡땡에 보낸 찬사의 목록도 두툼하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땡땡은 세계에서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라고 하였으며, 조지 루카스는 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땡땡의 모험]을 모델로 한 것임을 공언했다. 앤디워홀은 "땡땡은 나의 작품 세계에 디즈니보다 더 큰 영향을 끼쳤다"며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다.
현재 브뤼셀의 지하철 스토켈 역에는 땡땡의 모험에 나오는 140개 캐릭터를 소재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137미터에 걸쳐 있는 이 대작의 스케치는 작가 에르제가 죽기 직전인 1983년에 그린 것이다. 1988년 8월 31일 역사 개장에 맞춰서 완성된 이 프레스코화는 땡땡의 팬들뿐 아니라 지하철을 이용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땡땡의 벽화로 가득 채워져있는 지하철 역.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마그리트 뮤지움은 그 자체로 마그리트의 그림이다.
황토색 배경에 파이프 하나가 그려져 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파이프다. 그 아래에 한 문장이 써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벨기에 화가로 일컬어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 작품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온갖 해석이 분분하여, 심지어 이 그림에서 촉발된 사유로 책 한 권이 나올 지경이다. 초현실주의, 데페이즈망 기법 등 다양한 해석이 시도된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한 마디로 명쾌하게 해석한다. "황당한 벨기에식 발상"이라고.
그의 작품들은 농담하면서 웃지 않는 표정처럼 진지하지만, 그가 시도하는 넌센스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충격을 주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1898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916년 브뤼셀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하면서 1927년 이 도시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르네 마그리트. 이 도시의 벽지회사에서 일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점령하에서도 브뤼셀에 남아 있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1967년 자기 침대에서 죽어 브뤼셀 샤비크 묘지에 묻힌 그.
뼛속까지 브뤼셀의 시민이었던 그의 작품들 속에서 기이한 유머감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일까? 2009년 5월, 브뤼셀에 마그리트 뮤지움이 문을 열었다. 200여 점의 마그리트의 회화, 드로잉, 조각 등을 소장한 5층짜리 미술관은 외양도 마그리트의 그림 같다. 그가 살았던 집도 작은 미술관으로 꾸며져 있으므로 마그리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군데 다 놓치면 안 될 듯.
어른들의 유머, 인형극장 투네(Toone)
TV가 없던 시절, 브뤼셀 시민들의 엄청난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웃음을 주었던 것이 바로 인형극장이다. 공식명칭은 왕립투네극장이지만, 브뤼셀 사람들은 메종 드 투네, 즉 투네의 집이라고 부른다.
투네란 인형조종사를 뜻하는 말. 대를 물려 전승되는 '투네'의 1대 시조는 1830년대부터 활동했는데, 당시 왕궁에서 코미디언들을 인형으로 대체시키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투네는 8세. 2003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인형극장의 존속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4세 투네가 활동하던 1950년대에 메종 드 투네는 문을 닫을 위기를 겪게 된다. 텔레비전이나 축구와 같은 대중적인 오락이 번성하게 되면서 구닥다리 인형극은 외면받게 된 것이다. 결국 1963년, 문을 닫기로 결정되었으나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이 '투네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투네 인형 보호하기를 호소한다. 결국 공식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면서 안정적인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인형극 자체도 볼 만한 구경거리지만 무대에서 은퇴한 인형들을 전시해놓은 것이 흥미롭다. 현재 꼭두각시 인형을 1,200여 개를 보유하고 있다고. 원래 전통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지만, 요즘은 현대적인 이야기도 레퍼토리에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아이들과 같이 보는 것. '인형극은 어린이용'이라고 맘 놓고 데려갔다가, 어른들끼리만 낄낄거리다 돌아오는 수가 있다고.
각 세대의 투네들은 자신의 포스터를 가지고 있다.
심각한 사회에 조크를 날리다, 스머프(Smurfs)
폭격 당한 스머프 마을에서 울고 있는 스머프들.
평화로운 스머프 마을, 실제로는 어디에 있을까? 실제의 장소를 찾을 수는 없지만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있다. 벨기에 만화가 페요(Peyo, 본명 피에르 컬리포드Pierre Culliford)의 펜끝이 바로 그곳.
크기는 쥐만 하고, 몸 색깔은 푸른색, 똑같이 하얀 바지와 모자를 갖추고, 사이좋게 같이 살아가는 이 상상 속의 부족에게 가장 큰 적은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과 그의 고양이 아즈라엘이다. 1958년에 첫선을 보인 이 만화는 1981년 미국에서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어진 이래, 전 세계에 푸른 웃음을 선사해왔다.
스머프가 더 유명해진 것은 이 만화가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늘 붉은 옷을 입고 있는 파파 스머프는 칼 마르크스를 상징한다고. 스머프 마을 자체가 공동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이다.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등 역할도 잘 분배되어 있으며, 모두가 평등하다. 같은 노동복을 입고 있는 그들에게는 종교도 없다. 결정적으로, 모든 캐릭터들의 뒤에 공통적으로 붙는 '스머프'라는 호칭은 '동무'를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머프가 사회문제에 무관심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2005년 벨기에 텔레비전에 방영된 25초짜리 애니메이션이 그들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유니세프가 부룬디의 소년병사 희생자들을 위한 7만 파운드의 펀드를 모으기 위해 방영한 이 캠페인은 스머프 마을이 폭격을 받아 불타고 스머프들이 학살당하는 짧은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봐 밤 9시 이후에만 방송하게 했음에도, 우연히 이 장면을 본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스머프들이 팔과 머리를 잃은 피가 낭자한 장면이 나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정도는 되어야 북카페, [cook & book]
브뤼셀 시민들의 유머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평범한 북카페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들은 'cook & book' 안에 책과 음식점을 통합시켰다. 여행, 만화, 문학, 아동, 컨템포러리 아트, 클래식 음악과 재즈 등 아홉 개의 섹션으로 된 서점과 각각의 섹션에 마련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은 하나의 큰 세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책과 요리만이 아니다. 각 방마다 독특하게 꾸며진 인테리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프랑스어로 된 책을 모아놓은 코너에서는 천정에 책들이 잔뜩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구역에는 안에 작은 사이즈의 자동차가 통째로 들어 앉아있기도.
각각의 인테리어는 그 코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어책 코너는 영국의 유니언잭 깃발을 활용한 인테리어가 돋보이고, 클래식과 재즈 코너에는 악기를 진열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천정에 난해한 재즈풍의 낙서를 잔뜩 그려넣었다. 여행코너의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알루미늄 캐러밴.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캐러밴의 한가운데에는 식탁이 마련되어 있어, 그 안에서 여행기분을 만끽하며 식사를 할 수 있다. 그곳의 램프 등은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통을 이용한 것.
어린이책과 만화 코너에는 스파이더맨 동상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책 속의 세계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놀이동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cook & book을 돌아보려면 지도가 필요하다.
브뤼셀식 유머는 벨기에를 넘는다. 아스테릭스
아스테릭스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브뤼셀에서는 곳곳에서 만화를 주제로 한 벽화를 만날 수 있다. 만화를 좋아하고 만화광임을 자부하는 이들은 만화 또한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개발해낸 것이다. 관광안내소에 가면 받을 수 있는 지도를 들고 각각의 벽화를 찾아다니다 보면, 지형지물을 이용하거나 장소의 성격을 활용한 기발한 장면들에서 만화가 가지는 유머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아스테릭스의 모험]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벽화가 그려진 곳은 축구와 야구경기장 근처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신나게 공을 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왜 프랑스작가 르네 고시니와 알베르 우데르조의 만화인 아스테릭스가 브뤼셀 벽화의 명단에 올랐을까?
유럽의 만화강국이라 할 수 있는 벨기에의 만화들은 실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거두고 있다. 만화라는 자체가 만국공용어인데다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의 특성상 벨기에 만화는 프랑스까지도 큰 독자층으로 넣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만화와 벨기에 만화를 따로 나누지 않고 프랑코 벨쥐 만화(BD franco-belge)라는 이름 아래 같이 지칭하기도 하는데, 프랑스의 이름이 앞선 것이 무색하게도, 200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만화의 75%가 벨기에 출신의 만화가나 출판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아스테릭스의 작가들도 벨기에 출판사에서 만화를 발간해왔으므로 그들에게 있어 프랑스와 벨기에를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만화를 좋아하고 실리감각이 발달한 벨기에인들은 나치가 미국만화를 금지시키거나 프랑스의 검열이 만화를 탄압하는 와중에도 예술로서의 만화의 가치를 믿고 열린 마인드를 유지해왔다.
그 결과, 이곳의 만화는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를 넘나든다. 아스테릭스는 브뤼셀의 만화일까? 그렇다. 브뤼셀 시민들이라면,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홍콩영화 팬들에게 성지로 사랑받는 빅토리아 피크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도 사랑받는 곳이다. 또한, 홍콩 최고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확실히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다들 비슷한 데가 있다. 수많은 홍콩 영화의 장면으로 이곳을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더라도 이곳의 풍광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홍콩이 자랑하는 야경이 바로 여기 있다. 센트럴의 남쪽에 있는 타이핑산의 정상. 빅토리아 피크는 홍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홍콩섬은 물론이요, 침사추이의 야경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유리의 성]에서 여명과 서기는 이곳에서 사랑을 확인한다. [성월동화]에서 장국영과 다카코 도키와가 찾아왔던 곳이기도 하다. [영웅본색]과 [도신]에서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빠뜨리지 않는다. [금지옥엽]에서 장국영과 원영의는 이곳에 있는 레스토랑 '카페 데코'에 마주 앉는다. [메이드 인 홍콩]에서 이찬삼이 반대파의 두목을 총으로 쏜 후 뛰어내려 가는 계단은 피크 트램 레일을 따라 나 있다. 빅토리아 피크로 올라가는 피크 트램은 홍콩의 또 다른 명물이다. 45도 급경사의 길 373m를 매달리듯 오르는 피크트램의 역사는 무려 100년이 넘지만, 안전성에 있어서는 믿을 만하다고.
[중경삼림]에서 청킹맨션(Chungking Mansion)을 보다
왕가위 감독의 팬에게, 홍콩의 이미지는 '청킹맨션'이다. 금발 가발을 쓴 임청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곳. 그러다 금성무와 만나 피곤한 머리를 가누며 술 한 잔 하는 곳. 그 시간에 어디에선가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그런 곳. 이곳의 분위기를 좋아한 왕가위감독은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이곳에서 찍었다.
[중경삼림]은 [동사서독] 후반작업을 하던 중에 찍은 작품이다. 부담없이, 재미있자고 심심풀이로 2주 만에 만든 작품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청킹맨션에서 촬영허가를 받지 못한 왕가위 감독은 게릴라 방식으로 촬영을 감행했는데, 그 덕분인지 청킹맨션은 특유의 음험한 분위기를 영화 속에 잘 살릴 수 있었다.
처음 지어진 당시에는 부유층과 스타들이 살던 고급아파트였다는 청킹맨션은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위층의 닭장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싼 값에 묵으며 아래층 가게들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소란스럽고 낡은 건물로 전락했다. 심심찮게 토막살인사건과 실종자들의 소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곳은, 여전히 '홍콩영화 같은'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청킹맨션은 지금도 음습하고 활발하다.
[희극지왕]에서 섹오(Shek O) 해변에 가다
[희극지왕]에는 무명시절 주성치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매니악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주성치의 [희극지왕]. 웃다 보면 어느새 울게 되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한적한 바닷가가 바로 '섹오 해변'이다. 장백지의 큰 키에 맞춰 키스하기 위해 애쓰던 주성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이곳은 영화 속에서도 한적했지만 지금도 복잡한 대도시 홍콩에서의 피곤을 풀기에 적합한 한가로운 바닷가로 사랑받고 있다.
두 사람이 연극연습을 하던 낡은 단층건물, 식당 등을 찾아볼 수 있어 주성치 팬들에게는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많은 홍콩스타들의 화보와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배경이기도 하다.
광둥어로 '섹'은 바위를, '오'는 해변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기암괴석이 즐비한 경치를 상상하면 안 될 듯. 홍콩인들이 사랑하는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는 한 켠에는 서핑하는 사람들, 햇볕 쬐는 사람들이 제각각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홍콩에서 찾아가기에는 교통이 불편하지만 한번 가면 후회하지 않을 곳이라고.
장국영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홍콩(Mandarin Oriental Hotel, Hong Kong)을 보다
홍콩영화의 아이콘으로, 영화보다 더 극적으로 살다 간 장국영. 그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곳이 바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다. 죽기 전 그곳의 스위트룸에서 지내던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이곳 24층에서 몸을 던졌다.
그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사망보도 9시간 만에 홍콩에서 여섯 명의 팬이 모방자살을 했을 정도였다. 그가 죽은 뒤로도 수많은 이들의 애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7주기를 맞는 올해에도 추모기간인 3월 20일부터 4월 6일까지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 헌화대도 마련되었다. 장국영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당학덩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끝이 있지만 우리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추모글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홍콩의 5성급 호텔인 이곳은 1963년 처음 지어졌던 당시 그 사치스러움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아시아 최고의 호텔로서 케이트 모스, 케빈 코스트너, 톰 크루즈, 브루나이 국왕, 다이애나 왕세자빈, 리처드 닉슨 등 유명한 인사들이 홍콩에 방문하며 묵는 숙소로 사랑받고 있다.
[첨밀밀]에서 캔톤로드(Canton Road)를 보다
캔톤로드는 홍콩의 중심가이다. 호화로운 쇼핑몰과 사무실 건물들, 독특한 식당들이 즐비한 이곳은 그러나 가장 '촌스러운' 남녀 덕분에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다.
[첨밀밀]. 1986년 3월. 돈을 벌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작정 상경한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남자, 여명은 어리숙하고 여자, 장만옥은 영악했지만 그들의 삶은 결국 고만고만, 홍콩에서의 정신 없는 삶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들이 닭 배달하는 짐자전거를 타고 캔톤로드를 등려군의 노래를 들으며 가로지르는 장면은, 그러나 낭만적이다. 구룡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거리. 거대한 쇼핑몰인 하버시티를 따라 나 있을 뿐 아니라 구찌, 샤넬, 루이뷔통 등 온갖 명품샵들이 자리하고 있는 호화찬란한 캔톤로드는 그들에게 꿈의 장소이자, 또 생활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것은 홍콩의 모습 자체이기도 하다. 옛날과 현재가 섞여있고, 부와 빈곤이 섞여 있으며, 꿈과 현실이 섞여 있는 곳. 그 한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는 자전거의 모습은 그러므로 모든 이들에게 인상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캔톤로드는 쇼핑의 거리로 유명하다.
[툼레이더]에서 IFC(International Finace Center) 타워에 가다
홍콩의 야경을 만드는 고층건물들
홍콩의 멋진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고층빌딩.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빌딩이 만들어내는 야경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지만, 낮에 봐도 위용이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툼레이더]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꼭대기에서 아슬아슬하게 공중낙하하던 빌딩이 바로 IFC.
오피스 빌딩인 One IFC와 Two IFC를 합쳐 IFC 라고 부르는데, 그중에서도 2003년에 완공된 Two IFC가 유명하다. 88층, 420미터 높이의 초고층 빌딩은 홍콩섬 스카이라인의 한 꼭지점을 이루며 홍콩을 대표하고 있다. [다크나이트]에서도 이 빌딩이 찬조출연한다.
세사르 펠리가 건축한 이 빌딩은 다양한 브랜드샵과 레스토랑으로 가득 차 있는 쇼핑가로도 유명하다. 쇼핑몰에서는 정작 이 건물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
[천장지구]에서 세인트 마가렛 교회(St. Margaret's church)에 가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 같았던 영화, [천장지구]. 창녀촌에서 자라나 내일 따윈 없다는 듯 살아온 폭력배 유덕화와 부유한 여대생 오천련은 외진 성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오천련이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는 유덕화가 절박한 마음으로 쇼윈도우를 깨서 마련한 것이다. 이들 둘은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해진 수순처럼, 웨딩드레스는 피에 젖고 둘은 끝끝내 서로에게 가지 못한다.
홍콩영화에서는 비둘기와 함께 성당이 자주 등장한다. [첩혈쌍웅]에서도 성당이 중요한 장면으로 나오는데, 이 성당은 가상의 성당을 세트촬영한 것이다. [천장지구]에서 이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세인트 마가렛 교회는 홍콩섬의 고급 주거지에 위치한 성당으로, 성녀 마가렛(St. Margaret Mary Alacoque)을 기리는 아시아 최초의 교회이다. 1925년에 세워졌으며, 입구에 성 피터와 성 폴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번잡스러운 벚꽃놀이의 행락객들, 줄을 이은 수학여행 학생들, 카메라 렌즈가 아니면 세상을 보는 법을 잊어버린 관광객들.... 교토는 수많은 방문객들로 어지럽다. 그럼에도 모퉁이를 돌아가면 고즈넉한 강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숲길, 백 년은 족히 넘은 듯한 침묵이 기다리고 있다. 교토가 수많은 문학인들의 산실이자, 책 한 권을 들고 오는 게 자연스러운 사색의 여행지가 되고 있는 이유다.
교토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교토의 소설가'라는 별명을 얻은 [태양의 탑], [요이야마 만화경]의 모리미 도미히코는 가장 교토다운 곳을 묻자 '철학자의 길(哲学の道)'이라고 답했다. 이름도 고상하여라. 긴카쿠지(銀閣寺)에서 난젠지(南禅寺)로 이어지는 이 오솔길은 20세기 초반 일본에 서양철학을 들여온 교토대 철학교수 니시다 키타로가 즐겨 걷던 길이라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드문드문 작은 가게와 카페들이 기다리고 있는 이 벚꽃나무 길은 교토다운 차분함을 대표하는 장소다.
스스로 불타버린 문제적 자아 -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는 20세기 일본의 문제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문제아였다. 자기 소멸에 이르는 극단적 유미주의, 세상을 뒤흔든 동성애의 고백, 도쿄대 전공투 학생들과의 맞장 토론, 그리고 자위대원들의 봉기를 선동하다 실패를 깨닫고 선지피를 흘리며 공개적 죽음을 맞은 최후까지. 그는 언제나 문제의 중심으로 다가가 그 스스로 문제가 되었다.
교토의 찬란한 금빛 사찰, 킨카쿠지(金閣寺)의 공식적인 이름은 로쿠온지(鹿苑寺)다. 그러나 물 위에 떠 있는 금박의 누각이 워낙 유명해 금각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50년 이 절은 정신병을 앓고 있던 승려가 자살을 기도하면서 불타버리게 되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바로 이 사건에 착안해 1956년 소설 [금각사]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1955년에 재건축된 누각은 지금도 비현실적인 금박을 입고 있지만, 실제로 본 사람들은 실망감을 토해내기도 한다. 어쩌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금각은 상상 속에서야 진정한 황금의 누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 속의 금각은 더욱 비현실적이다.
게이샤는 추억이 아니라 현재 - 기온
영화 속에서 어린 사유리가 뛰어가는 몽환적인 길은 교토 동남쪽 후시미이나리 신사(伏見稲荷大社)의 붉은 토리이다.
교토가 '천년 고도'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역사책을 보여줄 수도 있다. 도시 곳곳에 백년 넘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며 그 증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백 년 전의 삶과 직업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큼 강한 설득력이 있을까? 교토를 정말로 놀라운 도시로 만드는 것은 기온(祇園)의 게이샤들일지도 모른다.
잘못된 통념과 달리 기온은 홍등가가 아니라 수백 년간 여성 예술인들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거리다. 또한 교토에서는 게이샤가 아니라 게이코(芸子)라는 지칭으로 이들을 부른다.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일본사를 공부한 아서 골든이 이와사카 미네코 등 기온에서 게이코로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국내에는 장쯔이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소개되었는데, 주인공인 사유리는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소녀로, 기온의 '노부 오키야'에서 게이코로 자라난 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격동의 시간과 사랑의 아픔을 겪어간다. 기온의 일상은 무라카미 모토카의 만화 [용]에서도 섬세하게 그려진다.
가모가와 강은 추리를 부른다 - 신본격파
[살육에 이르는 병]의 아비코 다케마루,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노리즈키 린타로, [십각관의 살인]의 아야츠지 유키토....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본격파'의 핵심 작가들. 그리고 모두 교토대 미스터리 연구회의 출신들이다. 이들은 고전 본격파의 명탐정과 트릭 풀이에 매료되어 서로를 자극하며 추리소설을 써나갔고, 결국 아야츠지를 필두로 일본 추리소설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들뿐만 아니라, [월광게임]의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교토 도지샤(同志社)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이기도 하다. 이 고전적인 도시와 미스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여러 가지 추리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유추가 나름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이 비현실적인 고전 도시의 분위기가 상식 바깥의 착상을 쉽게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점이다. 고도의 밀실 트릭이나 엽기적 연쇄 살인과 같은 본격파의 상상력은 교토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호러 소설들과도 진한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교토가 '대학 도시'라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곳곳에 자리 잡은 대학들은 어떤 주제를 치밀하게 탐구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것을 교류할 통로들을 제공하고 있다. 확실히 교토는 도쿄나 오사카의 상식적 일상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교토대 미스터리 연구회의 화려한 데뷔 - [십각관 살인 사건].
윤동주와 정지용의 교정 - 도시샤 대학
정지용의 '압천'을 새긴 도지샤 대학의 시비.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교토 도시샤 대학의 교정에는 이와 같은 시비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 시인 정지용의 시 '압천'을 새긴 것인데, 이 '압천'이란 바로 교토 한가운데를 흐르는 가모가와 강을 말한다.
대학 도시인 교토는 바다 너머 조선의 청년들을 부르기도 했다. 1923년 정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다니게 된다. 그리고 교토와 고향인 옥천을 오가며 시작에 열중해 조선과 일본 양쪽의 문단에 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일본 <근대풍경(近代風景)>에는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순간의 이미지를 그린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와 같은 작품들이 실렸다. 지금 들여다보아도 지극히 현대적인데, 1930년대 우리 문단의 총아였던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는 지용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년 뒤 도지샤는 또 다른 조선의 천재를 맞이한다. 바로 윤동주. 1942년 도쿄 릿코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6개월 뒤 도지샤 대학 문학부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는 선배인 정지용처럼 대학 시절을 즐길 수는 없었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였고, 몰락 직전의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43년 7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 형을 언도받았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간 뒤에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정지용 역시 해방 전후와 6.25 전쟁 시기의 이념 분쟁에 휘말려 북으로 사라지게 되고, 남에서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두 사람의 시비는 도지샤 대학의 교정에 나란히 앉아, 그들이 겪은 비극의 깊이만큼이나 또렷한 언어를 빛내고 있다.
후쿠야당 딸들의 과자 - 히가시야마
교토, 특히 기온을 품고 있는 히가시야마에서 창업 40년, 50년은 크게 자랑할 만한 거리가 못된다. 이곳에는 백년을 넘어서는 전통의 가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만화 [후쿠야당 딸들]은 원래 350년 전통의 교과자점을 배경으로 하려 했는데, 교토에 400년 역사의 과자점이 있다는 걸 알고, 결국 창업 450년의 가게가 되었다.
300년이든 400년이든 그 역사는 정말 굉장하다. 그만큼 오랜 전통과 관습이 교토와 이 가게를 꽁꽁 묶고 있기도 한데, 만화는 이 과자 가게를 운영해야 하는 세 자매의 각고의 노력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매번 등장하는 다채로운 스타일의 과자들을 구경하는 것도 적지 않은 재미다. 눈이 어지러운 오색의 과자 안에 달콤한 팥을 안고 있지만, 다도회에서는 차를 앞질러 과자가 눈에 들어오게 하면 안 되는 것도 교토 식의 격식이다.
교과자를 맛보지 않고는 교토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
노르웨의 숲은 어디 인가요?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은 교토의 숲이 아닐까?
교토 출신의 작가들을 찾다 보면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안타깝게도 그는 교토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고베 등지에서 자라났고, 이 세계적인 관광지를 썩 고운 시선으로 보고 있지도 않는 것 같다. 그는 1983년 잡지 <앙앙> 7,8월 특별호의 '남자와 교토에' 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금 교토에 간다면 바로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면서." 그런데 이 글귀가 하루키의 팬들에게는 묘한 힌트가 되고 있다. 바로 일본에서만 2009년 8월까지 1천만 부가 판매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코가 입원해 요양을 하고 있는 정신치료시설(阿美寮)이 교토 근교의 산 속에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리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소설 속에 나오는 여정을 찾아간 일본의 어느 독자 (tokyo-kurenaidan.com/haruki-naoko5.htm)는 교토 북쪽의 산속에 있는 들풀요리점 미야마소(美山荘)가 바로 그 모델이 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1985년 <인 포켓> 10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 vs. 무라카미 류'에서 하루키가 이 요리를 열렬히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야마소는 인기 요리 만화 [맛의 달인]에도 등장하는 명소다.
거물급 기업들간 웹브라우저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마이크로소프트(MS), 모질라, 구글이 비슷한 시점에 신형 웹브라우저를 내놓을 예정이어서 판세 변화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구글 크롬의 성장세가 관전 포인트. 브라우저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구글은 상반기 애플 사파리를 따돌리며 넘버3 브라우저 반열에 올라섰다. 앞으로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MS 익스플로어 대항마를 놓고 자웅을 겨룰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기존 강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모질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I)에 큰 변화를 가한 파이어폭스4.0 베타 버전을 내놨고 MS도 '야심작' 인터넷 익스플로러(IE)9 준비중이다. 브라우저별 하반기 관전 포인트들을 정리해봤다.
■구글 크롬, 상승세 이어가나
지난 2008년 브라우저 시장에 뛰어든 구글은 점유율은 꾸준히 늘려왔다. 사파리와 오페라 브라우저는 이미 제쳤다. 지난달말 크롬 점유율(7.24%)은 사파리(4.85%)와 오페라(2.27%)를 합친 것보다 많다. 외신들은 크롬이 이같은 상승세를 유지할 경우 연말께에는 점유율이 10%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
구글은 올초 윈도용 크롬 4.0 안정버전을 내놨다. 3.0버전보다 42% 빨라진 자바스크립트 속도가 강점. 확장기능(extension)과 차세대 웹표준 HTML5도 지원한다. 플래시와의 통합도 눈에 띈다. 지난달말 윈도, 리눅스, 매킨토시용으로 개발된 크롬5 안정 버전에는 플래시 플러그인이 통합됐다.
■IE9로 명예회복 노리는 MS
IE 시리즈는 여전히 전세계 점유율 1위를 자랑하고 있지만 명성은 예전만 못하다. IE 점유율은 2008년 5월부터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넷 통계업체 넷애플리케이션스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말까지 IE8 점유율(25.84%)은 증가세를 보였지만 IE6과 IE7 하락폭은 컸다. 2년전쯤 75%를 웃돌았던 IE 점유율이 지난달 60.32%까지 주저 앉았다.
이를 감안하면 IE9은 MS가 준비중인 회심의 반격 카드로 해석된다.
현재 개발자 프리뷰 버전 상태인 IE9 HTML5와 웹문서 디자인 언어 '캐스케이딩 스타일시트(CSS)3' 지원, 신형 자바 스크립트 처리기와 CPU, GPU를 활용한 가속 기능으로 중무장했다. 이에 이전버전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IE9 공식 베타버전이 오는 8월께 출시될 가능성이 있다. 개발자 프리뷰 버전과 달리 사용자 인터페이스(UI) 등이 정상적인 모습과 기능을 갖춰 일반 사용자용으로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MS는 HTML5와 함께 리치 인터넷 애플리케이션(RIA)기술 '실버라이트'를 통해 핫메일, 라이브닷컴, 오피스 2010 웹앱 등 웹기반 SW를 제공할 계획이다.
■파이어폭스4, 2인자의 심기일전
최근 일부 외신은 "파이어폭스3.6 성장세가 주춤했다"며 "파이어폭스4는 이를 만회할 모질라 비장의 카드"라고 보도했다. 4월에서 6월로 넘어오면서 크롬(6.73%→7.24%), IE(59.95%→60.32%), 사파리(4.72%→4.85%) 점유율은 모두 성장한 반면 파이어폭스(24.59%→23.81%)는 거꾸로 줄었다.
이를 감안하면 최근 공개된 파이어폭스4 베타1 버전은 반격을 위한 모질라의 승부수 성격이 짙다.
파이어폭스4.0은 우선 크게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기능 향상이 눈에 띈다. 크롬처럼 주소창이 탭표시줄 밑으로 들어가게 바뀌고 오페라처럼 프로그램 메뉴를 왼쪽 상단에 배치된 단추 하나로 대체했다. 이는 메뉴표시줄을 숨겨 웹 화면 영역이 더 넓어보이는 효과를 낸다. 특정 웹사이트가 문제를 일으켜도 프로그램 전체가 마비되지 않게 하는 '크래시 프로텍션' 기능, 사용자들이 프로그램 사용중 실시간으로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피드백' 단추 등이 생겼다.
파이어폭스는 아이폰을 이용한 점유율 방어(?)에도 나설 전망이다. 모질라는 아이폰 사용자들이 쓸 수 있는 아피어폭스 홈을 개발하고 현재 등록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파이어폭스 홈'은 데스크톱용 파이어폭스에서 사이트 방문기록, 환경 설정값, 북마크와 같은 사용자 데이터를 아이폰에 가져와 쓸 수 있다.
■애플 사파리, 모바일에서 웃었지만...
지난달초 윈도, 매킨토시용 사파리5를 출시한 애플은 경쟁사들과 마찬가지로 HTML5를 위한 자바스크립트 처리속도를 강조하고 나섰지만 데스크톱 브라우저 시장을 뒤흔들기엔 다소 부족한 모양새다. 6월말 사파리5 점유율(1.00%)은 좋은 출발인듯 보이지만 같은기간 사파리4 점유율(3.83%→2.96%)을 보면 대부분 기존 사용자 업그레이드 수요임을 알 수 있다. 또 증가세가 뚜렷한 전체 사파리 점유율(4.85%)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모바일 수요도 포함된다. 즉 이들 대부분은 사파리를 기본 탑재한 매킨토시 계열 사용자. OS시장에서 매킨토시(5.16%)와 리눅스(1.07%)도 점유율을 얻고 있는 추세지만 윈도(91.46%)에 비하면 작다.
사파리5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구글처럼 외부 개발자들이 참여해 HTML과 자바스크립트로 만드는 브라우저 확장 기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애플이 관리할 확장기능 공유사이트에 등록될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어폭스와 크롬처럼 외부 개발자들이 참여하는 확장 기능과 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를 대중화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페라,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오페라소프트웨어는 웹킷 엔진을 쓰지 않는 아이폰용 웹브라우저를 앱스토어에 등록시킨 유일한 업체다.
지난 4월 앱스토어에 등장한 아이폰용 오페라 미니는 출시 첫날 100만다운로드, 5월말 260만사용자를 넘어서며 위력을 떨쳤다. 아이폰용은 아니지만 지난 9일 저사양 단말기 환경에서 작동속도를 높인 오페라미니5.1 버전을 내놨다. 사용자수는 올해초 5천만에서 이제 6천만명에 이른다.
정작 데스크톱 시장에서는 고전 중이다. 5월 점유율(2.43%)이 반짝 오름세를 비쳤을 뿐 지난달(2.27%)엔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지난달 데스크톱용 브라우저 '오페라 10.60'을 출시한 효과를 누리지 못한 셈이다. 브라우저 첫화면에 타일처럼 즐겨찾기를 배치하는 '스피드 연결'이나 브라우저 사용자끼리 파일을 공유하는 '오페라 유나이트' 등 독특한 기능을 선보이고 있지만 써온 사람만 쓴다는 것이 문제.
일각에서는 오페라가 웹표준 지원과 속도 향상에 강점을 보여왔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서 HTML5기반 웹서비스와 처리속도를 중시하는 웹애플리케이션 등이 확산중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아일랜드만큼 극과 극의 이미지를 지닌 나라가 있을까? 이 나라는 배고픔의 대명사였다. 1847년의 대기근은 800만 명의 인구 중 200만을 죽였고 200만을 이민선에 오르게 했다. 지금은 아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0년의 기적은 더블린 사람들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 탈바꿈시켰다. 이 나라는 언제나 피를 떠올리게 했다.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한 무장 독립 전쟁과 IRA의 테러 때문이다. 그러나 내심은 무척이나 상냥한 나라다. [론리플래닛]이 뽑은 '외국인에게 가장 친절한 국민' 1위에 선정되었을 정도다.
유럽에서 가장 큰 대로 중의 하나인 오코넬 스트리트는 이 모든 사건들의 현장이 되었다. 지금 거기에 서 있는 '스파이어(Spire of Dublin)'는 하늘을 찌르는 더블린 시민들의 자부심을 상징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넬슨 기념비가 있었는데, 시민들로부터 꽤나 천대를 받았다. 상인들은 교통 체증을 불러일으킨다고, 애국자들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상기시킨다고, 시인 예이츠는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고 투덜댔다. 결국 넬슨은 1966년 전직 IRA 멤버들의 부활절 봉기 50주년 기념 테러로 산산조각이 났다. 1990년대에 더블린 시민들은 오코넬 스트리트의 대대적인 개비에 들어가고, 국제적 공모를 통해 2003년 '스파이어'를 건설한다. 이 첨탑은 아일랜드인이 식민 지배국이었던 영국인의 국민 소득을 추월한 시점의 상징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100년 전의 더블린을 걷는다 - 제임스 조이스 센터
"나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 내가 더블린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것은 세계 모든 도시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말이다. 그 세부 속에 전체가 담겨 있다." 22살에 더블린을 떠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이후의 생을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등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작가로서 그의 영혼은 언제나 고향 더블린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1914년)]과 [율리시스(Ulysses)]는 20세기 초반의 더블린을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이 들여다보게 한다. 세인트 스테판스 그린, 그래프턴 스트리트, 템플 바, 오코넬 스트리트, 우체국.... 지금도 이 도시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발자국을 따라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 센터(James Joyce Centre)'에서 이 위대한 작가를 기리는 강의, 워크숍을 만날 수 있고, 워킹 투어 프로그램에 함께 할 수 있다. '세인트 스테판스 그린' 안에 있는 그의 조각상은 그가 다니던 대학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 그 세부에 세계가 담겨 있다." - 제임스 조이스
유투와 친구들의 흔적 - U2 월
'보노'라는 별명은 훌륭한 목소리(Bonabox)라는 뜻의 보청기 가게의 이름에서 나왔다. (노스 얼 스트리트)
1976년 더블린의 북쪽 바닷가 클론타르프(Clontarf)의 마운트 템플 스쿨에 다니고 있던 14살의 래리 뮬런은 학교 게시판에 밴드 모집 공고를 냈다. 래리의 부엌에 하나둘 멤버가 모여들었다. 밴드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당연히 리더의 이름을 따서 '래리 뮬런 밴드'가 되었다. 영광은 딱 10분만. 그때 부엌문을 열고 '보노'가 나타났던 것이다. 훗날 전설의 밴드 'U2'가 될 멤버들의 첫 만남이었다. U2는 '오 대니보이' 같은 민속음악이 아니라 록으로 아일랜드를 세계화했다. 더불어 보노의 당당한 사회적 주장은 밥 겔도프, 시네이드 오코너와 더불어 아일랜드 록 스타는 그냥 록 스타가 아님을 증명했다.
더블린에는 U2의 흔적을 찾아오는 팬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U2 월(Wall)'은 여러 팬들이 함께 만든 거대한 그래피티 벽화로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다. U2가 옛 시절 공연했던 워터프론트 록 카페와 그들의 녹음 스튜디오인 하노버도 근처에 있다. U2가 더블린 시절 많은 공연을 했던 댄드리온 마켓(Dandelion Market)은 쇼핑센터가 되어버렸지만, 벽 한쪽에 붙어 있는 록 앤 스트롤(Rock 'n Stroll) 마크가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한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될 U2 타워는 2011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원스'와 버스커들 - 그래프턴 스트리트
이제 많은 사람들이 '더블린'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리에서 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자유로운 뮤지션들을 떠올린다. 버스커(busker)라 불리는 이 거리의 예술가들을 세계에 알린 데는 영화 [원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 작은 음악 영화는 소규모의 상영관에 선을 보인 뒤 관객들의 입에 입을 통해 소문을 퍼뜨려 나갔다. 더블린의 버스커들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그래프턴 스트리트(Grafton Street). 뮤지션들뿐만 아니라 마술사, 행위예술가 등 여러 장르의 공연 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다. 데미안 라이스 등 이곳 출신으로 큰 명성을 얻은 뮤지션들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젊은 음악인들도 적지 않다고.
1927년에 문을 연 보우리스 오리엔탈 카페(Bewley's Oriental Cafe)는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2004년 10월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더블린 시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캠페인을 벌여 살려놓았다고. 카페에 있는 작은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캬바레, 재즈, 코미디도 인기 높다.
보우리스 오리엔탈 카페는 그래프턴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더블린 사람은 아일랜드의 흑인이지 - 베리타운
더블린 노동자 계급의 소울 타령을 담은 작품 [커미트먼트].
흔히 하기 쉬운 오해가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탱고만 연주하고, 쿠바 사람들은 살사만 좋아하고, 한국 사람들은 장구만 두드릴 거라는. 더블린 젊은이들이라고 몽롱한 민속 악기만 즐기란 법은 없다. 우리 밴드 '두 번째 달 바드'가 아이리시 음악에 빠졌듯이, 이들 중에는 미국 음악에 홀딱 빠져버린 친구들이 있었다. 알란 파커의 영화 [커미트먼트]는 1990년대 초반 흑인 소울 음악에 미친 더블린의 청년들을 그리고 있다.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흑인이에요. 더블린 사람들은 아일랜드의 흑인이죠. 그리고 여기 북부 사람들은 더블린의 흑인인 거죠." 영화는 로디 도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더블린 북부 가상의 동네 베리타운(Barrytown)을 배경으로 가난한 노동자 계급 청년들의 모습을 솔직하고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원작자가 교사 생활을 한 킬배럭(Kilbarrack)의 분위기와 아주 유사하다고 한다.
자유는 맥주로부터 -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진짜 더블린 사람을 만나려면 '펍(pub)'을 찾아가라. 이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내려오는 계율과도 같다. 거기에는 자글자글한 주름 너머 상냥한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진짜 뮤지션들의 살아있는 연주가 있고, 끝났다 싶으면 또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맥주 때문. 칡흙 같이 검고 까끌까끌한 스타우트 맥주 덕분.
더블린의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에 있는 양조장에서 처음 만들어진 기네스 맥주는 아이리시 드라이 스타우트 맥주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빽빽한 거품으로 유명한 이 맥주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알콜 음료이다. 그리고 펍에서 술꾼들이 사소한 상식을 두고 서로 다투는 걸 보고 만들어낸 '기네스 북'은 기록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기네스 발원지 근처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는 고층빌딩이 별로 없는 더블린 시내를 내려다보며 맥주 한 잔을 할 만한 관광 명소이다.
기네스 맥주는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에서 탄생했다.
세인트 스테판스 풀밭 위를 달리는 양
아일랜드의 우상인 론 들러니가 우승한 1956년 멜버린 올림픽의 기념 우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영국 특수부대 SAS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닌 보험회사 로이드의 조사원이다. 그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조사 업무를 벌이는데, 영국과 떼어놓을 수 없는 아일랜드 섬에도 가끔 모습을 보인다. '위선의 유니온 잭' 편에서는 전직 IRA 요원의 테러 혐의에 관해 추적하며 영국이 북아일랜드에서 벌인 잔인한 참상을 고발한다. 그리고 '불과 얼음' 편에서 더블린 시내의 메어리 가에 찾아온다.
키튼은 동경 올림픽 금메달의 도난 사건을 추적하다가 그 배후에 두 육상 영웅의 오랜 대결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벨파스트에서 자란 영국인 지주의 아들 찰스 파이언맨과 북아일랜드 출신의 브라이언 히긴스(아이스맨)가 그 당사자들인데, 어느 정도 사실일까 조사해보니 도쿄 올림픽의 1만 미터 우승자는 인디언 부족 출신의 미국인 빌리 밀스로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이 육상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500미터에서 우승한 론 들러니(Ron Delany)는 국민적 영웅으로, 1932년과 1992년 사이에 아일랜드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그는 더블린 시민들이 수여하는 '프리덤 오브 시티 오브 더블린(Freedom of the City of Dublin)' 상을 받기도 했다. 수상자의 특전 중에는 '시내의 공유 목초지에서 양의 풀을 뜯길 수 있는 권리'도 있다. 또 다른 수상자인 보노는 진짜로 세인트 스테판스 그린에 양을 데리고 와서 맛난 식사를 제공했다고 한다.
남프랑스 아를은 고흐가 사랑한 마을이다. 그가 서성대던 카페, 병원, 골목길에도 고흐의 흔적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적응 못하고 떠난 비운의 화가를 부둥켜안은 쪽은 어쩌면 아를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유작들은 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이방인들은 고흐를 더듬기 위해 작은 도시를 찾고 있다.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길목에 1년간 머물며 고흐는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이었고 [해바라기] 등 그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흐가 아를을 찾은 것은 1888년 2월. 겨울이었지만 파리의 우울한 생활을 벗어난 화가에게 도시에 대한 인상은 유독 따뜻했다.
고흐가 머물던 병원이었던 에스빠스 반 고흐. [아를 병원의 정원]의 소재가 됐으며 작품 속처럼 화려한 꽃이 마당을 채우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화가가 느꼈을 아를의 '매혹'이 담겨 있다. [노란 집], [아를 병원의 정원], [밤의 카페 테라스(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등 강렬한 색채의 작품 역시 그런 도시의 매혹이 자양분이 됐다.
고흐가 사랑했던 프로방스 마을
아를 여행은 고흐의 흔적을 쫒는 데서 시작된다. 현지 안내서는 그의 자취를 따라 노란 동선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가 걸었을 론 강변, 해 질 녘의 카페 거리 등을 걸어서 호젓하게 둘러볼 수 있다.
1 고즈넉한 풍경의 아를 골목 정경.
2 론 강의 연인들. 낭만적인 론 강변 역시 고흐 작품의 소재가 됐다.
그의 호흡이 닿았던 대부분의 공간들은 캔버스 위에 담겼다. 고흐가 머물던 병원인 에스빠스 반 고흐(Espace Van Gogh)는 문화센터로 용도가 바뀌었지만 작품 속 정원처럼 화려한 꽃이 피고 매년 여름이면 공연이 열린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는 아를에 대한 추억과 휴식이 서려 있다.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노란색으로 치장된 채 여전히 성업 중이다. 메뉴판도 식탁도 온통 고흐에 관한 것이다. 카페 골목은 해가 이슥해지고, 가로등 조명이 아련할때 찾으면 작품 속 장면처럼 더욱 운치가 있다.
카페와 술집이 술렁이는 골목을 벗어나면 론 강으로 연결된다. 고흐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낸 낭만적인 공간이다. 푸른 강변과 주황색 지붕의 낮은 건물들이 이뤄내는 프로방스 마을의 단상은 소담스럽다. 강둑에 몸과 어깨를 기댄 연인들의 모습은 매혹적인 그림이 돼 시선을 사로잡는다.
1 카페의 메뉴판 표지를 단장한 [밤의 카페 테라스].
2 아를의 카페 골목. 예술향을 음미하려는 이방인들로 붐빈다.
3 고흐의 개폐교. 고흐의 작품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에 나왔던 다리로 그림 애호가들에게 사랑 받는 장소 중 하나다.
옛 자태가 남아 있는 개폐교, 천 년 역사를 간직한 묘지인 알리스깡의 오솔길 역시 고흐 작품의 소재였다. 알리스깡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 길이 이어지는 숨은 사연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2000년전 로마 유적을 만나다
고흐의 숨결 위에, 프로방스의 햇살 위에 덧칠해진 것은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아를의 풍경이 낯설고 신비로운 것은 사실 이 유적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고흐보다 2,000여 년 먼저 아를의 햇살과 풍경을 동경했다. 기원전 100년 즈음에 원형경기장과 고대 극장 등을 세웠으며 그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장 외에도 무덤인 네크로폴리스 등을 남길 정도로 로마인들은 이 도시에 미련을 보였다. 경기장 아레나 등 로마시대의 유적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200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고대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 축제 때면 이곳에서 투우 경기가 열린다.
원형 경기장에서는 매년 4,9월 축제때 투우경기가 열리기도 한다. 골목길에는 스페인풍 식당에 요란스러운 펍들까지 여행자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찬찬히 도시를 들여다보면 프랑스와 로마 외에도 스페인의 향취가 프로방스의 아를에 담겨 있다.
아를은 고대뿐 아니라 중세유럽 문명이 혼재된 도시다. 리퍼블릭 광장에 들어서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청사와 생 트로핌 성당 등과 조우하게 된다. 성당은 수많은 순례자가 거쳐 간 곳으로 입구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 장면이 독특하다.
아를에서는 중세의 광장을 벗어나면 고대의 로마 유적과 만나고 유적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고흐의 캔버스에 담기는 식의 여행이 진행된다. 도시 어느 곳에서나 변치 않는 것은 아늑한 햇살이다.
1 아를의 중세풍경을 보여주는 생 트로핌 교회와 시청사.
2 고흐의 유작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옮겨져 엽서를 통해서만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고흐는 아를에서 미술공동체를 꿈꿨다. 유일하게 초대해 응했던 고갱마저 곁을 떠나자 귀를 잘라냈다. 천재 화가의 소망과 아픈 시련까지 담아낸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애착이 간다.
가는 길 아비뇽을 경유해 열차로 가는 게 일반적이다. 아비뇽에서 아를까지는 20분 소요. 역에서 도심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최근에는 파리에서 직접 가는 열차도 운행 중이다. 프랑스 관광청 홈페이지(kr.franceguide.com)에서 열차편 등 다양한 교통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역전 안내소에서 숙소예약이 가능하며 주말, 성수기 때는 숙소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스페인에서 안토니오 가우디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부다페스트에는 레히네르 외된이 있었다. 천재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그는 아르누보 전성시대에 활동했는데, 그의 건물들은 다른나라에는 없는 독창성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헝가리의 뿌리인 마자르 문화로 돌아가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헝가리 전통자수에서도 드러나는 산뜻한 색과 섬세하고 독특한 문양은 그의 건축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레흐네르 외된은 금속, 유리 등을 자유롭게 쓰며 마자르 전통문양을 건물에도 도입했는데, 그 문양을 그리기 위해 졸너이 타일을 즐겨 썼다. 온도 차에 강한 이 타일은 건축자재로도 인기가 높았는데, 빈의 슈테판 대성당을 비롯한 중부 유럽의 건축물에서도 이 타일을 볼 수 있다. 초록색과 황금색이 빛나는 레히네르 외된 스타일의 지붕은 공예미술관 뿐 아니라 헝가리 중앙은행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지질학 박물관, 시각장애인협회 사무소등 그의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내부관람이 가능한 것은 공예미술관뿐이다.
지금의 극장에서 과거의 극장을 생각한다, 국립극장
처음 국립극장이 문을 연 것은 1837년이었으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전쟁을 비롯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장소를 옮기기도 하고 여러 곳에 분산되기도 하면서 제대로 된 상징적인 의미를 갖추지 못했던 것.
결국 1965년에 '국민의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건물이 부서지게 되면서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공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여러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좌절을 겪다가, 결국 2000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픈은 2002년 3월 15일. 기록적인 속도였다.
다뉴브 강변에 자리잡은 이곳에서는 헝가리의 연극이나 영화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물들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옛 국립극장 기념물. 건물의 파사드 부분을 떼어와 물에 비스듬하게 잠긴 상태로 눕혀놓았다. 이 눕혀진 기념물 위로는 영원을 상징하는 횃불이 타고 있다.
옛국립극장의 파사드를 통째로 떼어와 기념물로 만들었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카페 뉴욕
카페 뉴욕의 열쇠를 다뉴브강에 집어던진 작가 페렌츠 몰나르.
카페 뉴욕의 역사는 지난하고 장구하다. 1894년에 처음 문을 연 이곳은 왕궁에 비유될 만큼 아름다운 실내장식으로 유명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에 기초해 대리석, 청동, 실크, 벨벳을 사용하여 인테리어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라는 찬사가 무색하지 않았다.
카페 뉴욕이 이름을 떨친 것은 실내장식만이 아니라 그 실내를 채운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곳은 20세기 초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예술가와 지식인의 집합지였다. 이곳에서 풍성한 생각과 논의가 벌어졌다. 또한 문학 잡지의 편집 회의실 역할도 맡았다. 여러모로, 이곳에 신세진 예술가들이 많았다.
저명한 작가인 페렌츠 몰나르와 그의 친구들은 카페가 문을 여는 날 "이 카페는 예술가들에게 24시간 개방되어야 한다"며 열쇠를 다뉴브 강에 던졌다고. 영화 [카사블랑카]의 감독인 마이클 커티즈는 부다페스트 출신이었는데, 이곳 카페에서 예술가 수업을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1912년 국립극장에서 연극연출 및 배우로 데뷔했다.
카페 뉴욕의 여정은 화려한 만큼 지난했다. 사회주의 시절 국영화되었던 이곳은 한때 창고로 사용되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고"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는데, 2006년 이탈리아 보스콜로(Boscolo) 그룹에 의해 다시 재탄생했다. 그들이 과거를 다루는 방법답게, 그들은 카페 뉴욕을 이름만 가져온 현대적 카페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장식을 충실히 재현함에 덧붙여 현대적인 디자인을 도입하여 새로운, 그러나 여전한 '카페 뉴욕'으로 재탄생했다.
과거의 차를 타고 현재를 돈다, 지하철
부다페스트에 세계에서 두 번째, 유럽대륙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것은 1896년. 건국 천년을 기념해서였다. 이 지하철의 정식 이름은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하철 페렌츠 요제프(Ferenc József)'였으나, "밀레니엄 언더그라운드"라 부르기도 하며, 그보다는 더 즐겨 '1호선'이라고 부른다.
부다페스트의 자랑 '1호선'을 타는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각별한 느낌을 준다. 건설 당시의 모습을 간직함과 동시에 현대의 도시 교통시스템으로도 원활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의 지하철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람들을 편리하게 운반하는 단순한 기계상자도 아니다.
에스켈레이터도 없는 층계를 걸어 내려가면 조그만 차량을 탈 수 있으며, 도착할 때의 흥겨운 음악도 예전과 같다. 현재 지하철 터널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가면 예전에 사용되었던 차량들을 볼 수 있다.
영화 [언더월드]에도 나오는 이곳의 지하철은 어쩐지 낯익은데, 그것은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뉴욕시 지하철 입구가 바로 이곳의 지하철 입구를 모델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은 언드라시 대로를 따라 건설되었다.
탑의 높이로 역사를 기억하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성당은 가장 높은 탑의 높이를 자랑한다.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의 초대 국왕이다. 그는 기독교를 헝가리에 전파하여 기독교의 성인이 되었다. 이 성당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의 오른손 미라가 안치되어있기 때문인 걸까? 성당의 정문에서도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인 이곳은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지어졌다. 네오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짓는 데 무려 50년이 걸렸다고 한다. 특징적인 것은 탑의 높이.
중심에 있는 중앙 돔까지 건물 내부에서는 86m, 돔 외부의 십자가까지는 96m이다. 이는 헝가리 건국의 해 896년을 의미한다. 건국천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의 높이를 정한 것이다. 다뉴브 강변의 모든 다른 건축물들은 도시미관을 이유로 이보다 더 높이 지을 수 없게 규제된다고 한다.
탑의 숫자로 선조를 기억하다, 어부의 요새
"헝가리 애국정신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어부의 요새 또한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1896년에 착공에 들어가 완성된 것은 1902년. 이곳의 이름이 '어부의 요새'가 된 것은 옛날 이곳에 어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설명부터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려했을 때 어부들이 다뉴브강으로 기습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극적인 설까지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이곳이 중세시절 다뉴브강에서 어시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는 것.
네오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양식이 혼재되어있는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곱 개의 탑이다. 고깔모양을 한 이 탑이 상징하는 것은 건국당시 마자르족 일곱부족이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탑의 높이로 건국의 해를 기념했다면, 이곳은 일곱 개의 탑으로 건국의 주체를 오늘의 기억 속에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부의 요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가끔은 과거를 잊을 필요가 있다, '글루미 선데이'
1930년대 헝가리 작곡가 레조 세레즈가 작곡한 이 곡은 악명높다. 이 곡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여 "자살 찬가" 혹은 "자살의 송가"라는 기괴한 칭호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레이 찰스, 톰 존스 등 여러 유명한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영화화되기도 한 이 음악은 지금은 예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다. 아무래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 사실 자살이 많았다는 것 자체가 루머라는 냉소도 존재한다.
'글루미 선데이'의 작곡가 레조 세레즈.
처음 음악이 전파를 탄 날 다섯 명의 청년이 자살하고, 전파를 탄지 8주만에 187명의 자살자가 생겨났다는 구체적인 숫자와 BBC를 비롯한 여러 방송국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이 루머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준다. <뉴욕타임즈>는 "수백 명을 자살하게 한 노래"라며 특집기사를 수록하기도 했고, 프로이드는 이 음악에 대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케팅에도 소문은 활용되었다. 코코샤넬은 이 음악을 모티프로 '피치 블랙-죽음의 화장품'을 출시하였고, 해골모양의 피아노를 만들어 '글루미 선데이'라는 이름을 붙인 예술가도 있었다.
'자살의 송가'라는 명성에 확신의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1968년 1월 7일, 작곡가 레조 세레즈의 자살이었다. 그가 자살한 원인은 분분하나, 글루미 선데이의 성공 이후 두 번째 히트곡을 만들 수 없었던 괴로움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죽을 당시, 손가락이 굳어 있어 두 손가락밖에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연주하던 카페의 이름은 '키스피파 벤데글로'. 작은 파이프 스토브라는 의미다. 평생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살았던 그는 그의 음악이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으로 가 로열티를 받으며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너무 강한 나머지 부다페스트를 떠나지 않았다 한다. 결국 그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시드니 항구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는 포기했다." 영국의 소설가 앤서니 트롤럽은 이렇게 썼다. "이 만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묘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영제국의 통치자들이 꼴 보기도 싫은 죄수들을 지상 낙원으로 보냈을 리는 만무하다. 1788년 그들이 이 해변에 깃발을 꽂았을 때, 물 한 톨 찾아보기 어려운 퍽퍽한 벌판에는 땅에 떨어져도 썩지 않는 독성의 식물들만이 시큰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유형수들과 군인들은 기근과 고통의 공감대 속에 이 도시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 항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변모시킨 뒤, 그 아름다움의 정점에 오페라 하우스를 세웠다.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외른 우트존(Jørn Utzon)의 설계안이 공모를 통해 당선되고, 1973년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여겨질 정도로 파격이었다.
신대륙에 건설된 아름다운 고전 예술의 장. 그러나 자유분방한 시드니 시민들은 이곳을 고리타분한 장식물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2010년 3월 1일, 공공장소에서 대규모 누드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로 유명한 스펜서 튜닉이 이 오페라 하우스 앞에 자원 참가자들을 불러 모았다. 유명한 동성애자 퍼레이드(Sydney Gay and Lesbian Mardi Gras)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진 이 프로젝트에 모여든 사람은 5,200명. 2001년 멜버른의 4,500명 기록을 깼다.
우리는 록스를 부술 수 없다
오페라 하우스의 건설은 시드니 중심가의 대대적인 현대화 과정의 일환이었다. 더불어 항구 주변의 허름한 지역들을 정비하기 위한 공사 프로젝트들이 줄을 이었다. 그 와중에 커다란 논란거리가 등장했다. 록스(the Rocks) 지역은 시드니 정착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동네.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적 유물들의 처리가 문제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건설 노동자 조합의 지도자였던 잭 먼디가 반대하고 나섰다. 조합원과 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된 '그린 밴스(green bans)'는 개발의 우선순위는 공공장소와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지 대규모 상업 시설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외에 있는 켈리스 부시(Kelly's Bush)를 보존하기 위해 시작된 '그린 밴스'는 왕립 식물 공원(Royal Botanic Gardens)을 오페라 하우스의 주차장으로 만들려는 계획과도 맞섰다. 개발업자와 지역 주민들의 다툼은 폭행, 납치,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 시드니의 몽마르트르라고 불리는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려는 시도 속에, 지역 신문의 발행인이었던 후아니타 닐슨이 실종되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건물인 록스의 캐드먼스 코티지(Cadmans Cottage). 건설 노동자들은 이 건물을 부수는 것을 거부했다.
뉴타운을 그래피티로 뒤덮자
뉴타운의 그래피티는 고전의 패러디, 팝스타에 대한 오마주, 정치적 발언 등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웃백, 그리고 아웃도어의 나라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반바지 차림으로 스케이트보드, 서핑 보드, 묘기 자전거를 타고 다닐 것만 같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당연하게도 스프레이가 들려있을 것 같지 않나?
1980년대부터 시드니 서남쪽의 '뉴타운' 지역에서 시작된 그래피티 열풍은 이 도시의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갖가지 주제와 스타일로 그려진 벽화들은 길거리 청년들의 거친 낙서가 아니라, 도시 자체를 캔버스로 삼은 집단 예술 프로젝트로 보인다. 작은 크레인을 이용해 킹 스트리트에 '아이 해브 어 드림'을 그린 앤드류 아이켄(Andrew Aiken)은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의미함에 맞선 휴머니스트의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살짝 맛이 가서 즐거운 놀이동산
멜 깁슨, 휴 잭맨, 니콜 키드먼.... 할리우드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호주 출신의 배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짠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바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떠올라 [다크 나이트]의 조커로 피어나던 순간, 약물과다 복용으로 요절해버린 히스 레저. 그가 마약중독자로 등장해 마치 그 최후를 예견하는 듯한 슬픈 영화가 된 [캔디]. 거기에 시드니 시민들이 사랑하는 놀이동산 루나 파크(Luna Park)가 등장한다.
9미터 높이의 거대한 사람의 입을 통과해 들어가야 하는 이 놀이동산은 1930년대에 세워져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입구의 얼굴이 낮에는 웃고 있는 것 같지만, 밤에는 기괴한 조명을 받아 공포 영화의 살인마처럼 변신한다는 사실. 그만큼 기괴한 유머 감각의 공간인 셈인데, 1979년에 '유령 열차 화재'로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이기구가 좀 더 짜릿해질 것 같다.
루나 파크는 놀이기구를 이용하지 않으면 입장료는 무료다.
본다이 비치의 숨바꼭질
본다이 해변의 초창기 방문객들. 지금에 비하면 옷감의 사용량이 10배는 넘어 보인다.
시드니의 거주민과 방문자는 해양성 종족이다. 선원, 낚시꾼, 요트 여행객, 수영복 모델, 그리고 서퍼들은 곳곳에 널려 있는 항구와 모래사장을 즐겨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아온 해변은 본다이 비치(Bondi Beach). 보통의 해수욕장과는 다르게, 마치 공원을 찾아온 듯 느슨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기가 적도 위쪽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오랫동안 본다이에서는 조금이라도 적게 입으려는 시민들과 그걸 눈뜨고 못 봐주는 감시관 사이의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1950년대 비키니가 유행했을 때는 감시관들이 해변을 다니며 수영복의 길이를 재서 해변에서 쫓아내기도 했다고. 그러나 점점 규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토플리스 차림도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시드니 해변의 또 다른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서퍼들이 줄지어 뛰어노는 파도 너머로 돌고래와 고래가 노니는 걸 볼 수 있고,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남쪽에서 놀러 온 펭귄도 만날 수 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 [죠스]의 한 장면을 만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 아래로 튼튼한 상어 막이 그물이 가로막고 있다.
뮤리엘과 엘튼 존의 의심스러운 결혼식장
1988년 실직 상태의 영화감독 폴 제이 호건은 단골 카페에서 쓸쓸히 앉아 있었다. 연이은 실패로 절망감에 빠진 그는 길 건너 신부 의상실을 오고가는 여자들은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여자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 뒤 신부로 변신해서 나타나는 웨딩드레스의 마법에 감동하게 된다. 그러곤 생각한다. "누군가를 가짜 신부로 만들면 어떨까?" 그리하여 바닷가 마을에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던 평범녀 뮤리엘로 하여금 시드니로 와서 가짜 신부가 되게 만든다.
[뮤리엘의 웨딩]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는 곳은 달링 포인트의 세인트 막스 교회(St Marks Anglican Church). 그런데 뮤리엘 이전에 바로 이 교회에서 대단히 유명하면서도 의심스러운 결혼식이 벌어졌다. 팝 스타 엘튼 존은 1970년대에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적어도 여자도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1984년 발렌타인 데이에 이 교회에서 레나테 브라우엘과 결혼식을 올렸다. 올리비아 뉴튼 존 등 유명인사들이 이 결혼을 축하하러 왔는데, 결국 4년 여의 시간 뒤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엘튼 존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 처녀 뮤리엘에게 시드니에서의 결혼식은 환상 그 자체.
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 - 마틴 플레이스
마틴 플레이스 1번지인 시드니 중앙 우체국. 현대식 비즈니스 건물 사이에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아르데코와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룬 시드니의 중앙 비즈니스 구역(central business district)은 영화와 드라마를 위한 이상적인 배경을 만들어준다. 마틴 플레이스는 국내 광고에도 즐겨 등장하는 명소이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미래 영화의 배경으로 인기가 높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네오가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게 혼란을 느끼는 장면에서 피트 스트리트의 분수가 등장하고,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네오가 스미스 요원과 최종적인 결투를 벌이는 장면도 마틴 플레이스에서 촬영되었다. [슈퍼맨 리턴즈] 역시 대부분의 장면이 시드니 주변의 세트와 거리에서 촬영되었는데, 슈퍼맨의 도시 '메트로폴리스'가 바로 마틴 플레이스 주변의 비즈니스 거리인 셈이다. 슈퍼맨이 여주인공 키티를 자동차 사고로부터 구해내는 장면이 어디였을까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키나발루 산은 외롭고 영험하다. 바다와 맞닿은 밀림의 섬 안에 동남아시아 최고봉이 자리 잡았다. 사바(Sabah)주 코타키나발루의 오랜 배경이었던 키나발루는 여행자들의 새로운 도전의 땅이자 휴식처다.
열대의 보르네오섬 북단에 있는 키나발루 산은 그 높이가 4,095m에 달한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의 영봉(靈峯)도 아닌데 바다를 가까이 두고 육중한 산세를 뽐낸다. 키나발루 산을 품고 있는 키나발루 공원은 말레이시아 최초로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는 높이에 따라 다양한 식생이 서식한다. 산 아래 사바주의 밀림지대와는 또 다른 경관이다. 운이 좋다면 독특한 꽃과 거대한 나무 속에서 코타키나발루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인 '라플레시아'를 만날 수도 있다. 키나발루 공원의 면적은 싱가포르보다도 넓다.
키나발루산은 높이가 4,095m로 동남아시아 최고를 자랑한다.
원주민들이 섬기는 '영혼의 안식처'
키나발루는 원주민의 말로 '영혼의 안식처'라는 의미를 지녔다. 실제로 키나발루는 이들에게 신으로 섬겨지는 산이다. 예전부터 원주민들은 소원을 빌기 위해 맨발로 산에 올랐다. 몸을 정갈하게 단장한 채, 폭포수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는 주민들의 모습을 요즘도 만날 수 있다. 고산지대의 산자락에서 원주민인 카다잔(Kadazans), 두순족(Dusuns)들은 벼농사를 짓고 야채를 재배하며 산다. 주거지인 낮은 가옥들은 산 중턱마다 고즈넉하게 자리 잡았다.
산등성에 위치한 나발루 마을은 키나발루를 감상하는 최대의 포인트다. 마을 한가운데 등대처럼 솟은 전망대에 오르면 웅대한 바위의 행렬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산에 삶을 기댄 원주민들의 낯선 풍경은 쿤타상 마을에 들어서면 더욱 강렬해진다. 1,000m가 넘는 높은 도로에 채소가게, 과일가게가 도열해 있다. 이곳 고랭지에서 재배되는 것들이다. 수천 미터의 영봉 아래 토착민들은 신선한 농산물들로 산 아래 도시인들과 소통을 한다. 새벽이면 제법 북적한 시장풍경도 연출된다.
1 쿤타상 마을 앞에는 야채가게가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재배된 고랭지 채소는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다.
2 키나발루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내다 파는 채소를 구입할 수 있다.
키나발루에서는 꼭 정상까지 욕심을 내지 않아도 좋다. 굽이 도는 길에서 바라보는 산세(山勢)는 순간마다 모습과 감동을 달리한다. 봉우리들은 맑은 날에도 자태를 내보이는 경우가 드물다.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정상의 웅장함을 완연히 감상하는 행운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키나발루 산 정상은 속살을 내비치는 경우가 드물다. 맑은 날에도 어느새 구름이 몰려와 봉우리를 뒤덮곤 한다.
깊은 숲을 거닐고 바다에 닿다
키나발루 산을 낮게 즐기려면 고산마을을 둘러보고 공원 초입에 조성된 트레킹 코스와 정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곳에서 즐기는 산악 트레킹은 늪지에서 거친 호흡과 함께하는 정글 트레킹과는 또 다르다. 공원에서는 산을 에돌아 닿는 포링온천에 들려 이색온천욕을 하거나 나무 사이에 매달린 줄 사이를 걷는 캐노피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단 온천이나 캐노피 체험은 사바주 일대에 널려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와 비교하면 그리 뛰어난 수준은 아니다. 여유가 있다면 숲을 거닐며 이곳의 흙과 나무와 꽃을 조우하면 된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그런 식으로 키나발루 공원을 즐긴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로우 봉우리는 정상 도전자들에게 화려한 일출을 선사하기도 한다.
1 공원 내에는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포링온천이 위치했다. 이슬람 소녀들은 옷을 입은 채 욕탕에 들어간다.
2 키나발루 공원을 거닐면 이곳의 다양한 식생을 만나게 된다. 정상에 도전하지 않더라도 산악공원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키나발루 공원에서 사바(Sabah)주의 주도인 코타키나발루 도심까지는 승용차로 2시간 30분 걸린다. 푸른 색조의 키나발루는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노을, 해변과 맞닿은 워터프런트는 이곳 청춘들이 밤만 되면 모이는 데이트 코스다. 워터프런트 옆으로는 이 일대의 온갖 토산품을 구입할 수 있는 필리핀 마켓이 들어서 있다. 야채시장, 열대의 생선들이 쏟아지는 생선시장도 포구 옆에 선다.
새벽녘 코타키나발루의 수상가옥.
도심의 정경은 한낮에 만났던 산속의 고요함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서민들이 거주하는 바다 위의 수상가옥들은 화려한 리조트의 발코니 너머로 내려다보인다. 쌀로 빚은 민속주 '리힝'과 워터프런트의 맥주 한잔도 묘하게 어울린다. 모두 영험한 산과 바다의 땅 키나발루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이다.
가는 길 코타키나발루는 보르네오 섬 북부 사바주에 위치했다. 인천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 대한항공, 아시아나. 말레이시아 항공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코타키나발루 도심에서 키나발루 공원 초입까지 버스도 운행된다. 2시간 30분 소요. 코타키나발루는 열대 기후로 일 년 내내 덥지만 산을 등반하려면 긴 소매 옷이나 방한용 재킷이 필요하다. 정상 등반 때는 산악가이드가 동행한다.
지금 상하이는 세계가 놀라워하는 미래도시다. 포동 지구는 개방 중국을 대표하며 하늘을 꿰뚫는 첨단 비즈니스 빌딩들을 쭉쭉 뽑아내고 있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보이는 와이탄(外灘, The Bund)의 스카이라인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왜 저기에 20세기 초반의 아르데코 건물들이 떼거지로 앉아 있는 걸까?
19세기에는 작은 어항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강제 개항 이후 갑자기 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다. 1930년대 100만으로 증가한 인구 중에 토박이는 15~25%에 불과했으니, 외국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인 진정한 국제도시였다. 당시 세계를 휩쓸던 모더니즘과 소비 도시의 비전은 중국의 열정과 만나 독특하고 활기 넘치는 거리를 만들었다. 특히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온 열강들이 앞다투어 호텔, 영화관, 백화점 등을 지어댄 곳이 와이탄 거리. 그 시대 세계의 문화 수도는 물론 파리였다. 그러나 와이탄은 파리이자 뉴욕이고 베를린이자 산 페테르스부르그였다.
신여성과 댄디보이 - 뚜어룬루의 카페
"유명해질 거라면 서둘러야 해. 너무 늦으면 즐거움도 그리 크지 않을 거야. ... 어서, 어서, 늦으면 안돼, 안돼." 23세에 상하이 문단의 인기 작가가 된 장아이링(張愛玲: [색,계]의 원작자이기도 하다)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첫 원고료를 받아 백화점에 립스틱을 사러 간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어설프게 댄디보이를 흉내 내는 남자들이 아니라 치파오를 입은 신여성들이 상하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중국 여성을 대표하는 의상이 된 치파오는 바로 이 시대의 발명품이다. 원래 만주족 여성들이 입던 옷을 몸에 딱 붙게 하고 치마 길이를 짧게 만들어 활동적이면서도 섹시하게 변형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 시대 문명의 총아는 '카페'였다. 소설가와 지식인들은 '설리번'에서 초콜릿을, '페데랄'에서 케이크를, '콘스탄틴'에서 아랍식 블랙커피를, '리틀 맨'에서 아름다운 웨이트리스를 즐겼다. 지금 모던보이들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뚜어룬루(Duo Lun Lu)가 그럴 듯해 보인다. 1920~30년대 상하이의 도시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 사이로 고풍스러운 카페들을 만날 수 있다.
1930년대 광고에 등장한 상하이의 여성. 치파오의 영광이 시작된 때다.
영화는 현대의 빛 - 상해 영화 촬영소
[야초한화]에서 롼링위와 호흡을 맞춘 원조 한류 스타, 김염.
"오데온은 동양 최대의 넓이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전당입니다. 중국 최고의 영상만을 당신에게 제공합니다." 1930년대 <양우>라는 잡지에 게재된 상하이 오데온 극장의 홍보문구다. 그런데 오데온은 상하이에 12개나 있던 서구식 영화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체코의 건축가 라디슬라우스 후덱이 설계해 1933년에 개장한 그랜드(大光明) 영화관은 2천 개의 소파식 좌석에 에어컨을 설치했고 동시통역용 이어폰도 구비해 두었다.
황금기 상하이 문화를 대표하는 단어는 '영화'다. 1927년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유성 영화는 바로 이듬해 상하이를 찾아왔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상하이 영화는 이 도시의 특산품이었고, 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문화인인 루쉰, 장아이링 등도 영화광이었고, <영롱부녀도화잡지> 등 쏟아지는 영화잡지를 읽지 않으면 교양인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최전성기에 자살해 전설이 된 롼링위(阮玲玉)을 비롯해 당시 영화 스타들의 대부분은 '신여성'을 대변하는 여배우들이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남성 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김염. 서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이 시대를 휘어잡은 원조 한류스타다. 그의 인기는 1934년 영화잡지 <전성>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세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지금 상하이 서남쪽 외곽에 대형 영화 촬영소(影视乐园)가 있는데, 1930년대 상해 거리를 재현해놓은 대규모 세트장이다. 당시의 여러 건물과 전차들을 볼 수 있고, [상해탄]이라는 공연도 만날 수 있다.
항일과 혁명의 핏자국들 - 루쉰 공원
상하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적 규모의 도시가 된 데에는,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열강들의 각축이 큰 역할을 했다. 당연한 결과로 이 도시는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여러 세력들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영화 [아나키스트], [색,계] 등 이 시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들에서 혁명가, 테러리스트, 스파이들이 벌이는 쟁투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상하이의 여러 서구식 건물, 공원, 경마장들은 일반 중국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오직 외국인들과 극소수의 지배층을 위한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홍커우 축구장 옆의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는 '중국인과 개는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가 붙어 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실제 표지판은 없었지만, 개와 자전거, 외국인의 시종이 아닌 중국인, 양복과 고급 의상을 입지 않은 일본인과 인도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이 공원은 이후에 개방되어 상하이 시민들의 위락시설이 되었는데,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 역사적 의거의 현장이다. 현재 홍커우 공원은 루쉰 공원(魯迅公園)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아큐정전] 등의 소설과 에세이로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 루쉰(魯迅)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번쩍이는 네온 불빛에 물들어 잠들지 못하는 상하이. 그 밤의 주인공은 카바레, 댄스홀, 그리고 재즈 클럽들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태어난 재즈 음악은 곧바로 이 도시로 날아왔고, 서양식 정장을 걸친 외국인들과 중국식 장삼을 걸친 부유층들은 치파오를 입은 여인들과 사교댄스를 즐겼다. 캐세이 호텔, 비너스 카페, 비엔나 가든 댄스홀 등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밤의 클럽들은 넘쳐났는데, 이들은 매력적인 중국식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파라마운트(Paramount)'를 개명한 '바이러먼(百樂門)'으로, 지금도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오랜 전통의 상하이 재즈는 오늘날에도 그 명성을 저버리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온 뛰어난 연주자들을 여러 클럽에서 만날 수 있는데, 올드 상하이의 고전적인 사운드를 찾는 사람들은 와이탄 강변의 피스 호텔(Peace Hotel)로 간다. 70세가 넘는 노연주자들로 구성된 밴드로 유명한데, 정통 재즈라기보다는 스윙이 사라진 중국화된 연주 스타일이라고 한다.
사이공 마피아 - 두웨성의 옛 저택
돈과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들끓는 메트로폴리스. 당연히 거기에는 온갖 범죄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영국이 중국인들을 타락시킨 아편의 본거지도 이곳이었다. 두웨성(杜月笙)은 이 시대 상하이 암흑가를 지배했던 자로, 그 다채로운 행적으로 인해 어두운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그의 조직 청방(靑幇)은 매춘, 도박, 아편으로 대표되는 밤의 경제를 지배했고, 막강한 조직력과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실권과 명예에 도전했다. 1927년 장개석의 반공 쿠데타에 일익을 담당했고,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주선하기도 했다. 일본의 지배 뒤에는 부역을 거부하고 홍콩으로 탈출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분명히 했는데, 이는 일제의 항복 뒤에 국민당과 공상당 양쪽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애쓰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두웨성은 어느 체제도 선택하지 않고 쓸쓸하게 죽어갔지만, 그의 저택은 상하이의 명물이 되어 있다. 푸시(浦西) 신르루(新樂路)에 있는 부티크 호텔 '수석공관'이 바로 그곳으로,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 안에 구식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보스가 사용하던 권총, 시거, 시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백주대낮에 총질을 하며 혁명가들을 참살하던 행적조차 노스탤지어가 되고 있다.
[상하이 트라이어드]는 14살 소년의 눈으로 1930년대 상하이 암흑가를 들여다본다.
공장과 도살장의 새로운 운명 - M50 예술촌과 1933 라오창팡
옛 외국인 도살장을 개조한 1933 라오창팡
상하이가 오랜 암흑의 시간을 보낸 덕분일까? 도시 곳곳에는 20세기 초반의 건물들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데, 개방의 물결을 통해 이들도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다.
모간산루 50번지는 1930년대에 지어진 공장들이 1999년에 문을 닫으면서 흉물스럽게 비어 버릴 운명을 맞이했다. 다행히도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이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기 시작했다. 백여 개의 스튜디오, 갤러리, 각종 예술 관련 사무소들이 들어선 'M50 예술촌'은 상하이는 물론 전 세계 예술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상하이 미술 특유의 대량 생산품 느낌의 거대한 설치 작품들도 이런 환경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여겨진다.
하이룬루(海伦路)역 근처에 있는 '1933 라오창팡(老场坊)'은 1933년에 지어진 외국인 대상의 거대 도살장이었다. 하루에 천여 마리의 소, 돼지를 잡던 이곳은 지금 상하이를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옛 건축물의 골간을 유지한 채 세련된 조각 작품들을 배치하고 갤러리, 레스토랑, 상가들을 채워놓고 있다.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의 땅만은 아니다. 월드컵 열기로 남쪽 일대가 검붉게 달아올랐지만 북부의 풍경은 다소 이질적이다. 프랑스풍의 거리, 이슬람 모스크, 지중해의 바람이 도시를 감싼다.
튀니지 중부에서는 두 도시에 현혹된다. 낙후된 대륙이라는 편견은 이들 도시에 들어서면 숙연해진다. 카이로우안(Kairouan)과 수스 (Sousse)는 1시간 거리에 위치했으면서도 다른 색을 발산한다. 카이로우안은 이슬람의 네 번째 성지로 1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땅이고, 한때 프랑스령이었던 수스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담은 튀니지 최고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했다. 카이로우안이 진흙으로 구워낸 투박한 벽돌색이라면 수스의 옛 도심인 메디나는 흰색으로 단아하게 치장돼 있다. 두 도시의 구시가지는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체감되는 문화적 깊이는 남다르다.
성루에서 내려다 본 수스 메디나의 모습. 메디나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슬람 4대 성지인 순례자의 도시
도시는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수도 튀니스에서 느꼈던 번잡한 정취와는 또 다르다. 튀니지는 다른 아랍권 나라와 비교하면 개방이 빨랐다. 일부다처제가 금지되고 히잡의 의무 착용도 폐지했으며 튀니스의 거리에는 민소매 차림의 육감적인 여인들이 활보하고 있다.
그러나 카이로우안에 도착하면 튀니지가 지독한 이슬람의 나라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흔하게 만나게 되는, 몸 전체를 감싼 부르카를 입은 여인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수줍은 듯 얼굴을 성급하게 가린다. 카이로우안은 이슬람 교도들에게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 이어 4번째 성지로 여겨진다.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도시로 한때 300여 개의 사원이 있었으며 아직도 시내 곳곳은 100여 개의 모스크로 채워져 있다. 거리에 나서면 붉은색 펠트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모스크 앞을 한가롭게 지나치는 풍경을 조우하게 된다.
1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랑 모스크.
2 카이로우안의 도심 건물들은 진흙빛 벽돌로 채색됐다.
카이로우안의 상징은 그랑 모스크다.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로 건축가이자 장군인 시디 오크바(Sidi Oqba)에 의해 7세기 말 처음 지어졌다. 모스크는 규모뿐 아니라 다양한 조형미를 담은 총아적 성격을 지녔다. 400여 개의 기둥은 로마풍이며 샹들리에는 베네치아의 것을 끌어들였다. 기둥 안쪽 말발굽 모양의 아치는 스페인안달루시아 양식이다.
시디 사하브(Sidi Sahab) 모스크는 카이로우안의 주민들이 사랑방처럼 들락거리는 기도처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발사인 사하브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기도하면 병도 낫고 축복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아예 모스크 안에서 도시락도 먹고 낮잠도 자는 풍경이다. 모스크는 진흙빛 벽돌로 채워진 외관과는 달리 실내는 튀니지 스타일의 타일과 모자이크로 수려하게 단장됐다. 카이로우안은 또 튀니지안 카펫으로도 유명한 곳. 도심 로터리의 상징물들도 모스크와 함께 카펫이 나란히 조각돼 있다. 고풍스러운 거리에 나서면 원조 카펫가게들을 기웃거리는 묘미가 덧씌워진다.
1 무함마드의 이발사 무덤이 안치돼 있는 시디 사하브 모스크.
2 대포 공격에도 견뎌냈던 수스의 '리바트'
지중해와 맞닿은 메디나를 거닐다
카이로우안에서 수스로 이어지는 길에는 올리브 밭이 펼쳐져 있다. 덩치보다 큰 간격을 유치한 채 끝없이 늘어선 올리브 숲 자체가 이 일대의 장관이다. 튀니지는 세계 올리브 생산 2위 국가. 바게트 빵에 올리브기름을 찍어 먹는 것은 일상의 모습이며 식탁 위의 올리브 절임 역시 이들에게는 김치 같은 역할을 한다.
수스는 한때 올리브 등이 거래되던 큰 항구 도시였다. 지리적 요충지로 외세의 침략이 잦아 '리바트'로 불리는 두터운 성채를 지었고, 성채 뒤로 구도심인 메디나와 시장인 수크가 형성됐다. 지중해를 내려다보고 들어선 메디나는 다른 도시의 것과는 호흡이나 풍경이 다르다. 수도 튀니스의 메디나가 도시 속에 웅크린 채 닫혀 있다면 수스의 메디나에서는 어느 곳에서든 바람과 바다가 울컥거린다. 수스는 북쪽 해변도시 함마메트(Hammamet)와 더불어 튀니지 최고의 휴양지로 사랑받고 있다.
1 함마메트 해변. 수스와 함께 튀니지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2 수스의 시장 골목들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흰색으로 단장돼 있다.
수스에서는 바다향 가득한 수크를 무작정 헤매는 것 자체가 여행의 시작이다.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새로운 점포 군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노천 테이블에 앉아 민트차를 홀짝거리는 튀니지 남성들은 한가롭기로 따지면 세계 최고다. 낮이나 밤이나 수다를 떨며 차를 마신다. 하지만 튀니지 여인들의 이런 모습은 아직은 드문 풍경이다.
골목 어느 곳에서 바라보나 수스의 리바트는 이정표처럼 우뚝 서 있다. 리바트의 성루에 오르면 메디나와 지중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낮은 언덕을 빼곡하게 메운, 하얗게 채색된 아프리카 북부의 삶의 단면과 자연스럽게 조우하게 된다.
가는길 한국에서 튀니지까지 직항 노선은 없으며 프랑스 파리를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한항공, 에어프랑스가 공동운항해 파리 연결이 수월한 편이다. 튀니지에서는 프랑스어가 제2국어로 사용된다. 유럽 각지에서도 수스까지 비행기가 오가며 수도 튀니스를 경유해 육로로 이동할 수도 있다. 카타르나 두바이를 경유하는 방법도 있으나 연결 시간대가 고르지는 않은 편이다. 튀니지 입국에 별도의 비자는 필요 없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는 중앙아시아의 숨은 명소이자 시간 여행의 종착역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천 년 전으로 향하면 그런 빛 바랜 도시를 만날 듯하다. 도시의 역사는 2,500년.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성지로 도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부하라의 전설이자 상징인 칼란 미나레트와 칼란 모스크는 중앙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시내에 나서면 지붕 없는 박물관을 걷는 기분이다. 부하라의 별칭이 아예 '박물관 도시'다. 그렇다고 정제된 유물들이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1,000년 된 성곽 옆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공을 차며 천연덕스럽게 뛰논다. 동그란 카라쿨 모자를 쓴 아저씨들은 자전거를 타고 모스크 앞을 지난다. 발을 딛는 곳이 고대 유적이고 현지인의 일상은 그 위에 자연스럽게 뒤엉켜 있다. 오래된 유적들은 2,500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사막의 땅 속에 차곡차곡 덧씌어져 있다. 수십 미터를 발굴하면 도시의 역사와 생채기가 드러나는 식이다. '부하라에서는 빛이 땅에서 하늘로 비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실크로드의 주요 관문이던 오아시스
부하라의 융성함에는 지역적인 특성이 녹아 있다. 부하라는 서역과 중국을 잇는 실크로드의 주요 오아시스였다. 인도 모직, 중국 비단이 이곳을 통해 오갔고 아직도 그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 행상들의 숙소였던 '라비 하우스(Lyabi Khauz)'는 대형우물을 낀 채 여행자들의 휴식처가 됐으며 지붕이 둥근 옛 건물들에는 카펫, 가위 등을 파는 시장이 형성돼 있다. '타키'로 불리는 시장에는 낙타가 드나들 수 있도록 사람 키의 두 배가 넘게 만든 문이 있다. 오전 한때 장이 서는 금(金)시장 자르가른(Toki-Zargaron)이나 카펫시장 압둘라훈(Tim Abdulla Khan) 역시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1 금시장인 자르가른. 오전 한때 장이 들어서는데 아직도 옛 저울을 이용해 장신구 거래를 한다.
2 실크로드의 교역지였던 시장. 입구는 낙타가 드나들 정도로 높다.
부하라는 태생적으로도 지독한 이슬람의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부하라(Bukhar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솟은 칼란 미나레트(Kalan Minaret)와 칼란 모스크는 이슬람 도시 부하라의 전설과 상징이다.
칼란 미나레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첨탑으로 통한다. 높이가 46m다. 숱한 외침과 붕괴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 의미 외에 이 탑의 또 다른 기능 덕분이다. 꼭대기에 불을 지피면 탑은 사막의 등대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의 행상들은 불빛만을 보고도 오아시스인 부하라를 찾을 수 있었다. 몽골 칭기즈칸이 부하라를 침공해 수많은 이슬람 유적을 무너뜨렸을 때도 이 탑에는 칼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미나레트 옆의 칼란 모스크는 한꺼번에 1만 명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1 중앙아시아의 가장 큰 첨탑인 칼란 미나레트는 한때 처형대로 사용된 섬뜩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2 칼란 모스크는 이슬람 최대의 성지인 부하라의 상징중 하나다. 내부는 1만여 명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낙타 젖을 반죽해 쌓아올린 역사
부하라의 왕들이 거주했던 아르크 고성은 780여m나 이어지는 사암으로 된 흙벽이 인상적이다. 7세기에 처음으로 축성됐으나 몽골, 투르크족의 숱한 침략을 받으며 붕괴와 재건이 반복된 도시의 애환을 담고 있다. 인근에는 부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샤마니 왕의 묘(mausoleum of Ismail Samani)가 위치했는데 묘에 사용된 벽돌은 수천 년을 견딜 수 있도록 낙타 젖을 섞어 반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흙과 낙타 젖을 섞은 벽돌은 단단한 비스킷 같은 느낌이다. 길에서 만난 부하라의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그런 질감을 지니고 있다.
1 부하라 왕들의 애환이 서린 아르크 고성.
2 샤마니 왕의 묘는 부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낙타젖을 반죽해 만든 벽돌은 천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삶 속으로 들어서면 부하라는 더욱 생경한 풍경이다. 둥글고 넓적한 빵인 '리뽀시카(Lepyoshka)'는 식당에서 밥처럼 나오며, 서민들은 양고기와 양파가 섞어 끓인 '쉬르파(shurpa)'를 주식으로 먹는다. 열차를 타도 카펫이 흔하게 깔려있고 탑승객들은 고풍스런 주전자(사모바르)로 열차 안에서 차를 마시기도 한다.
수도 타슈켄트가 퇴색한 러시아의 주변 도시 같고, 사마르칸트가 화려하게 치장돼 있다면 부하라가 간직한 것은 정제되지 않은 옛 건축물과 사연들이다. '진정한 우즈베키스탄을 보려면 부하라로 가라'는 속설은 오랜 오아시스의 땅에 들어서면 진한 현실로 다가선다.
가는 길 부하라는 수도 타슈켄트의 서남부에 위치했으며 남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과 가깝다. 인천에서 타슈켄트까지는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타슈켄트에서 비행기를 타거나 버스,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차로는 옛 실크로드 길을 달려 부하라까지 10시간 정도 소요된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곡선의 미'에 취한다. 육감적인 플라멩코 댄서의 휠 듯한 춤이 아니더라도 거리를 지나치면 문득 건축물에서 유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가우디의 작품들이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누구나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추억한다. 이 고집스러운 건축가 한 명이 도시의 지도를 바꿨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은 한해 수백만 명에 달한다. 바르셀로나는 중독의 도시가 됐고, 그 지독한 중독의 중심에는 가우디가 있다.
구엘공원 정상에서 내려다 본 바르셀로나 전경. 뒤로는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세계유산을 만든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바르셀로나에 남긴 건축물 중 다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 중 여행자들을 품에 안고, 눈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구엘공원이다. 야자수를 닮은 돌기둥과 벤치에 새겨진 모자이크에는 모두 그의 열정이 서려 있다. 사람들은 벤치 위에 누워 따사롭고 호화로운 휴식을 즐기기도 한다.
자연에서 모티브를 빌린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들은 화려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이다. 공원의 건축물들은 파도를 치듯 언덕을 따라 흘러내린다. 정문 앞 경비실은 동화 속 풍경을 담았고 이 지역 카탈루냐 문양을 새겨 넣은 모자이크 된 뱀도 독특하다. 담 자락에서 발견하는 모자이크들은 깨진 타일들을 정교하게 조합한 형상으로 디자인도 제각각이다.
1 구엘공원의 건축물들은 하나하나가 개성 넘친다. 정문앞 건물은 동화에서 소재를 얻었다.
2 모자이크가 돋보이는 구엘공원의 도마뱀 상은 이방인들에게는 촬영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
3 구엘공원의 개성 넘치는 모자이크.
공원 건축은 가우디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구엘(Eusebi Güell)과의 인연 때문에 시작됐다. 본래는 주거용 목적으로 지었지만 공사는 도중에 중단됐고 일반인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가우디의 저택과 광장을 거쳐 공원 뒤편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가우디가 꿈꾸며 그려낸 도시의 실루엣이 지중해에 비껴 어우러진다.
거리로 나서면 곳곳이 가우디의 작품이다. 1882년 짓기 시작한 대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우디의 건축물 중 웅대한 규모에 있어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과 돔은 창공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가우디는 40여 년간의 생애를 대성당 건설에 바쳤고 사후에도 성당 지하에 안치됐다.
가우디의 작품 중 가장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산트 파우 병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가우디의 거리로 불린다. 이방인들은 밤늦도록 노천바에 앉아 대성당을 바라보며 가우디에 취한다. 쌉쌀한 맥주나 스페인 전통주 '상그리아' 한 잔이 감동 위에 곁들여진다. 이곳에서 언뜻 눈에 띄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식습관은 특이하다. 평일 점심때 2시부터 느긋하게 정찬을 즐기는가 하면 식사 후에는 시에스타 시간이 마련돼 있다. 저녁은 9시 넘어서 먹는다. 주말에는 아예 10시쯤 시작해 자정까지 저녁만찬을 즐기기도 한다. 거리의 예술작품만큼이나 생기 가득한 바와 카페들이 뒷골목에는 즐비하다.
건물에 깃든 고집스러운 곡선미
보행자의 거리인 람브라스에서 이어지는 길목에서도 가우디의 작품들은 이어진다. 걷다 보면 천재 건축가와 골목에서 조우하는 느낌이다. 구엘궁전은 실타래를 꼬아놓은 듯한 굽이치는 정문이 인상적이다. 카사 바트요나 아파트로 지었던 카사 밀라는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그 외형에 일단 눈이 현혹된다. 건축은 자연의 일부여야 한다는 가우디의 신념을 담아 석회암 건물의 창과 벽에 바다와 파도의 굴곡을 실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곡선은 신의 선이다'고 한 가우디의 정신이 녹아 들었다.
1 건물 정면을 석회암으로 치장한 카사 밀라.
2 동굴 느낌을 연상시키는 카사 밀라의 창문.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작품만 구경하는 별도의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물론 도시의 건축미가 가우디 혼자만의 열정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몬타네르(Lluís Domènech i Montaner)가 지은 카탈라냐 음악당과 산 파우 병원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가우디에 감명받아 건축한 첨단 돔형의 아그바르 타워는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바르셀로나는 유럽대륙과 맞닿은 지리적 여건 덕에 스페인 제일의 상공업 도시로 성장했고 그 성장을 자양분 삼아 수준 높은 예술을 꽃피웠다. 피카소, 미로 등도 이 중독의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 이름의 꼭짓점에는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의 삶과 열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가우디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전 재산을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건축을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1 바르셀로나에는 건축물 외에도 자유로운 예술의 혼이 숨쉰다.
2 스페인의 플라멩코에는 강렬함과 곡선미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굳이 계획된 르네상스가 아니더라도 예술의 힘은 세인의 상상을 넘어선다. 가우디가 만들어낸 우아한 건축미는 바르셀로나를 예술과 디자인의 도시로 재탄생시켰다. 그 완성에는 지난한 세월과 건축에 대한 짙은 사랑이 배경이 됐다. 가우디를 부둥켜안은 바르셀로나가 그래서 더욱 설레고 끌린다.
가는 길 바르셀로나까지 직항편이 운행 중이나 프랑스를 경유해 열차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열차궤도가 달라 국경역인 포르트부에서 갈아타야 한다. 역은 산츠역과 프란사 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탈리아 등에서 이어지는 야간열차나 특급열차도 여럿 있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는 5개의 메트로 노선이 도심 구석구석을 연결한다. 메트로를 이용하기에는 산츠역이 편리하다.
단언컨대 스위스 융프라우는 세계의 알짜 명소다. 여행자들의 로망인 런던, 파리에 이어 누구나 유럽여행 중에 꼭 한 번쯤은 들려봤음 직한 단골 방문지이며, 또 귀에 박힐 정도로 익숙해진 곳이다. 사실 융프라우는 알려진 겉모습보다는 속살이 더 옹골지고 매혹적이다. '신이 빚어낸 알프스의 보석'이라는 칭송을 받는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융프라우의 높이는 4,158m다. 아이거, 묀히와 더불어 융프라우 지역의 3대 봉우리 중 최고 형님뻘이지만, 이름에 담긴 뜻은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처녀'다. 그러나 수줍은 처녀처럼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산 밑 인터라켄의 날씨가 화창하더라도 융프라우는 구름에 만년설로 덮인 알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융프라우는 여행자들에게 로망의 땅이다. 빙하 위, 세계유산 사이를 걷는 호사스러운 체험이 이곳에서 가능하다.
빼어난 알프스의 고봉들이 즐비한 가운데 융프라우는 알프스 최초로(200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융프라우와 더불어 산줄기 사이로 뻗은 알레치 빙하도 유산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무쌍한 날씨가 등재 이유 중 하나라는 점인데, 유네스코 목록을 뒤져보면 빼어난 산세, 빙하와 함께 끊임없이 계속되는 날씨 변화를 등재 사유로 적고 있다. 유럽 사람들이 정상에 느긋하게 머물며 날씨와 산세를 더불어 음미하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산 위의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는 게 융프라우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3,000m가 넘는 고지에는 천문대와 연구소도 들어섰다. 물론 유네스코는 융프라우가 유럽의 예술, 문학, 등반, 여행에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점을 빼놓지 않고 높이 사고 있다.
만년설과 빙하 위를 걷다
융프라우가 친숙한 것은 역과 산악열차 때문이다. 암벽을 뚫고 1912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산악열차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역(3,454m)인 융프라우요흐까지 이어진다. 덕분에 힘 안 들이고도 정상근처까지 오르는 호사가 가능해졌다. 역전 우체국도, 컵라면도 덤으로 유럽 최고가 됐다. 산악열차는 2012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1 세계유산인 알레치 빙하는 22km나 뻗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로 독일의 흑림까지 그 길이 닿는다.
2 붉은 빛의 스위스 산악열차.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역인 융프라우요흐까지 톱니바퀴 철로가 이어진다.
산세를 제대로 감상하는 포인트는 플라토 전망대나 빙하지대로 이어지는 역 뒷문이다. 밖으로 나서면 융프라우와 22km 뻗은 알레치 빙하가 코앞에 펼쳐진다. 알레치 빙하는 유럽 최장 길이로 독일의 흑림지대까지 뻗어 있다. 서 있는 발 아래는 한여름에도 만년설이다.
만년설을 밟으며 빙하 트레킹(도보 여행)을 즐기는 게 융프라우 감상의 '첫 번째 숨겨진 속살'이다. 트레킹은 묀히산장까지 이어지는데 두세 시간이면 왕복이 가능하다. 걷다 보면 융프라우의 3대 봉우리가 '3D 파노라마 영화'처럼 장면을 바꾼다. 산장에서 맛보는 뚝배기 커피(주인장은 마운틴 커피라 부른다)는 감칠맛이다.
엽서 속 그림 같은 산악마을
융프라우 여행에도 금기사항은 있다. 열차는 그린델발트, 라우터브루넨, 벤겐 등의 산악마을을 스쳐 지난다. 이런 청정마을을 열차 갈아타는 용도로만 이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위로 올라설수록 마을은 호젓하고 그윽하다. 벤겐, 뮈렌 등의 마을에는 100년 넘은 샬레풍의 세모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마당에는 야생화가 가득 피었고 길 옆 노천 바에서는 맥주 한 잔 기울이는 호사스러운 휴식도 가능하다.
1 봄이 오면 그린델발트는 변신한다. 오랜 눈을 털어낸 땅에는 샬레풍의 가옥과 푸른 초원이 마을을 수놓는다.
2 산악마을인 벤겐에는 소음도, 먼지도 없다. 전기 자동차만이 유유히 마을 골목길을 달린다.
이방인들로 흥청거리는 인터라켄보다는 이곳 산악마을에서 꼭 묵어 보기를 권한다. 창문만 열어도 라우터브루넨의 슈타우바흐 폭포와 그린델발트의 아이거 북벽을 감상할 수 있다. 알프스에서 만끽하는 '엽서 한 장의 휴식'이란 이런 것이다. 게스트하우스나 산장의 시설은 유럽 어느 곳보다 빼어나다. 캠핑장에 개를 위한 샤워장이 있을 정도다.
최근 융프라우 일대에서 유행처럼 인기 높은 게 트레킹이다. 70여 개 코스, 200km의 다양한 코스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트레킹 루트는 곤돌라를 타고 2,000m 지점에서 시작해 산악마을과 야생화 길을 완만하게 걷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 중 피르스트의 바흐알프(Bachalpsee) 호수로 향하는 트레킹 코스는 백미로 통한다. 설산과 호수가 만들어내는 데칼코마니의 진수를 목격할 수 있다. 피르스트에는 만년설의 봉우리들 사이로 뛰어드는 황홀한 패러글라이딩 포인트도 자리 잡았다.
융프라우와 소통하는 데 거친 호흡은 필요 없다. 알프스의 하늘을 날고 땅을 밟고 향기를 맡는 일들이 편리하게 진행된다. 산행을 끝내고 해 질 녘 노천바에 앉으면 '행복한 노곤함'은 감동으로 전이돼 가슴에 새겨진다.
가는 길 융프라우 여행은 호수마을인 인터라켄이 출발점이다. 스위스의 관문인 취리히, 제네바나 베른에서 열차를 타고 인터라켄을 경유해 그린델발트나 라우터브루넨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산악열차로 정상까지 이어진다. 이 일대 구석구석을 즐기고 싶다면 3일 동안 산악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VIP 패스를 구입하는 게 저렴하다.
산토리니는 '빛에 씻긴 섬'이다. 하얀 골목, 파란 교회당, 담장을 치장한 붉은 부겐빌레아마저 선명하다. 엽서를 보며 동경했던 바닷가 마을은 현실과 조우하면 더욱 강렬하다. 에게해의 탐나는 섬, 산토리니는 그런 눈부신 풍경을 지녔다.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렇게 썼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소설 속에서 에게해의 섬들은 현실을 꿈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풍경인 이아 마을. 흰색으로 치장된 가옥과 골목들이 인상적이다.
400개가 넘는 꿈같은 섬 중에서도 단연 매혹적인 곳은 산토리니다. CF, 영화, 엽서 속의 모습은 소문과 상상 속에서 더욱 선명하다.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산토리니가 그중 하나다.
잔영의 9할은 섬 북쪽 끝 '이아'에서 채워진다. 누구나 꿈꾸던 산토리니를 담아낸 마을이다. 화산이 터져 절벽이 된 가파른 땅에 하얗게 채색된 가옥 수백 개가 다닥다닥 붙었다. 푸른 대문의 집들은 흰 미로 같은 골목을 만들고 그 끝에는 파란 지붕의 교회당이 들어섰다. 그런 교회 수십 개가 꽃잎처럼 마을을 수놓는다. 이아에서는 아랫집 지붕은 윗집 테라스가 되고 사람들은 테라스에 누워 에게해의 바람을 맞는다. 앙증맞은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거나 노천카페에 앉아 달달하고 차가운 프라푸치노 한 잔을 마신다. 골목을 배회하며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이아의 석양이다.
1 연인들은 이아의 에게해를 바라보며 영원을 약속하는 입맞춤을 나눈다.
2 이아 마을의 노을. 해 질 녘이 되면 흰색 마을이 붉게 물든다.
해 질 녘이 되면 산토리니에 흩어져 있던 여행자들은 이아로 모여든다. 마을 너머 작은 섬 위로 해가 지고 붉은빛은 바다를 검게 물들인 뒤 하얀 마을 위에 내린다. 풍차가 있고, 십자가가 있고, 어깨를 기댄 연인들의 가녀린 입맞춤만이 있을 뿐이다.
하얗게 채색된 에게해의 골목
산토리니는 그리스인들에게 '티라'로 불린다. 페리 티켓에도 산토리니라는 말은 따로 없다. 키클라데스 제도 최남단의 화산섬인 티라의 번화가는 '피라'다. 어느 항구에 내리든 여행자들은 일단 피라에 집결한다. 테토코풀루 광장 주변에 그리스 전통식당인 타베르나(taverna)와 가게들이 몰려 있고, 아침녘 거리에 나서면 이곳 주민들이 갓 잡은 생선을 내다 판다.
피라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들지만 아직 정겨운 사람냄새가 가득한 곳이다. 만나는 중년의 남성들은 소설 속의 낙천적인 '조르바'를 닮았다. 섬 속 풍경과 따사로움은 그리스 본토인 아테네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절벽 위 호텔들이 운치 있지만 발품을 팔면 방 하나를 저렴하게 독차지하는 호사스러움이 가능하다. 에게해의 섬들은 6~8월이 성수기. 5월과 9월의 산토리니는 절반은 저렴하고 두 배는 한적하다. 섬은 가을을 넘어서면 을씨년스럽고,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과 함께 상가들이 문을 닫기도 한다.
1 산토리니의 골목들은 눈이 부시다. 블루와 화이트가 대칭되는 색감은 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2 골목에 산토리니의 기념품 가게들은 아담한 집들만큼이나 앙증맞은 모습을 하고 있다.
3 구항구를 오가는 당나귀들. 500개가 넘는 계단을 가뿐하게 오르내린다.
추억의 당나귀가 오르내리는 구항구 쪽으로 티라의 골목들은 늘어서 있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그 끝없는 흰 골목들을 헤매는 게 산토리니 여행의 묘미다. 에게해를 바라보며 절벽에 늘어선 집들은 골목마다 다르고, 아담한 문과 창이 제각각이다. 파란 대문을 열면 낮은 카페와 갤러리가 숨어 있다. 흰 담벼락의 계단에 걸터앉아 '블루&화이트'의 눈부신 변주만 감상해도 하루 해는 짧다.
'아틀란티스'의 전설이 서린 땅
매혹의 섬은 풍광만으로 치장되지 않는다. 섬에 서린 사연과 전설이 덧씌워져 감동곡선을 높인다. 에게해는 숱한 문명의 요람이었고 바다는 자양분이었다. 미노스, 이오니아, 시칠리아인들이 바닷가에 도시를 세웠고 산토리니에서는 고대 키클라데스 문명이 번영했다. 산토리니를 지금의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 것은 수천 년 전의 화산폭발이었다. 섬을 가라앉게 한 화산은 전설을 만들고 신화를 끌어들였다. 그리스인들은 오랜 문명과 침몰을 이유 삼아 산토리니를 전설 속에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로 믿고 있다.
1 절벽 위의 이아 마을. 산토리니는 화산폭발로 생긴 절벽 위에 마을들이 삶터를 꾸렸다.
2 페리사 비치는 검은 모래가 인상적인 해변이다. 지중해의 바다에서 늘씬한 미녀들은 해바라기를 즐긴다.
산토리니에서는 분화구를 일주하는 투어에 참가하거나 페리사, 카마리 비치 등 해변을 찾을 수도 있다. 밤이 이슥해지면 포도향 가득한 그리스 술인 '우조(ouzo)'를 마셔도 좋다. 화산지형의 비옥한 땅에서 나는 산토리니 와인 역시 제법 명물에 속한다. 풍차가 도는 어촌마을이나 누드 비치 등 젊은 청춘들의 이색 해변을 원하면 에게해의 쌍두마차 섬인 미코노스 행을 택해도 괜찮은 선택이다. 미코노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머물며 살가운 풍경을 [먼 북소리]에 담기도 했다.
가는 길 아테네를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까지는 항공기와 고속 페리가 다닌다. 고속 페리는 4시간 소요. 섬에서의 이동을 위해서는 큰 짐은 아테네에 맡기고 떠나는 게 좋다. 신항구인 아티니오스(Athinios) 항구에 도착하면 버스를 이용해 피라로 이동한다. 피라에서는 섬 곳곳으로 버스가 다닌다. 경차 등도 현지에서 렌트가 가능하다. 이아, 피라를 제대로 구경하려면 2박3일 정도가 필요하다. 산토리니와 미코노스간에도 페리가 오간다.